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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첫 시즌 마지막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5-02 00:36
조회
280
안녕하세요. 늦었습니다. 마지막 강의후기를 이렇게 늦게 올리는 전례를 만들어버렸군요. 죄송합니다. (_ _) 얼른 시작하겠습니다. ㅠㅜ

이번 시간에는 저번에 예고했던 대로 장 비고의 <품행제로(Zero for Conduct)>를 봤습니다. 옛날 영화를 보면 가끔씩 느끼지만,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작품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영상미나 촬영기법, 선명한 화질에서 영화가 세련됐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런 기술들이 아니라도 충분히 수작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요즘 상영되는 영화들 중에는 보고 나면, 이게 영환지, 드라만지 구분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는 채운쌤이 예고하신 베개싸움을 하며 깃털이 흩날리는 장면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그 장면도 좋았지만 다른 장면들도 좋더군요. 특히 마지막에 학생들이 지붕에서 깃발을 꽂고 물건을 던지는 장면이 재미있었습니다. <품행제로>란 영화는 한국에도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양아치 류승범이 나오죠. 그런데 장 비고의 <품행제로>는 그런 양아치는 나오지는 않지만 교사들의 통제로부터 자꾸만 벗어나는 학생들이 나옵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품행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통제를 하려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학생들이 일으키는 난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때 위게 선생이 “우리가 이겼다!”라고 하는 말이 왠지 모르게 가슴에 꽂혔는데, 정말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게 규율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저항의 한 지점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잘 잡히지는 않네요. ^^;;

이번시간에는 규율권력이 신체를 생산하는 방식에 대해 들었습니다. 지금 시대는 다재다능한 사람이 각광받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사람이 요구되는데, 스펙이 얘기되는 것도 그 일환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가 아닌 ‘나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자질을 가졌습니다.’를 말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푸코는 이것을 시스템에 가장 순종적이고 규격화된 신체라고 말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뮤직 비디오를 봤는데, 한 학생이 쓴 ‘시’를 교사가 공개적 놀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학생들은 정해진 레일을 따라 이동하는데, 그때 그들은 표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얼굴가죽복면(?)을 쓰고 있습니다. 얼굴인 줄 알았는데 몇 번 보다보니 얼굴이 아니라 매우 기괴한 복면을 쓰고 있더군요. 그들은 그 레일 위에서 가만히 있다가 결국 어딘가로 떨어지는데, 이것은 학생들의 개성을 말살하고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신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특정한 공정을 거친 학생들은 그들을 구획하고 분리하는 교실을 쌓는 모난 부분이 없는 벽돌이 됩니다. 이것은 비단 학교에서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유용한 신체는 그 자체로 시스템에 순종적인 신체임을 뜻합니다. 사회에 유용해지게끔, 시스템에 순종적으로 되게끔 사람들은 여러 공정을 거쳐서 규격화되는 것입니다.

푸코는 시스템에 순종적이게 된 신체를 양떼 속의 한 마리의 양으로 설명합니다. 무리에 있는 양 한 마리는 무리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리 속에 있어야만 양치기가 자신을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끌 것이고 또한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푸코는 규율권력이 주체를 생산하는 방식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먹이를 구하기 쉽게 하고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규율권력의 효과입니다. 무리 안의 양은 자신이 무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제도 안에 있어야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푸코는 편리한 생활을 누리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자신이 누리는 생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편리함을 얻은 대가로 무엇을 잃은 것은 아닌지를 질문하라고 합니다.

규율권력이 신체에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풀어보자면, 그것은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의 변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17세기만 해도 신체형이 가해지는 방식은 민중에게 보여지는 스펙터클의 형태였습니다. 민중은 통치자에게 대항하는 자의 말로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으로 권력에 대항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형벌은 고작 70~80년 만에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 다음에 등장한 형벌은 이전과 달리 범죄자에게 신체형을 가하고 그 과정을 민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범죄자들을 규정하는 기준도 달라지는데, 그들은 통치자의 권력에 반하는 자가 아니라 사회에 부적응한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형은 신체형이 아니라 교화와 교정의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민중의 위치 또한 바뀝니다. 형벌의 과정을 지켜보는 군중의 위치에 있던 민중들은 이제 언제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는 잠재적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되어 보여지는 위치에 처합니다. 채운쌤은 학교 다니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당시 쌤이 다니신 학교의 자랑은 시험을 칠 때 감독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전통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시험 때 누가 부정행위를 저지르지는 않는지 서로를 감시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실제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여부보다는 자신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감시하는 시선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규율권력이 신체에 작용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딜 가도 설치되어 있는 cctv는 누군가가 자신의 행위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푸코는 이것을 ‘판옵티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판’은 ‘넓음’, ‘옵티콘’은 ‘보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넓게 본다’는 의미인 것이죠.



위에서는 각 방에서 수감자가 무엇을 하는지를 볼 수 있지만, 밑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조심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근대 규율권력이 노리는 효과입니다. 기나긴 과정을 거쳐서 범죄자를 죽이고 그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푸코가 분석한 규율권력이 신체에 작동하는 방식은 4가지로 기술할 수 있습니다.

1. 규율권력은 공간을 분할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공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규율과 서열, 기준을 만듭니다. 채운쌤은 그 예로 학교에서 등수에 따른 자리배치가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셨습니다. 교탁에 가까이 앉은 사람일수록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 없이도 자리에 따라서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개체를 배치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규격화된 신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규율의 중요한 첫 번째 조작은 혼란스럽고 무익하거나 위험한 집단을 질서가 잡힌 집단으로 바꾸는 '생생한 일람표'를 만드는 일이다.”(채운쌤 강의안)

2. 규율권력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분할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합니다. 신체는 시간표(혹은 계획표)를 통해서 움직이는데, 동일한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지가 중요합니다. 규율권력이 자본주의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 자본주의에서도 일정시간 안에 효율적인 노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유용하다는 것은 그만큼 시스템에 효율적인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동시에 가장 규격화된 인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무용한 사람, 비정상인 사람은 시스템에 부합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3. 유용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의 시간에도 의미가 생겼습니다. 개인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은 그만큼 시스템에 순종적인 것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규격화하는 것에는 과정만이 반복되지 완성이란 없습니다. 즉, 개인이 시간을 쓰는 것은 시스템에 순종적으로 되는 성장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체는 더욱 유용해져야 하고, 그에 따라 신체에 매겨지는 반복적인 행위, 훈련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끊임없는 복종=주체화. 학교에서 군대로, 공장으로, 병원으로, 감옥으로. 모든 과정에 끝은 있지만 완성은 없다!”(채운쌤 강의안)

4. 주체를 배치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형벌이 바뀐 이유 중 하나는 이전의 방식이 너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억압으로 규율을 내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서로를 감시하고 내면화하게 만듭니다. 여기에는 누군가의 의도가 있지 않습니다. 규격화된 사람이 새로 들어온 사람을 규격화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모델이 군대입니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질서정연한 명령체계가 자리잡혀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계속해서 순종적인 신체를 생산하죠. 선임은 후임을 교육하고, 후임은 나중에 새로 들어온 자신의 후임을 교육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규격화함으로써 거대한 기계를 돌리기 위한 하나의 부품이 됩니다. 푸코는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푸코와 들뢰즈는 권력이 작동하는 자리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양떼의 무리에는 항상 순종적인 양과 더불어 무리화 되지 않은 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뮤직 비디오에서 학생들은 벽을 부수고 학교를 불태웁니다. 비록 이것은 시를 지적받은 한 학생의 상상에 불과한 일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 같은 학생에 의해서 규율권력에 균열이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규율권력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균열을 낸다는 것, 규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뭘까요?

1840년 <재판신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베아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법관의 규정에 대해서 자꾸 빗겨납니다. 법관은 일을 하는 게 좋지 않냐,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냐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베아스는 자신은 이렇게 사는 것이 좋고, 주위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남의 속박을 싫어하는 자유인이요.”라는 말로 대화를 끝냅니다. 베아스는 2년형을 선고받는데, 그때도 “2년이라면 기껏해야 24개월밖에 안 되겠군요. 자, 일어서지요.”라는 말로 가볍게 받아들입니다. 저라면 베아스와 같은 태도로 형벌을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형벌을 받는다는 것에 겁을 먹고, 그 형을 어떻게든 깎으려고 하겠죠. 이것은 무리를 벗어나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것은 지금 자신의 삶을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바꿔야한다는 생각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습 또한 요구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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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2 08:38
    사목권력은 통치성 개념과 연관해서 언급한 것인데. 한 마리를, 동시에 전체(양떼)를 관리하는 권력. 이 문제는 다음 시즌에 정리하기로 합시다. 그나저나 이토록 뒤늦은, 눅눅한 튀김 같은 후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