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1.16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1-12 16:48
조회
373
불교도 그렇고 베다사상도 그렇고, 자아가 느끼는 속박과 고통에 대한 지적 접근과 동시에 수행적 차원의 논의를 펼쳐 보이는 사유를 처음 접했을 때 보이는 대개의 반응이 있는 것 같지요.
좋은 말씀이지만 내게 너무 먼 이야기다… 좋을 것도 같지만 실은 상상이 안 된다… 훌륭한 이야기지만 이게 가능한가… 등등.
좀 잘 살아보겠다고,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공부를 시작한 뒤 많은 분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시지요. 이렇게 공부해서 뭐가 달라지나. 이렇게 읽고 썼는데 왜 안 달라지나. 얼마나 공부하면 멋진 글을 쓰게 되나. ^^;

지난 시간 채운쌤은 이와 같은 조급증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특별한 결과를 기대하며 경전을 읽고 공부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이 정도 읽으면 이렇게 될 거야, 이런 걸 믿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은 수행에도 공부에도 방해가 될 뿐인데,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가진 상과 그에 대한 집착을 안은 채 시작했을 때 정작 중요한 공부 과정은 부차적인 것, 도구적인 것이 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죠.
저것을 위해 지금 해야만 하는 것, 저 멋진 상태를 위해 참아내야 할 것… 이게 공부가 되는 순간 공부하는 과정은 지옥이 되고 말지요.
물론 어떨 때는 즐겁기도 하지만, 공부란 게, 다른 모든 것도 그렇지만, 절대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내 예상대로 되는 게 아니고, 결과물이 출력되는 게 아니니까요.
매번 새로운 문제와 부닥치고, 바뀐 것 같아도 도로 그 상태가 되고, 이렇게 많은 공을 들여도 표면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 같고, 물리적 여건 때문에 집중할 수 없을 때도 많고.
그러니 목적지만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이 길은 참을 수 없이 힘든 여정이 될 뿐.

저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 소설이나 영화는 결말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결말이 중요한 영화도 있는 듯하지만(그래서 스포일러니 뭐니 하는 거겠죠), 아무려나 훌륭한 작품은 한 장면 한 장면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사람을 매혹시키지요.
소설의 마지막이 궁금한 사람은 조바심 탓에 빠른 스피드로 책장을 넘기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직 지금 집중하고 있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만이 있을 따름.
수행도 마찬가지라는 게 채운쌤의 설명이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그려놓고 시작해서야 그 누가 수행의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을까요. 수행자는 그런 상상과 분별을 내려놓고 오직 바로 지금에 집중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수풀로 들어간 바라문들은 자신이 지금 감각하는 이 모든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의 현재지요. 고통 없는 미래를 예측하지 말고 바로 지금에 온전히 집중해, 지금 할 수 있는 바를 하는 것, 그게 수행자의 태도랍니다.
붓다는 그래서 ‘열반’에 대한 말씀을 아끼셨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네요.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거기서 보이는 지극한 허무주의적 태도였습니다.
다른 게 허무주의가 아니지요.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것들을 다 젖혀두고 오직 저 너머의 영원한 것, 극진한 믿음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저 진실한 세계만을 꿈꾸는 게 바로 허무주의. 덕분에 지상의 모든 것이 죄 있는 것, 고통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채운쌤은 기독교가 오직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고 그러면서 모든 것을 고통으로 치부한 것과 달리 우파니샤드 사상을 비롯한 동양의 철학은 고통 그 자체에 충분히 주목한다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어떤 고통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통스러운지 이를 묻고 살필 뿐, 고통 없는 어떤 표백된 세계에 대한 상이 없다는군요.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삶을 살피는 게 고대 인도인들이었다고.

이런 맥락에서 우파니샤드의 사유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답니다.
모든 문제는 다음에서 시작하죠. “지금 난 고통스러워!”
자, 마인드 컨트롤로도 심리 상담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이 고통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마주했을까요? 거기에 바로 ‘브라흐만’이 자리합니다.
나는 저 사람/관계/사물/사건이 싫고, 이 사람/관계/사물/사건이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욕망하고 저것을 증오하고, 건강을 누리고 싶고 죽음을 맞이하기 싫다고 생각하지요.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같은 분별과 집착이 자신을 낱낱의 인간 중 하나로밖에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해요. 나는 나, 너는 너, 하늘은 하늘, 돈은 돈… 그러므로 나는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저 사람은 저건 조건인데 나는 이런 조건인 게 억울하고, 죽으면 모든 게 끝장나는 것이니 허무하고 슬프고…….
힌두 사제들은 이 모든 고통과 탐착이 무지에서 온다고 말하는데, 그 무지의 정체는 내가 오직 나라고만 생각한다는 데 있다지요.
지금 이런 식으로 지각하고 사유하는 나는 사실 전체 우주, 즉 브라흐만의 표현 중 하나인바, 실은 내 안에 곧 브라흐만이 있고 브라흐만 안에 내가 있으니 나는 내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것들과 동떨어진 개체가 아니라 브라흐만 안에서 그들과 하나인 브라흐만이라는 거예요.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이번에 읽은 우파니샤드 2권 초반에 등장합니다.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지만, 여기서 브라흐만(아트만)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만든 게 아니었지요. 물도 하늘도 빛도, 또 음식이나 인간도 모두 브라흐만의 자기표현이지 브라흐만과 상이한/하등한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한 인간은 브라흐만 안에서 아트만을 가진 채 살면서도 이 모든 것이 낱낱의 것이라 여기니 바로 거기에서 고통이 생겨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파니샤드는 현상세계를 부정하지 않되, 깨닫지 못한 자에게 현상세계가 거짓된 모습으로 출현한다는 것, 그것이 고통을 낳는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자, 그러니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겠지요. 나를 개별자가 아니라 전체로서 보는 것. 세계를 하나의 브라흐만으로 느끼는 것.

부단한 수행을 통해 이를 깨달았을 때 드디어 수행자는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에서 기인한 온갖 일들로부터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습니다.
내 四肢에 생긴 사건, 내 형제부모에게 엄습한 사건이 惡이 아니라 브라흐만의 전개임을 이해한 자만이 이전과 같은 들끓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이 같은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에 대한 내 느낌은 어떤지 운운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성실한 이해가 먼저겠지요.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책을 있는 힘껏 읽지도 않으면서 어렵다, 헷갈린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 운운, 이래서야 깨달음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될 턱이 없지요 ^^;;
경전을 힘들여 읽는 것 자체, 문득문득 생기는 여러 가지 느낌과 상상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 질문을 끌고 갈 힘을 기르는 과정, 그게 곧 수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행자가 스승과 깨달음을 찾아 수풀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수행하듯 책을 읽어야지 싶어요.

자, 다음 시간에는 2권 12부까지 읽어오시고요. 모두모두, 반드시, 수행하는 마음으로, 공통과제 해오시고요.
간식은 태욱샘께 부탁드렸습니다.
자, 그럼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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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13 18:20
    수경쌤 후기 통해 다시 한 번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