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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첫 시간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5-28 05:38
조회
223
첫 시간부터 후기가 늦어져버려 죄송합니다(ㅜㅜ)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가 혜화동에서 명륜동으로 옮겨오는 동안 푸코의 고민도 이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의 푸코가 권력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면, 이번 주에 만난 그는 여전히 권력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채운샘이 전해주시는 푸코를 접하다보면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문서고에서, 혹은 어딘가의 강의실에서, 혹은 거리에서 진지한 얼굴의 푸코가 어떤 문제에 골몰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항상 후기를 쓰는 건 막막하기만 하네요. 팬을 자처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직은 낯설기만 한 푸코와 그의 사유에 대해서, 그가 몰두했던 문제에 대해서 직접 읽지도 않은 채로 이러쿵저러쿵 떠든다는 게 새삼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읽어도 이해 못 할 거라는 비겁한 말로 부끄러운 마음을 회피하며, 일단 뭐라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시즌인 만큼 채운샘은 (진부한 말로 표현하자면) 푸코가 어떻게 현재적으로 읽힐 수 있는가, 어째서 여전히 우리가 푸코의 사유에 주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를 짧게 해주셨습니다. 17세기 유럽의 철학적 지평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에 형성된 단층과 유사한 어긋남이 20세기엔 사르트르와 구조주의자들 사이에 놓여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라는 개념을 통해 ‘사유하는 나’를 자기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습니다. ‘생각하는 나’의 자명성, 모든 것에 대한 회의를 가능하게 하는 자기인식의 확신으로부터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데카르트에게 주체는 출발점이었던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스피노자는 주체에 대한 믿음을 철회합니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정신은 신체와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의 신체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역시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스피노자는 ‘자기인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 우리가 자연을, 세계를 이해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주체는 더 이상 출발점이 아닌 것이죠.

사르트르는 또다시 주체를 모든 문제의 출발점으로 놓습니다. “주체가 역사를 떠맡아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것. 물론 이러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는 나름의 시대적 고민과 진실성이 담겨 있었겠죠. 5만 명이 운집했다고 하는 사르트르의 장례행렬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르트르 이후의 지식인들은 그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답답함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거운 윤리적 관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요.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서구철학의 오랜 믿음을 의문에 부친” ‘레비-스트로스’라는 해방구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로부터 시작된 구조주의는 주체를 끊임없는 주체화의 과정의 일시적 결과물로 정도로 바라봅니다. 실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혹은 과정을 문제 삼는 것이지요. 라깡의 경우 정신분석학이 주체화의 과정을 분석하는 재료가 되었고, 알튀세르의 경우에는 맑스 유물론이, 푸코의 경우에는 역사가 그러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구조주의가 택한, 주체를 의문에 부치는 방식은 우리의 사유를 보다 래디컬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더 이상 권력은 주체를 제약하고 억압하며 방해하는 힘으로서 외재해있지 않습니다. 또한 권력은 역사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주체에 부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도처에 있습니다. 힘은 A로부터 B로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를 둘러싼 다차적인 관계들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러니까 푸코에게는 ‘주어진’ 주체가 없는 것처럼, ‘주어진’ 권력도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억압의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사유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왜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우리는 스피노자가 제기한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푸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종류의 억압도, 권력도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억압에는 우리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즉 우리의 욕망이, 우리 자신이 이미 연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착취자는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채운샘은 프랑코 베라르디의 ‘프로작 경제’를 인용하여 설명해주셨는데요, 신자유주의는 ‘자기실현 이데올로기’와 ‘행복명령’이라는 미래 가치의 압박에 의해 모든 이들은 ‘자기비하와 슬픔, 무기력’을 달고 살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프랑코 베라르디는 압박에서 오는 우울증의 치료제이자 시장으로의 복귀를 가능하게 하는 각성제인 ‘프로작(항우울치료제)’이 신자유주의 경제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주변을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프로작’을 복용하지 않더라도 ‘프로작’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처럼 벌어서 해외로 나가 숨 한 번 쉬고, 개처럼 번 돈을 배설하듯 쓰며 ‘탕진잼’을 추구하고, 병적으로 쇼핑과 수집을 합니다. 꼭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다시 업무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각성시켜주는 무언가에 집착적으로 매달리는 것 같습니다. 붕괴와 각성의 왕복운동. 이러한 것들은 먹고사는 일의 팍팍함, 혹은 경쟁의 고단함의 반작용인 것일까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사이비 사제의 보살핌을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우울증 환자가 프로작을 욕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착취를 욕망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닫힌회로 속을 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를 욕망하기 때문에 착취에 스스로를 맡기고, 휴일과 휴가를 욕망하기에 일상적인 노예상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을, ‘정치’를 욕망의 차원에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일한 욕망의 배치 속에서 ‘더 좋은 조건’, ‘더 나은 노예상태’를 욕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상태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체 이전’을 사유한 푸코의 철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 사유는 많은 경우 오해에 부딪치곤 합니다. 푸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죠. 푸코는 말해진 것과 보여진 것으로부터 ‘말해지지 않은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을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푸코의 시대에 푸코 자신의 텍스트는 그러한 방식으로 읽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독립적 실체로서의, 모든 사유의 출발점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부정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담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유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푸코는 해명을 할 필요가 있었죠. 사실 ‘주체화의 과정’에 대한 사유는 ‘다른 식으로 주체화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죠. 푸코는 ‘어떻게 이러한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를 줄곧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통치일반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환상에 대한 거부와 동시에 새로운 주체화에 대한 고민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감시와 처벌>(1975)과 <앎의 의지>(1976)에서 푸코는 ‘주체화의 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시와 처벌>과 <앎의 의지>를 연결해주는 키워드는 ‘권력’, ‘지식’, ‘육체’입니다. 푸코는 물질적 차원과 언표적 차원을 동시에 분석함으로써 근대권력이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에 대한 통찰에 이릅니다. 푸코가 형벌체계의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이끌어낸 근대의 ‘규율권력’이 독특하게 문제 삼는 것은 ‘범죄성’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보복’처럼 ‘범죄행위’에 가해지던 신체형은 점점 도태되고, 대신에 점차 범죄자의 ‘범죄성’을 문제 삼게 됩니다. 그러니까 법을 어김으로써 주권자의 신체를 훼손한 범죄자를 과시적으로 벌주는 대신,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범죄자의 ‘범죄성’을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범죄자(=‘인간이라는 척도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지닌 비정상적 인간’)의 위험성을 차단하고 교화하여 ‘규율에 스스로 복종하는 순종적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이렇게 규율권력이 순종적인 신체를 생산하는 방식을 통해 학교, 군대, 감옥, 공장 등의 공간에서 동일하게 작동하는 주체화의 과정에 주목했다면, <앎의 의지>에서는 근대적 ‘성적 주체’의 주체화 과정을 탐구합니다. 근대의 성적 주체와 관련해서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고백이라는 제도’입니다. 13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고백의식은 원래 ‘공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고행의식’이었지만, 점차 상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며 16세기에 이르면 상징적이 된 고백의식은 특정한 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사제들이 일종의 ‘욕망의 쓰레기통’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요, 신도들의 고해성사가 증가함에 따라 사제들의 ‘마귀들림’도 따라서 비정상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채운샘은 미셸 세르토의 <루됭의 마귀들림>이라는 책을 언급하셨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고백의식은 진실을 산출해내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합니다. 고해성사는 결코 이미 존재하는 어떤 ‘진실’을 사제 앞에서 고백하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고백해야 할 ‘진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생산합니다. 이러한 제도에 의해서 진실이란 감춰진 것이 되고, ‘내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것’이 됩니다. 채운샘이 예로 드셨던 것처럼, 고등학교 때 자주 했던 ‘진실게임’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겠죠. ‘진실게임’에서 다뤄지는 ‘진실’이란 표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 아닙니다. 직접 말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를만한 어떤 것이죠.

이러한 진실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은 범죄의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백’을 통해 범죄자는 범죄의 진실을 스스로 생산하게 되고, ‘범죄자’라는 주체로 생산됩니다. 이는 성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19세기에 성담론과 관계하는 고백의 메커니즘은 ‘과학담론’으로 편입됩니다. ‘임상의학’이라는 형태로 과학담론에 편입된 ‘고백’은 광인, 범죄자, 어린아이, 동성애자 등의 ‘주변적 성’을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정상적 성’이라는 관념을 출현시킴으로써 성적 욕망을 가족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푸코는 18~19세기에 있었던 ‘반자위행위 캠페인’에 주목하는데, 이는 부모에게 아이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의사에게 의존하게 만듦으로써(“감시는 부모에게, 치유는 의사에게!”) 부르주아 계급적 정체성이자 자본주의의 핵심적 범주인 ‘가족’을 새롭게 출현시킵니다.

언뜻 무관해 보이는, 범죄 영역에서의 ‘규율권력’과 성담론 안에서 탄생한 근대적 가정은 사실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정은 “규율 시스템 내부의 본질적인 부품”이라는 것이 푸코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규율권력과의 관계에서 가족은 규율공간으로 기능합니다. 규율권력의 하청업체라고나 할까요. 학교, 군대, 공장, 감옥. 우리는 가정을 매개로 이러한 규범공간들을 가로지르며, 우리는 ‘서로를 위해’ 규범공간에 영속적으로 묶이게 됩니다. “가정이란 규율권력이 마련한 저수지”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규율을 어긴 범죄자들의 ‘유년시절’에 그토록 관심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우리는 정상의 규범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마주할 때 자주 ‘가정교육’에 대해 질문하곤 하죠...)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상반된 두 공간, 가정과 감옥은 사실 ‘규율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뗄레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은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겠죠.

지금에 와서 가족은 해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족의 해체와 가족이라는 환상은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의 상상 속의 가족은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범주는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대적 제도이자 상호착취의 시스템인 ‘가족’을 냉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냉소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며, 어떤 혁명성도 가지고 있지 않죠.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 주는 정서적 안정에 나태하게 머무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체 2

  • 2017-05-28 10:42
    푸코님이 들으면 서운해하실 지 모르지만,,, 자꾸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늘어가는 일 인 ㅠㅠ 반장님의 친절하신 후기로 정신 차려봅니다. 게다가 애교있는 빈 칸 채우기 문제까지 내주시고...
    "왜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정답을 알려주시어요^^

  • 2017-05-28 17:43
    아래 푸코 사진은 무슨....?? 푸코가 우리를 굽어살피는 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