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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1-08 19:09
조회
377
다음 주 공지부터 짧게 하겠습니다. 이번 주에 통치의 관점에서 <노자>가 어떻게 법가 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한비자의 <해로>, <유로>를 통해 살펴보았다면 다음 주에는 ‘양생’의 관점에서 <노자>를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프린트 해 가신 홈스웰치의 <노자와 도교>, 그리고 허항생의 <노자철학과 도교> 中 <도가와 도교>를 읽고 공통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발제는 은남쌤이 맡아주셨고 간신은 락쿤쌤과 혜원누나가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 주제가 양생이기때문에 <하상공장구>를 꼭 챙겨 오셔야 하고, 이번 주에 다 다루지 못한 한비자의 <해로>도 다시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공통과제의 뒷면에 에세이 주제와 짧은 프로포절을 써 오셔야 하고요. 헷갈리실 수 있으니 공지사항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홈스웰치의 <노자와 도교>, 허항생의 <노자철학과 도교>를 읽고 공통과제 써오기.
2. 공통과제 뒷면에 에세이 주제와 핵심 키워드를 포함한 짧은 프로포절 써오기.
3. <하상공장구>와 <해로> 챙겨오기.
4. 발제는 은남쌤, 간식은 락쿤쌤 + 혜원누나.

그럼 이번 주 후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에세이를 앞둔 만큼 채운쌤의 강의가 에세이에 대한 조언(?) 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요, 채운쌤은 <노자>가 다른 사상가들에 의해서 해석되는 방식, 다른 사상과 만나는 지점을 잘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진석의 노자, 강신주의 노자, 한비자의 노자 등등을 우리가 읽는 이유는 노자에 대한 가장 완전한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아니겠죠. 노자가 상이하게 해석되는 양상들을 봐야 노자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길도 열릴 것입니다. 전혀 다른 해석들을 경유해야 노자를 보는 관점이 조금이라도 더 엄밀해질 텐데요, 어째서 저는 매번 다른 해석들을 만날 때마다 노자를 처음 만나는 것 마냥 머릿속이 깨끗하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 주에는 한비자의 노자 해석을 만나 보았는데요, 한비자에 의해서 노자가 해석되는 방식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한비자의 사상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겠죠. 우선 이번에 알게된 것은 법가에게 중심이 되는 것이 사실은 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법가는 기준이라는 의미에서의 ‘법法’과 통치자의 통치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술術’, 그리고 ‘세勢’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는 말하자면 힘들의 배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나 묵가와 달리 변화에 관심을 가졌는데요, 그들이 어떤 당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변화하는 현실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노자의 도에서 가져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가나 묵가가 개인의 도덕성이나 탁월성을 중시하는 데에는 인간의 변하지 않는 탁월함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가는 인간의 지속적 탁월성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인간은 ‘세’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을 선하게 하고 악하게 하는 조건, 즉 ‘세’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가는 인간의 도덕성에 기대지 않고 세를 잘 읽어서, 즉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잘 읽어서 거기에 맞는 건전한 제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노자의 세계관은 이러한 정치적 비전에 형이상학적 베이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전제하고 있는 끊임없는 변화는 도의 작용에 의해 설명될 수 있겠죠(反者道之動). 그리고 노자의 유무상생이라는 견해는 법가가 정치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법, 상과 벌이라는 대립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법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에 따라서 법가는 무위를 굉장히 독특하게 가져옵니다. 이들이 보기에 무위는 왕이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어떤 기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어떤 항상된 기준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바로 법가적인 무위입니다. 무위정치는 곧 법을 잘 집행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비자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군주와 타락한 군주 모두를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와 쉽게 접속할 수 있었겠죠. 또한 노자가 말하는 천지불인天地不仁, 성인불인聖人不仁과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물론 법가 역시 통치자에게 덕목을 요구하지만(心術), 그것은 유가나 묵가가 요구하는 종류의 덕목과는 굉장히 다를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간이라기보다는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고 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 인간이 법가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노자의 원문에는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한비자는 리理라는 개념을 도道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리는 일종의 짜임새, 결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짜임새와 결이 생겨나는 기본적 베이스가 바로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리는 계속해서 뒤섞이고 변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와 운동의 원동력이자 베이스인 도는 항상적이죠.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의는 한비자의 통치 논리가 됩니다. 개체들은 항상 변하고 항상적이지 않으나, 법은 항상적일 수 있죠. 그러니까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인간은 항상적인 법을 따라야 합니다.

노자가 말하는,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항상적 원리(도)에 입각한 무위정치라는 것이 결코 통치의 부재가 아니며, 극단적인 경우 가장 촘촘한 제도를 추구하는 법가와도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비자나 강신주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노자의 철학이 통치에 대한 고민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은남쌤의 ‘생각을 촉발시키는’ 발제와 함께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7-01-10 20:51
    한비자와 강신주 선생님의 해석이 비슷한듯 하면서도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강신주 선생님은 단지 노자의 철학을 제국의 통치술로 보고 거기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한 것 같아요. 그저 노자를 통해서 제국의 통치술의 원리를 알 수 있다는 점만 얘기했었죠. 반면에 한비자는 노자의 무위, 천지와 성인의 불인, 미명을 가져와서 완벽한 제도를 설계하면 완벽하게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음...... 어떻게 정리될지는 몰라도 노자 속에서 어떻게든 희망적인 걸 발견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