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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3강 후기

작성자
거나
작성일
2017-06-09 14:47
조회
205
이번 강의를 듣기 전, 저는 푸코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면서도 어째서인지 결벽증적인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모 때문에(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렇게 느낀 것일까요? 제가 그렇게 느낀 이유야 어쨌든 분명 푸코한테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번의 저작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벼리며 “자기 자신의 확신에 완전히 편안함을 느끼지는 말 것”이라는 교훈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 그의 저작목록을 보면 뭔가 엄청나게 정제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는 푸코의 일면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푸코가 발표한 정밀하게 다듬어진 저서들 사이사이에는 ‘시끄러운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푸코는 많은 강의를 하고, 여행을 하고, 정치적인 활동들을 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앎의 의지」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생명권력’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푸코의 강의록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중심으로, 「앎의 의지」와 「쾌락의 활용」 사이에 가로놓인 8년의 공백기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채운샘은 특히 공백기 동안의 푸코의 정치적 경험들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는 푸코가 굉장히 래디컬하게 사유하면서도 전혀 냉소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쩌면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갔기 때문에 오히려 냉소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운샘은 공백기 동안의 푸코의 행적을 가장 나중의 일부터 역순으로 훑어 주셨습니다. 우선 1981년, 푸코는 무장강도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로제 크노벨스피스가 자신의 주장을 알리는 책을 출간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 책의 서문을 씁니다. 물론 사람들은 범죄자를 감싼다며 비난했죠. 아마도 권력의 문제를 선/악의 구도로 보는, ‘악한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선량하고 결백한 피해자’와 같은 구도로 모든 문제를 바라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뻔뻔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로제 크노벨스피스는 굉장히 불편한 존재였으리라고 짐작됩니다. 푸코는 로제 크노벨스피스가 선한 이인지 악한 이인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는 비판자들이 사법기관에 선/악의 판단을 위임하는 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푸코는 자신의 행위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작동하고 있는 사법권력에 대한 환상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연예인이 대마초를 했다는 기사에 격분하는 사람들.

푸코가 관심을 가진 것은 자신이 겪고 ‘참을 수 없음’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푸코는 그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그들의 확성기가 되어주고 싶어 했죠. 79년에 푸코는 베트남의 보트피플을 구제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사르트르를 다시 만납니다. 사르트르는 역사를 추동하는 주체의 힘과 그러한 과정에서의 지식인의 의무를 이야기했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푸코는 ‘지식인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대신 “모든 권력 남용에 반대하여 분연히 일어나 의연하게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할 수 있는 국제 시민권”을 이야기합니다. 푸코는 권력에 의해서 보장받는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모든 권력에 대적할 국제 시민권을 주장한 것이죠. 푸코와 사르트르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서 다시 만났습니다.

푸코는 “임무의 분산”을 문제 삼는데, 이는 우리도 고민해볼 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푸코가 거부하는 것은 “개인들은 분노하고 말하며, 정부는 숙고하고 행동하는” 식의 임무의 분산입니다. 이러한 임무의 분산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좋은 통치자에 의한 지배와 나쁜 통치자의 지배의 사이를 오고갈 뿐인 것은 아닐까요? 푸코는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피지배자들의 성스러운 분노를 사랑하는 착한 정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그 분노가 서정적일 때만 그러하다는 것이 문제지만.”(<정부들에 대적하는 인권>, [리베라시옹], 1984) 이러한 지적은 로제 크노벨스피스에 대한 푸코의 지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한 정부나 좋은 통치를 요구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통치의 합리성 자체를 문제 삼는 것. 행위와 판단을 권력에 의탁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요.

1978년 테헤란에서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하여 4천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푸코는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사장의 청탁을 받아 기자신분으로 이란으로 향합니다. 푸코는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취재를 위해 이란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푸코는 투쟁 속에서 우글거리는 이념들을 직접 보기 위해서 이란으로 향했습니다.

“현대 세계는 어디선가 생겨나 활동하다가 사라져 버리고는 또는 어느 땐가 다시 나타나 사람과 사물을 뒤흔들어 놓는 이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이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념들은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이고 강하며 저항적이고 열정적이다. 이념이 생겨나는 곳, 그것들이 폭발하는 현장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것을 말하는 책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힘이 표출되는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그 이념들의 주변에서, 그것들에 찬성하며 또는 반대하며 펼쳐지는 투쟁들 속에서 그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사상의 르포르타주>, 1978)

푸코는 역사적 사료에 직접 접근함으로써 “역사의 암묵적인 가설”의 포로가 되지 않고자 노력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념들의 각축장을 직접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이란의 투쟁 속에서 생산되는 이념들을 직접 마주하고 푸코는 이란에서 근대화 혹은 서구화란 진보가 아니라 과거로의 회귀라는 사실을 발견 합니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란에서 근대화는 가장 보수적인 그룹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으며, 이란의 경우 “온 국민과 온 문화가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죠. 정부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는 푸코의 질문에 대해 ‘이슬람 정부’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땅과 자원을 두고 온갖 권력이 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이들은 ‘정치적 영성’을 추구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은 서구의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푸코는 여기서 ‘더 나은 국가’를 요구하거나 ‘자본을 나눠달라’고 외치지 않는, 전혀 다른 방식의 혁명을 발견합니다. 심지어는 “지구 전체의 체제에 대항하는 역사상 처음의 봉기”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란의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지도자로 추대된 호메이니는 정권을 잡자마자 반대자에 대한 숙청부터 시작한 것이죠. 사람들은 또다시 푸코를 비판합니다. 불합리한 광신에 현혹되었다며. 그러나 ‘성공’과 ‘실패’를 말하는 것은 전략가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그 자신의 이론적 도덕은 비전략적입니다.

“개인이 봉기할 때는 그것을 존중하고, 권력이 보편적 법칙을 위반할 때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간단한 선택이고 불안한 작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밑에서 역사를 단절시키고 뒤흔들어 놓는 어떤 것을 엿보아야 하고 동시에 정치의 뒤에서 무조건적으로 정치를 제한하는 어떤 것을 감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나의 일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첫 번째 사람도 아니고 유일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선택했을 뿐이다.”(<저항해 보았자 소용 없는 것인가>, 1979)

푸코는 지식인의 지위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이론적 도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앎의 의지」로 왔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되었던 것이지만, 「앎의 의지」는 억압가설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사건들에서 드러나는 푸코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을 참조하면 푸코에게 억압가설을 비판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압’이라는 관점을 통해 성을 바라보는 것은 “성을 불변의 상수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억압이라는 관념은 주어진 것으로서의 성을 전제로 하고 있죠. 이는 성에서 역사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다르게 말하면 “욕망과 욕망의 주체를 역사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앞서 언급한 정치적 문제들과 연관지어 말하자면 정부에 숙고할 권리를 넘겨주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과 그러한 ‘암묵적 생각들’에 의거한 “자기 자신의 확신에 완전히 편안함을” 느끼는 것. 이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권력에 사유를 위임하는 행위입니다. 푸코가 보기에 철학은 이에 저항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야 뒤늦게 꺼내게 되네요. 이 강의에서 푸코는 ‘계보학’에 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푸코의 논의에 따르면 계보학은 앎에 투쟁-전쟁 모델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어떤 앎이 앎으로 승인되는 과정에는 앎들 사이의 투쟁의 과정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 끝에 특정한 앎이 승리하여 진리로 출현하게 되면 그러한 진리의 자명함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투쟁의 과정은 은폐되는 것이죠. 계보학의 임무는 전투의 생생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계보학은 ‘반(反, counter)과학’입니다. 반과학이라는 말로 푸코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과학에 대한 거부도, 대안과학의 제시도 아닙니다. 계보학은 ‘과학적이라고 승인된 담론이 갖는 권력의 효과’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반과학입니다. 어떤 새로운 통합체를 형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앎들의 예속상태를 풀고 그것을 자유스럽게 만들기 위해” 인식의 과학적 서열화에 맞서 앎들을 봉기시키는 것.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푸코가 가장 근본적으로 사유하면서도 가장 실천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감동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푸코의 철학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텐데요, 푸코는 ‘철학’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철학하는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푸코가 어떤 문제의 답을 구하거나 높은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길을 계속해서 모색하고 계속해서 투쟁들 속에(=우글거리는 이념들 속에) 자신을 던지는 과정으로서의 철학(=지식의 훈련, 사고에서의 고행)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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