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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2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2-09 03:56
조회
447
161205 니체 후기

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2강> 후기

늦었습니다ㅠㅠ 이번 시간에도 채운쌤 옆에 쭈그리로 앉아있었던 1人입니다. ㅎㅎ
이번 시간에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책 초반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신은 죽었다’라고 할 때 그 말은 무신론자의 ‘신은 없다’라는 선언과는 다릅니다. 니체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니체가 보기에 신이 없다고 하는 자는 유신론자와 한패인데, 왜냐하면 신 개념을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저기 ‘신’의 자리에 선악이나 이데아나 진보를 넣어도 됩니다. 어떤 이분적인 상을 갖게 된다면, 무엇인가를 전제한 다음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믿는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독단주의와 허무주의가 한패라는 것. 니체는 신을 넘어간 자라는 의미에서 무신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니체도 신을 말하기는 하니까요. 다만 니체의 신은 굳이 말하자면 생성하는 자연이라고 봐야 합니다. 같은 ‘신’이라는 말이라도 그 맥락이 중요한 것.
짜라투스트라가 신은 죽었다고 할 때, 니체가 신을 죽인 건 아닙니다. 시대가 신을 죽인 것입니다. 니체의 질문은 ‘신은 어떻게 죽었는가?’입니다. 신의 죽음은 어떤 절대성, 전통 형이상학의 종말을 말합니다. 플라톤부터 헤겔까지 이어진 서양 전통 형이상학은 이분법을 전제로 합니다. 이데아와 현존, 몸과 영혼, 가변적인 세계와 불변하는 영원한 것. 거기서 인간은 인식을 통해 때 묻지 않는 순수한 것을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서양 형이상학입니다.
기독교를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저편에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이 내재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니체의 시대에는 신이 죽었습니다. 루터가 등장했고 기독교의 권위가 이전처럼 득세하지 못하고 시대는 더 이상 신적인 것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신이 죽었지 신의 자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이 죽은 자리에 인간은 진보를 앉혔으니까요. 니체가 의문을 가진 것은 ‘신적인 것을 죽인 인간이 왜 다른 것을 거기에 앉히는가?’입니다.
니체는 신이 연민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연민은 니체가 보기에 전혀 미덕이 아닙니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짊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입니다. 니체는 우정이란 그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것이지만 계속 편안하게 머물도록 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비유하자면 야전침대가 되어주는 것이 우정이라고 합니다. 그가 고통을 잘 겪도록 하는 것이 우정이라고요. 그런데 신은 인간에게 너무 가까워졌습니다. 편애하고 그가 계속 그 상태에 머물 수 있도록 말랑말랑한 자리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눌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 고통입니다. 이 점을 회피하고, 삶의 부정성이 거세된 세상을 갈망하는 자가 약자이고요. 니체가 보기에 약자들이 기대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의 신입니다. 피안을 갈망하여 고통을 가져갈 절대적인 존재자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이런 회피하려는 자신을 경멸하는 자기경멸을 함께 가지고 있는 약자들. 그런데 재밌는 건 약자는 그런 자신의 못남을 회피해 신의 연민에 기대면서 그런 신의 동정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격자 신이 미운 그들은 신을 살해합니다. 이체가 보는 그 시대의 신 부정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을 동정하고 제어하는 목격자 신을 미워해서 살해한 사람들. 그런데 신을 살해하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똑같아서, 여전히 자신의 추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또 다시 아름다운 환상으로 감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 살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들은 바로 사제들입니다. 니체는 기독교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이 신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로, 구세주로 만든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말했습니다만, 사제들은 사랑이 아닌 신앙을 통한 구원을 말합니다. 교리를 만들고 교회조직을 만들어 구원자 자리에 그리스도를 앉혔습니다. 또한 신에 대한 복종을 말하면서 사제에 대한 복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떼인 신자들을 이끄는 목자들. 하지만 양떼는 목자 없이 무리를 지을 수 없으며 목자 또한 양떼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무리라는 점에서 니체가 보기에 약자입니다. 서로를 전제하며 교회조직과 교리를 만들고 신을 이해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신의 불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하다면 굳이 사제를 통해서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더 나아가 신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체계도 성립되지 못하니까요. 시기하고 질투하는 신의 이미지 자체가 신의 부정입니다. 즉 신의 죽음을 기독교는 이미 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삶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기독교 신을 비판합니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며, 영혼이나 정신은 예수가 살던 시대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요.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저편을 갈망합니다. 무능력과 피로감을 끊어낼 수 있을 신을 만듭니다. 지금의 고통을 회피할, 영원하고 이상적인 것을 상정하고 거기에 기대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이상주의, 영원과 일치하려는 갈망은 생성을 거부하는 죽음과 다름 아니지만, 그것을 끈질기게 갈망하는 것입니다. 신을 죽이고 나서 끈질기게 남아있는 반생성적인 초월성이 문제인 것.
니체는 생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힘의지와 영원회귀 개념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되어갈 뿐’이라고요. ‘되어간다(becoming)’라고 하는 말은 ‘존재한다(being)’는 말과 다른데요. 존재는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뜻을 내포한다면, 되어간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 니체는 후자의 손을 들어줍니다. 존재는 생성이며, 존재는 자기 안에 운동의 목적과 원인을 갖는다고요. 그리고 이 생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지고 오는 개념이 힘의지와 영원회귀입니다.
니체에게서 존재와 생성은 위계가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존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으로 힘의지를 들어 설명하는데요. 이 개념은 힘 자체가 의지라는 것. 존재가 있고 그것이 의지를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가 힘의지들이 전쟁을 일으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존재를 본다면 자기극복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자신의 독단주의를 넘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라는 의미에서 인간을 넘어선 자입니다. 채운쌤은 혈액의 삼투압을 예로 드셨는데요. 압력의 차이가 피를 흐르게 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데, 죽음은 그 차이가 없이 외부와 내부의 압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라고 합니다. 균형은 생성의 끝이고 곧 죽음인 것. 어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거기에 안주하려는 것이 독단을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 세계는 목적 없이 변화하는데, 그것을 간과하고 어떤 좋은 것을 상정하는 순간 그건 내게 좋은 것도 뭣도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전체 2

  • 2016-12-09 13:17
    '신은 죽었다'라는 한 마디 조차 쉬운 게 아니었네요. 다음 시간 간식은 박태순 선생님, 김선경 선생님, 공혜경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

  • 2016-12-12 10:25
    타인의 고통을 짊어질 수 있다는 오만이 인상적이네요. 기껏 우리가 던질 수 있는 것은 위로일 뿐이지만, 이때의 위로도 그가 단순히 고통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되겠네요. 그런데 니체한테는 고통이 무엇일지 살~짝 궁금해집니다. 니체 강의를 처음 들었는데 이토록 재미날 줄은 몰랐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