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유학일기 - 3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1-02 15:12
조회
428
안녕하세요. 3번째 유학일기부터는 전부 다 설명하는 것보다는 재밌는 부분을 중점으로 쓰려고 합니다.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는 선생님의 설명을 다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ㅋㅋㅋ;;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도 저번 시간부터 이어진 기계론적 시각, 인간의 몸을 네트워크가 아니라 부속품의 집합으로 보고 고장이 나면 어느 부분만 고치면 된다는 환원론적 시각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사회를 초월한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사회에 영향을 받으며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는 것을 계속 생각하게 됐습니다.

시작은 분자생물학에 대한 얘기입니다. 분자생물학은 분자 수준에서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하필 분자인가! 원자도 있고 입자도 있는데! 하고 물으신다면, 분자에서 화학적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김동광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ㅋㅋ 그런데 분자에서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곧 분자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니 환원론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일상 속에서 사소한 불평을 하면서 환원론적인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시력만 좋았다면,’ ‘우수한 유전자는 형이 먼저 다 가지고 태어나서 내가 이런가봐’ 대략 이런 생각들이 환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내 신체나 공부가 미숙하다고 느낄 때 단순히 어떤 하나의 원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죠. ㅋㅋ 게놈 프로젝트는 DNA를 해독하여 신체를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여전히 남아있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독은 이미 끝났지만 실용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군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개별 부속품들의 집합체가 아닌 까닭에 마음에 안 드는 부품을 갈아 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게 교체한다 해도 우리가 바라는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 환상이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로 나타난 것이고, 또 언제 이런 환상이 실체화될지 모릅니다.

돌아와서, 분자생물학은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 분과장이었던 워렌 위버라는 사람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빈약한 역사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여러 성과를 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유럽과의 경쟁과 사회주의의 성공,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부딪히자 뭔가 조급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록펠러 재단을 살펴보면 미국이 어떻게 바뀌게 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의 의식을 진보시키려는 목적 속에서 교육과 보건에 관심을 가졌다면, 대공황 이후에는 더 이상 교화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열등한 인간과 원인을 규정하려 했습니다. 저번 시간에 얘기한 이민자들에 대한 IQ검사와 같은 사건들도 이런 흐름 속에 있습니다. 분자생물학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오직 록펠러 재단의 자본에 기대어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자생물학과 관련된 모든 것(심지어 노벨상까지!) 전부 록펠러 재단과 관련됐다고 합니다. 그 전에도 과학이 자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겠지만 록펠러 재단-분자생물학의 관계는 드디어 학문까지 자본화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인 것 같습니다.

과학혁명 때 살펴본 것은 과학이 인종차별의 도구로서 특정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록펠러 재단은 분자생물학에 대한 투자, 학문의 자본화를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도 돈이 되는 쪽으로 연구의 방향을 바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몬산토 같은 거대기업의 유전자 조작이나 고엽제 같은 살충제(베트남전쟁 때 미국이 쓴 바로 그 살충제)를 생산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록펠러 재단 때와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인권문제가 대두되면서 다른 인종을 문제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인종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과는 별개로 현대사회는 이제 인간이 아닌 것, 해충을 인간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인종차별의 전제에 인간의 신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해충을 박멸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우리가 적으로 설정한 특정 곤충을 완전히 ‘박멸’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고, 해충이 없어지면 인간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의 기능과 유전자가 일대일 대응이 아닌 것처럼 해충이 없어진다고 인간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 역시 환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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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반일 포스터입니다. 한 손에는 일본인, 다른 한 손에는 곤충을 들고 있는데, 그때 미국에게는 이 둘이 '박멸'해야 될 적이었습니다. (박멸이란 단어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오른쪽은 1960년 박정희 정권의 쥐 잡기 포스터입니다. 비슷하게 쥐와 공산주의라는 적이 있습니다.

세스코 광고를 보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해충을 완전히 없앨 수 있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은 해충뿐만 아니라 인간의 우울증이나 질병 자체까지 적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몸을 있는 그대로 놔두지 않고 계속 불안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마치 어느 부위가 나중에 큰 위협이 되는 무엇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거나 억제해야 안전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의료기구로 검사하면서 돈을 뜯어내고, 또 눈에 보이는 사진을 들이대면 누가 비싼 치료를 안 받을 수 있을까요. 제 주위에는 아직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데, 요즘 갑상선이나 유방 절개 수술을 받은 얘기를 많이 듣는데 아마 이런 흐름에 속해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혁명 때부터 기계론적 사고, 환원론적 사고는 자연에게 부여된 신비로움을 제거하고 그것을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자본주의와 합쳐서 우리의 일상 여기저기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환원론에 대한 생각은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도 함께 해야할 것 같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치료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병, 해충(이라 부르고 있지만 곤충이겠죠.), 잡초(라 부르고 있지만 이름 모를 들풀이겠죠.)들에 대한 단어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동광 선생님은 과학에 대한 접근이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지를 알면, 새로운 지식을 알아갈수록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연에 대해 알아갈수록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자연의 실체가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자연이지 않을까요?
전체 2

  • 2017-01-04 22:35
    환원론적 사고를 과학의 영역 안에서 옳다, 그르다 평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과학 외적 층위와 결합하고 있는 양상을 볼 수 있게 해주니 재밌네... 이번주도 유익한 유학일기ㅋㅋㅋ

  • 2017-01-22 18:34
    박멸이라는 말 자체가 엄청 무서운 말인 거 같아.. 같은 인간한테도 썼다니. 일본인을 박멸하자도 했던 거네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