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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2-06 14:19
조회
431
이번 주에는 51장에서 60장 까지 읽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채운쌤 강의를 중심으로 인상깊은 장들을 정리했습니다.

51.
51장에서는 도와 덕이 만물을 낳고 기르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도·덕을 각각 하늘의 힘과 땅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도天道와 지덕地德. 덕이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적인 조건이라면 도는 별들의 운행과 같은 원리적인 차원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두 차원을 노자가 동시에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겠죠. 원리적 측면은 현실적 조건 안에서 남김없이 표현됩니다. 인간의 지성은 바로 이 두 차원을 연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양에서 무지개의 여신의 이름이 ‘이리스Iris’(= 말이라는 뜻)라고 합니다. 여기서 ‘언어’, 즉 인간의 로고스는 무지개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이라는 은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한치 앞도 보지 못하고 현실적 조건에 매몰되는 것도, 어떤 이상을 세우고 하늘의 원리와 땅의 조건을 분리시키는 것도 지성을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채운쌤은 또한 ‘존도귀덕尊道貴德’이라는 말에 주목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이 천天과 지地에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하늘과 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우리는 간혹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적 조건과 도의 원리를 떠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죠. ‘자기노력’이라는 망상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자기노력을 통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 자본주의적 윤리는 이런 생각을 권장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게 됩니다.

현덕玄德에 대한 말씀도 하셨는데, 현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덕의 작용을 볼 수 있지만 덕 자체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덕 자체가 가시적이지 않으나 가시적인 것들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52.
52장에서는 우선 천하유시天下有始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진고응 선생님은 일단 ‘시작이 있다’라고 하셨는데, 이때의 시작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때의 시작은 태초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근원을 안다는 것은 태초에 뭐가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용하고 있는 이 변화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희일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자에 따르면 만물의 근원, 세계의 진상을 지킬 수 있다면 위태롭지 않습니다復守其母, 沒身不殆. 물론 우리가 뭘 어떻게 하든 고통스럽고 곤욕스러운 일들은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진상을 지킨다는 것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 것, 자신이 겪어야 할 것을 정확히 보고 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위태롭지 않음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 데에서 오는 마음의 굳건함 같은 것입니다.

요행으로 상황을 빠져나가고자 할 때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게 됩니다. 자신에게 온 것을 피하려면 진상을 거짓말로 덮거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이렇게 할 때에는 나아가야 할 다음 스텝이 없다고 합니다. 각자의 앞에 주어진 것들을 온전히 감당하고 넘어갈 때에만 다음 스텝이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수守와 득得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동서양의 고전에는 지식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지식은 수중에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고 합니다. 매순간 그것을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지식은 창고나 서재에 모셔두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수중에 두고, 몸에 새겨두는 것이죠. 노자에게서도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3.
53장에서 노자는 대도를 걷는다는 것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채운쌤은 여기서 대도가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대도는 꼼수를 부리지 않는 길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꼼수부리지 않고 그냥 가는 것. 그러나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합니다. 항상 특별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뭔가를 배우더라도 항상 쉽게 할 수 있는 요령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배우는 데에 힘올 온전히 쏟기 보다는 요령을 터득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호경好徑의 태도로 정치를 할 때 “조정이 아주 부패하여, 농토를 매우 황폐하게 해놓고, 창고는 텅텅 비었으나, 오히려 비단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맛있는 음식을 물리도록 먹고, 쓰고 남을 만한 재화를 수탈”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처한 당시의 정치적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정치제도의 발전이라는 것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54.
54장에서는 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邦觀國, 以天下觀天下라는 구절에 대해서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대학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닮아 있죠. 여기서는 수신修身에 대한 유가와 노자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점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유가의 경우 수신은 誠意, 正心, 格物致知라는 세부적인 과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경우에는 그저 과욕하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그 내용의 측면에서도 차이를 갖는데 노자의 경우 수신은 도를 깨닫는 것으로 이어지지 다음 단계, 그러니까 齊家治國平天下를 꼭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비해 유가는 항상 齊家治國平天下라는 다음 단계를 전제하고 있죠.

56.
56장에서는 52장에 나왔던 ‘색기태 폐기문塞其兌, 閉其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진고응, 왕필은 이것을 욕망의 문을 닫는 것으로 해석했고, 최진석은 외부 세계와 통하는 제한된 경로로 해석했습니다. 저는 최진석의 해석이 더 와 닿았는데, 외부와 접촉하는 고정된 회로를 막아버리는 것은 도의 차원으로 세계를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이 구절은 빛이 두드러지지 말고 다른 것들과 어울리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말고 먼지 속에 같이 있는 것, 노자는 이것이 현동玄同이라고 했습니다. 인위적인 빛의 경우에 가능한 것이 스포트라이트입니다. 이에 비해 햇볕은 특정한 대상을 두드러지게 비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빛은 화광和光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진석은 현동玄同을 어느 하나를 우뚝 세우지 않고 반대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런 점에서 화광을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빛이 언제나 어둠과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빛이 영원할거라는 믿음을 전제합니다. 현동은 빛이 언젠가는 어두워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7.
57장에서는 노자의 문명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죄가 생겨나는 것은 무언가를 금기시하는 행위와 동시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문명 전반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문명의 탄생을 상징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불. 그런데 헤시오도스는 이 불에 의해 탐욕이 생겨났다고 했다고 합니다. 불을 사용하면서 축적과 농업 등이 가능해지고 그로인해 온갖 약탈이 생겨났다는 것이죠. 문명은 항상 두 가지 측면을 동반합니다.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은 딱 그만큼의 해로움을 동반합니다.

60.
60장에서는 58장에 나왔던 ‘기정찰찰 기민결결其政察察, 其民缺缺.’이라는 문제의식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치가 엄하고 혹독하면 백성들은 곧 교활해진다.”는 것이지요. 작은 생선을 굽는다는 비유도 이와 동일합니다. 지나친 개입, 세세한 참견은 백성을 망치고, 작은 생선이 바스라지게 만듭니다.

60장에서 흥미로웠던 구절은 ‘以道莅天下, 其鬼不神’, 즉 도로 다스리면 귀신과 요괴가 작동을 못한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합리성이 아닌 다른 것들로 인간을 의지하게 만드는 사회에는 제대로 된 도가 작동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대개 나라가 망할 때쯤 되면 미신이 작동하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은 곧 망하겠군요^^; 노자는 기본적으로 도를 알면 쓸데없는 것들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용어들이 나오지만 결국 그것들은 도를 여러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 근본 원리가 되는 도 이외에 복잡한 체계 따위는 노자의 철학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귀신에 대해서도 그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설령 귀신같은 게 있을지언정 자신을 거기에 기댈 필요는 없습니다. 예지력, 신통력은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을 필요로하는 것 자체가 어떤 요행이나 샛길에 대한 욕망과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공부를 안 하면 귀신에 사로잡힌다’고^^; 우리를 유혹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있겠죠. 노자는 귀신을 말하며 인간의 사고 범위를 벗어난 존재에 의탁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노자가 도를 얘기하기 때문에 신비로운 겉모습을 갖고 있지만 실은 굉장히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주에는 61장 부터 70장 까지 읽고 과제를 해 오시면 됩니다. 발제는 은남쌤, 란다쌤이, 간식은 정옥 쌤과 은남쌤이 맡아주셨습니다.

*고뇌에 찬 육군 일병 성민호 군에게 보내고 싶은 책들을 가져와 주세요~
전체 2

  • 2016-12-07 00:05
    56장의 '현동'이 과연 무엇일지 자꾸 고민하게 됩니다. 남들과 섞여 멀리서 보면 딱히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동화. 그렇다고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좀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 (채운쌤은 이게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꼰대냐 아니냐를 가르게 된다고 하셨는데 ㅋㅋㅋ) 내가 남들에게 하는 참견이 정말 괜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가끔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서 근질근질..... 노자의 도덕경 역시 공자의 논어 못지않게 생활 태도를 많이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 2016-12-07 20:15
      '남들과 섞여 멀리서 보면 딱히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동화?' 라구요? 그 상태를 알려면 일단 멀리 나가서 내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확인해봐야 하나요? ㅋㅋㅋ
      和光同塵 에 오지랖이 들어설 자리는 없을 것 같아요. 니나 나나 다 같으니까..?
      띠끌 이야기가 나오니 천하의 좁쌀같은 존재임에 슬퍼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이 무진장한 햇살..바람..을 만끽한다는 적벽부의 아름다운 구절이 떠올라요.
      -가끔은 知足귀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