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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 동사서독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3-20 16:36
조회
216
안녕하세요. 드디어 장자, 그 중에서도 내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미리 예정되었던 암송을 하동쌤과 완수쌤 빼고는 해오지 않았죠. 하하;; 그러니 모두 다음 주에는 잊지 말고 암송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란(禍亂)을 피하실 수 없습니다. ㅠㅜ (그녀가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장자 내편 중 첫 째 장인 소요유를 읽었는데, 저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곤이 붕이 되는 이야기, 날아가는 붕을 보고 비웃는 매미와 비둘기. 특히 붕을 비웃는 매미와 비둘기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붕새는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처음에 읽을 때는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는 매미와 비둘기로 읽혔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곤이 붕으로 화(化)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곤은 그 스스로 머문 곳에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에 붕으로 ‘화’한 것일까요? 그런데 뒤에 나온 이런 사고를 부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이 두 벌레가 이처럼 큰 일에는 큰 준비가 필요한 이치를 또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장자는 매미와 비둘기와 같은 짧은 식견으로는 곤이 붕으로 ‘화’함을 이해하지 못함을 얘기한 것일까요? 그러면서 붕처럼 ‘화’하기 위해서 대지(大知)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또 문제가 생깁니다. 뱁새에게 필요한 것은 나뭇가지 하나이고, 두더쥐에게 물을 마실 때 필요한 것은 황하 전체가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는 정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현재 처지를 인식하고 만족하라는 얘기처럼 들렸는데, 그러면 또 곤은 붕으로 왜 ‘화’한 것일까요? -_-;; 재원누나도 앞에서 얘기한 것을 뒤에서 비판하는 것 같아서 이런 모순을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완수쌤도 ‘그렇다면 모두 붕이 되어야만 목적 없이 노닐 수 있는가?’를 질문하셨습니다. 채운쌤은 소요유편뿐만 아니라 장자는 전반적으로 비균질적인 텍스트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모순이 계속 일어나지만, 오히려 그게 장자를 읽는 맛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별토론을 하면서 재원누나의 질문에 대해 얘기했는데, 결국 장자는 한 달을 넘기지 못하는 매미의 삶이나 8천 년을 봄과 가을로 삼는 대춘의 삶이나 모두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결론이 났습니다. 따라서 대지(大知)든 소지(小知)든 중요한 건 이 구분 자체를 넘어가는 것이 장자의 철학이라는 것이죠. 채운쌤은 장자가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얘기했지 무용(無用) 그 자체를 얘기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무용이든 유용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의 쓸모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그런 쓸모에 주목하는 자신에게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접여처럼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겠죠. ㅋㅋㅋㅋ

하지만 정말 접여가 정신이 이상해서라기보다는 이미 그 마음에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천하를 품고 있기 때문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한 왕보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없어야 비로소 미치광이의 자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쓰여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미칠 수 없다. 그들은 반드시 규범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하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음으로써 세상을 위해 필요한 도덕과 사회적 밑천을 획득해야 한다. 그러나 접여는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미치광이가 되었던 것이다.”

장자의 철학이 속세로부터 멀어지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장자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자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서 치열하게 살았으니까요. 오히려 속세를 떠나자고 했으면 철학 자체가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지 않고(혹은 떠날 수 없는)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그런 점에서 장자와 노자와 공자는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걸 공통과제로 어떻게 풀어보려고 했지만, 쓰면서 그들이 인식한 각각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느낌만 있는 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죠. 껄껄껄

어쨌든 그 다음으로는 곤이 한순간에 ‘화’해서 붕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곤의 수많은 노력이 담겨있었고, 붕으로 ‘화’한 이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도 수련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 같았습니다. 채운쌤은 유가만 수련을 중요시한 게 아니라 동양에는 기본적으로 수련이 깔려있다고 합니다. 도가가 도교로 확장된 것은 그만큼 그 텍스트 안에 수련의 사유가 담겨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었죠. 오히려 수련에 대한 중요성은 유가보다는 도가가 더 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곤이 붕으로 ‘화’했다고 해서 그것이 수련의 과정이 끝났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곤은 붕으로 ‘화’한 뒤에도 여전히 3천 리 바다를 날개로 쳐서 하늘을 오르고, 회오리바람을 타서 9만 리를 날아갑니다. 채운쌤은 이러한 행위 모두가 자신의 기반을 떠나려는 붕의 노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창망한 하늘을 정원처럼 거니는 붕은 뭔가 좀 다를까요?

사람들은 티끌이나 아지랑이와 같은 사라질 현상에 매달리며, 그것이 현상인 줄도 모르고 치열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광활한 저 하늘을 바라보며 그저 푸르다고 느끼며 이상향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붕의 시선으로 보면, 이 세계란 그저 티끌이나 아지랑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9만 리를 나는 붕의 시선으로 보면 지상이야말로 인간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늘이라고 합니다. 즉, 사람들은 저곳을 이상향이라고 얘기하면서 바라지만, 사실 이상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이 이상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입니다. (이건 노자의 거피취차(去彼取此)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보면, 곤이 붕으로 ‘화’한 것은 신체적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지금 있는 이 세계가 티끌이나 아지랑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겠습니다. 왕보는 세계가 달라질 수는 없지만, 자기 마음이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달라지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부터가 달라지고, 그것은 곧 자신의 신체를 감각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잠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레로 ‘화’했습니다. 벌레가 된 그는 팔만을 움직이려 했는데, 수많은 팔다리가 한번에 움직이고, 처음에는 인간의 습속대로 자고 걸으려고 했지만 점점 벌레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생활(정확히 말하자면 벌레처럼 걷는 것이겠죠.)에 익숙해집니다. 이렇게 벌레가 된 잠자는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가족과 관계 맺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벌레이기 때문입니다. 즉, 벌레로 ‘화’한 잠자는 자신의 신체를 감각하는 방식부터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마음이 바뀌지 않은 것일 테니까요. 저는 가정을 홀로 책임졌던 잠자가 이렇게 변하면 나머지 구성원들이 잠자를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화’해서 어떠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욕망이고, 그것이 제가 ‘목적 없이 노니는 삶’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

창망한 하늘을 날아다니는 붕은 바다를 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처럼, 언젠가 지금 자신이 거닐고 있는 하늘마저도 떠날 것입니다. 따라서 ‘화’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전복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동양의 공통된 경지인 도(道)를 깨닫는 것에 대한 장자의 언급은 안 나왔지만,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 걸어가야 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걷는 과정이라 할 수 있고, 곧 어딘가에 안주하려 하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왠지 느낌적으로 그렇지 않나요? 아님 말고요.) 이렇게 보면, ‘화’를 깨닫는 것은 ‘도’를 깨닫는 것과 같은 말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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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2 10:42
    에피소드가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막상 생각들을 하려니 만만치가 않네요! 꼼꼼히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죠.. 규창이 후기에선 껄껄껄에 깜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