일반 강좌

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5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0-30 01:28
조회
61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니체 스스로 ‘위기의 기념비’라고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니체는 후기 저작의 근간을 이루는 단상들을 제시함과 동시에, 문헌학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자기 자신을 떠나옴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니체는 188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발표하며 자기 책의 서문을 다시 씁니다. 제목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같은 것들인데, 채운쌤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으면서 '재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나’에 대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니체라는 사람’에 대해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떠나온 자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하고 생리학, 의학, 자연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화론을 접한 니체는 거기서 인간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납니다.
니체의 이런 이행은 사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합니다. 채운쌤은 생각은 습관적인 것을 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할수록 분하다’라고 말하며 당시의 감정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지만, 니체를 보면 그건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니체의 사유방식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 즉 자신에게 편안한 것에 대한 의심과 그것들로부터 떠나오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열광한 것들에 대한 실망과 절망, 그리고 그것에 열광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자기 환멸의 시기를 거치지 않으면 습관적인 생각만 양산해낼 뿐 지금 자기를 떠나올 수 없다는 것을 니체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사랑하는 것들과 결별해야 하는데, 그 결별을 잘 해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보통은 반드시 떠나는 자리에 대한 미련과 저주를 동반합니다. 편안함, 지금까지 사랑한 것이 떠나가는 발목을 잡습니다. 사실 이 편한 상태에 좀 더 머물러도 될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니체는 ‘좀 더 편안해지려고 할 때마다 주어지는 대답은 바로 질병’이라고 말합니다. 질병은 지금까지의 습관을 참을 수 없는, 언제나 편안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의 의무가 사실 육지가 아닌 섬이라는 의식을 동반합니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길들여있는지 알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식이요법’도 하게 됩니다. 식이요법은 꼭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도 필요한 것을 찾아 먹어야 하는 치료법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것, 즉 걱정, 친구, 소식, 의무, 어리석은 일, 추억의 고통을 제거해주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영양, 새로운 태양, 새로운 미래를 향해 손과 감각을 뻗쳐나가는 것을 배우도록 해주기 위해 그를 완전히 낯선 환경에 처하게 하는 것과 같이.’ 편안한 것에 대한 의심으로서의 질병과 낯선 것을 강요하는 치료법은 그 자체로 새로운 건강으로의 이행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낯선 것에 대한 긍정,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방랑하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니체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기에, 니체는 자신의 책을 권합니다. ‘너희의 운명은 너희가 어떤 개인보다도 더 심하게 아프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단지 한 개인>인 것만은 아니므로.’ 그런데 ‘단지 한 개인’이 아니기에 질병을 겪어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니체는 문화가 “개개인의 자기 인식의 지식이며 자신에 대한 불만의 지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니체가 문화를 중시하는 까닭은 국가, 종교와는 달리 그 시대가 누리는 문화에는 늘 그것을 벗어나려는 비균질성, 또 다른 것을 탐색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철학의 연대는 유순하고 복종하며 유용한 젊은이들을 양산하지만 문화의 비균질성은 그것들을 전복시키고 뒤바꾸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디오게네스의 말을 인용하며 위대한 철학은 칭찬받기보단 누군가를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편한 것, 전통적이고 평화로운 것을 유지하는 철학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요. 니체는 계속해서 자기가 사랑하고 편안해 하는 것으로부터의 떠남, 그 외의 다른 낯선 것을 탐색하는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자유정신을 위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건 삶을 질병과 회복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도덕주의는 어떤 것이 ‘좋은 것’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럴 때 ‘좋은 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고려되지 않습니다. 도덕주의자들은 ‘좋은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 ‘좋은 것’을 ‘좋지 않은 것’을 저주하는 데 이용합니다. 하지만 니체가 파악한 삶은 모든 ‘좋지 않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삶의 본질은 기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유정신은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뭐 이런 건 아니고, 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힘의 특권입니다. 삶은 너무도 불확실하고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불확실한 삶에 자기를 내던지는 정신,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부정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능동적인 주인의 정신이 자유정신입니다. 이때 주인은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것’에서 어긋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노예와 달리 삶 위에 어떤 목적도 생성하지 못하고 더 높은 자아로 비상하는 자입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니체는 인간이라는 영토를 떠나는 계기를 맞습니다. 인간주의로부터의 떠남, 또 다른 질병을 통해 새로운 건강으로 이행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정신을 통해 자신을 특권화 하는 존재입니다. 신체와 위배된 방식으로 정신은 자신의 영역을 만듭니다. 인간은 자신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또 자신이 한 것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고, 또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자신을 특권화 합니다. 동일성의 오류와 의지의 자유라는 오류를 기반으로 인간이라는 특권적 계층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니체는 인간을 두고 ‘신의 기분전환용’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닮은 존재의 정신적 상상력을 보며 기쁨을 느끼기 위한 유희로서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라고요. 이런 유희의 세계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지요. 인간은 우주의 인형 같은 것, 삶은 무의미하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무의미를 견딜 수 있는가? 니체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특권화 하는 정신이 하는 인식은 일반적으로 착각이고, 허구이며 그로서 신과 국가, 그리고 미래를 사유하게 됩니다. 삶은 무의미하고 인간의 인식은 허구입니다. 삶의 무상을 견딜 수 있는가. 그럼에도 삶을 저주하지 않고 의미를 만들며 살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니체는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좋은 것’, 그리고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던 것은 허구이며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은 사실 특정한 사회 안에서 만들어낸 합의된 허구입니다. 삶의 본질은 기만이며 삶은 오류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성되어 온 사실, 생성되어 온 인식을 온전한 사실, 절대적인 진리가 사실 구성된 것임을 잊어버리는 역사적 감각의 결여가 인간을 계속 본질이라는 허구에 빠뜨립니다. 이런 편안한 것들에 대한 문득 드는 의심은, 질병은 차라리 또 다른 건강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과 회복을 통해 자신이 사랑한 것들이 사실은 특정한 조건 위에서 합의된 일시적인 것임을 알고 삶을 긍정할 사유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진리는 나 혼자 만들어 믿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늘 합의를 바탕으로 하므로, 니체는 질병이 단지 한 개인의 차원에서 체험되고 회복되는 단계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에는 질병과 회복, 문화, 非도덕주의, 非인간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는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천재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재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전혀 다른 존재인 것으로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어떤 예술작품을 두고 그 예술가의 재능이 발현된 산물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니체는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위대한 작품이 단지 그가 타고난 재능 덕으로 보는 것, 그러니까 평범하지 않은 이상한 것, 아주 희귀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자기애와 허영심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천재를 바라보아야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어떤 조형력도 갖지 않으려고 하는 나 자신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재’라고 예찬하는 것은 그를 ‘한낱’ 기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기적은 아니며, ‘완전한 것은 어떻게 형성되었나?’라는 질문 없이 걸작이 왜 걸작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걸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려하지 않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하다고 단정짓고 비난하는 것에 불과한 것. 니체는 걸작을 만드는 위대한 정신은 ‘우선 부분을 완전히 만드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하는 주목을 처음에 끌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실패한다고요.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이런 차이, 성실성과 나태의 지점이라는 것. 채운쌤은 그래서 니체가 사실 듣고 보면 당연한, 하지만 잊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전체 2

  • 2016-10-31 15:10
    '좀 더 편안해지려고 할 때마다 주어지는 대답은 바로 질병'. 왠지 이 부분이 훅 들어오네요. 벌써 오늘이지만 ^^; 간식은 윤진쌤 김미순쌤 소담쌤 세분입니다.

  • 2016-10-31 16:01
    오....... 니체는 진화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궁금하군요! 국가,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는 또 노자의 '유무상생', '반자도지동'과 비슷한 것 같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