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주역과 노자 38장 ~ 44장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6-19 20:08
조회
269
노자의 어려움을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1장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정리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습니다. 혹시 수정할 내용이 있다면 댓글로 도와주세요. ㅎㅎ;;

 

38.

上德不德, 是以有德 ;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而亂之首 ; 前識者, 道之華而愚之始.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상덕(上德)을 지닌 사람은 덕()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덕()이 있고, 하덕(下德)을 가진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덕()이 없다. 상덕(上德)은 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작위함이 없고, (하덕(下德)은 작위하고자 하기 때문에 작위함이 있게 된다.) 상인(上仁)은 의도가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상의(上義)는 의도가 있으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상례(上禮)는 의도가 있으면서 응하는 것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강제한다.] 따라서 도()를 잃은 후에 덕()이 나타났고, ()을 잃은 후에 인()이 나타났고, ()을 잃은 후에 의()가 나타났고, ()가 사라진 후에 예()가 나타났다.

 

무릇 예()라는 것은 충()과 신()이 줄어들어서 생긴 것이고, 혼란의 시작이다. 따라서 대장부는 넉넉함을 지키지, [()과 신()이 줄어들지 않게 하고,] 근본을 지키지, 말단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 (), ()를 버리고 상덕(上德)을 취한다.

*편의상 문단을 나눴습니다. 우쌤이 따로 나누신 건 아니에요~

 

덕(德)은 각 개체가 도(道)를 얻음을 말합니다. 왕필은 덕을 얻는 방법으로 도(道)에 따라 살면 된다고 했습니다. 우쌤은 무위(無爲)로 살면 덕(德)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위(爲)는 의도, 작위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하덕위지이유이위(下德爲之而有以爲) 이 부분이 없는 텍스트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진고응.) 상덕(上德)에서 상인(上仁), 상의(上義), 상례(上禮)로 가는 게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합니다.

진고응은 상덕과 하덕 둘 다 무위를 추구하지만, 그 차이는 작위함이 드러나냐 드러나지 않는가에 따라 나뉜다고 했습니다.

우쌤은 상인(上仁), 상의(上義), 상례(上禮)를 중국의 왕조와 비교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상인(上仁)은 요순의 정치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들은 달력과 같은 제도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우쌤은 이를 사계절의 흐름에 따르는 정치라고 하셨습니다.

상의(上義)는 탕임금과 무왕의 정치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들은 각각 의로움을 내세워 이를 명분으로 왕조를 교체했습니다. 하지만 노자는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웠다는 것에서 작위함이 있다고 봤습니다.

상례(上禮)는 예로 다스리는 최고 수준의 정치로 공자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런데 예는 제도와 관습, 성문법, 불문법을 의미합니다. 즉,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기본적으로 백성의 삶에 간섭하는 정치입니다.

양(攘)은 팔뚝을 걷어붙이는 모양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태도를 말합니다. 잉(扔)은 ‘잡아끈다는 뜻’입니다.

왕필은 무위할 수 없어서 시도하는 것은 모두 하덕이라고 봤고, 하덕 안에 인의예절이 있다고 합니다.

왕필은 도가 각 개체에 들어간 것을 덕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더 이상 우주를 포괄하지 못하는 개체가 된 것임을 의미합니다.(未能周行) 주석을 보면, “하늘은 덮어주지만 실어주지 못하고, 땅은 실어주지만 덮어주지 못하며, 인간은 모든 것을 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쌤은 본문에서 도를 잃고 덕을 얻었다는 것은 이렇게 각 개체가 형성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덕이 깨지고 상인(上仁), 상의(上義), 상례(上禮)가 나타났다는 얘기 다음에는 예(禮)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제가 편의상 나눈 부분) 우쌤은 38장의 이 부분이 18장의 주석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충(忠)과 신(信)이 의미하는 것은 성실함, 소박함, 진실함입니다.

전식자(前識者)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현인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유가의 주제가 상현(尙賢)이라면, 노자의 주제는 불상현(不尙賢)입니다. 노자의 입장에서 보면 현인은 이미 덕을 잃은 사람으로 상인(上仁), 상의(上義), 상례(上禮)에 속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덕(德)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화(華)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이것은 꽃으로 보기보다는 도가 마모될 대로 마모돼서 나타난 찌꺼기입니다. 그것들은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데, 그 화려함에 홀리기 시작하면 어리석음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거피취차(去彼取此)에서 버려야 할 저것은 인의예(仁義禮)를 말하고, 취해야 할 이것은 덕(德)을 말합니다.

 

39.

昔之得一者 :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

天無以淸將恐裂, 地無以寧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將恐竭, 萬物無以生將恐滅, 侯王無以貴高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侯王自謂孤, , 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輿無輿. 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태초에 일()이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 하늘은 일()을 얻어 푸르게 되고, 땅은 일()을 얻어 안정되고, 정신은 일()을 얻어 신비하게 되고, 계곡은 일()을 얻어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만물은 일()을 얻어서 존재하게 되고, 제후와 왕은 일()을 얻어 천하를 바르게 한다. ()이 이런 세상을 가능케 한 것이다.

하늘이 푸름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장차 무너짐을 두려워해서이고, 땅이 안정됨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장차 무너짐을 두려워해서 이고, 정신이 신비함에 갇히지 않는 것은 장차 그 작동이 멈출까 두려워해서이고, 계곡이 가득 채우려하지 않는 것은 장차 고갈될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만물이 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장차 소멸될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제후와 왕이 자신을 귀하고 높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작용이 뒤집힐까 걱정해서이다.

그러므로 귀한 것은 천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이런 까닭에 제후와 왕은 스스로 외로움(), 모자람(), 능력 없음(不穀)이라고 한다. 이것이 천함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자주 명예를 추구하다보면 명예가 없게 된다. 옥처럼 잘 다듬어지고, 돌처럼 반들반들하기를 바라지 않는다.(옥처럼 반들반들하지 않고, 돌처럼 반들반들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쌤은 39장의 표제어로 석지득일자(昔之得一者)를 꼽으셨습니다. 석(昔)은 ‘태초’라는 뜻입니다. 일(一)은 도(道) 혹은 무위(無爲)를 뜻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만물이 일을 통해서 어떤 형체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하늘이 가진 형태인 청(淸)은 ‘푸름’을 뜻합니다. 땅이 가진 형태인 영(寧)은 ‘안정’, ‘평안’을 뜻합니다.

신(神)은 ‘정신 작용’을 뜻합니다. 영(靈)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영(盈)은 ‘차다’라는 뜻인데, 계곡이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진고응은 정(貞)을 바를 정(正)으로 풀어서 ‘정치를 바르게 한다’고 해석했는데, 우쌤은 정(貞)안에 이미 ‘형체를 바르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기치지(其致之)에서 기(其)가 가리키는 것은 일(一)입니다.

렬(裂), 발(發), 헐(歇), 갈(竭), 멸(滅), 궐(蹶)이 나오는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각각의 글자에 대해 설명하자면, 렬(裂)은 ‘무너지다’, 발(發)은 ‘무너지다’, ‘못 쓰게 되다’의 뜻인 폐(廢)와 통용됐고, 헐(歇)은 ‘쉬다’, 갈(竭)은 ‘고갈되다’, 멸(滅)은 ‘소멸되다’, 궐(蹶)은 ‘넘어지다’의 뜻으로 작용이 반대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진고응은 ‘A할 수 없으면 B하게 된다’로 풀었습니다. 반면에 왕필은 ‘A하는 것은 B하기 때문이다.’로 풀었습니다. (막상 정리하다보니 이게 맞나 싶네요.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분은 댓글로 도와주세요. ㅠㅠ)

주석에 거성즉실기모(居成則失其母)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모(母)는 도(道)입니다. 앞에서 “도를 잃은 후에 덕이 나타나다”라는 구절을 ‘거성즉실기모’로 표현한 것입니다. 거성(居成)은 어떤 개체의 고유성에 갇힌 것을 말합니다.

고(孤)와 과(寡), 불곡(不穀)은 제후와 왕이 자신을 낮춰서 부르는 말입니다. 과(寡)는 왕이 자신의 덕이 모자라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불곡(不穀)에서 곡(穀)은 선(善)과 통용돼서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다고 하는 말입니다.

차비이천위본야(此非以賤爲本邪)?에서 비(比)와 야(邪)는 생략하고 읽어도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

치삭예무예(致數輿無輿)에서 數는 ‘자주’라는 의미에서 “삭”, 輿는 ‘명예’ 예(譽)로 읽는다고 하셨습니다.

록록(琭琭)은 옥의 이미지를 형용사로 만든 것이고, 락락(珞珞)은 조약돌의 반들반들한 이미지를 형용사로 만든 것입니다.

불욕록록여옥, 락락여석(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이 구절은 불욕(不欲)이 어디까지 걸리느냐에 따라 2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왕필은 불욕을 끝까지 석(石)까지 걸어서 “록록(琭琭)하지 않고 락락(珞珞)하지 않는다”고 했고, 다른 해석은 “록록(琭琭)하지 않지만 락락(珞珞)하고자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39장을 ‘자신의 처지나 형태에 구속되지 않는 태도’로 정리해주셨습니다.

 

40.

反者, 道之動 ;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고, ()는 도()의 쓰임이다.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는 무()에서 생겨난다.

 

우쌤은 40장을 2장의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음성(音聲), 전후(前後)가 나오는 구절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反은 ‘반대’라는 의미에서 반(反)으로 볼 수 있고, ‘되돌아간다’라는 의미에서 반(返)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필은 주석에서 고하(高下), 귀천(貴賤), 유무(有無)를 말함으로써 상극의 측면에서 본 것 같지만, 또 “장차 유(有)를 온전히 하려면, 반드시 무(無)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운동의 개념으로도 본 것 같습니다. 우쌤은 反에 두 가지의 의미가 같이 들어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약(弱)의 뜻은 무(無)로 보면 되는데, 자세한 뜻은 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41.

上士聞道, 勤而行之 ; 中士聞道, 若存若亡 ; 下士聞道, 大笑之 ;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상덕(上德)을 지닌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을 신중히 행하고, 보통수준의 덕()을 지닌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고, 낮은 수준의 덕()을 지닌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으니, 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도()에 대해 말해보겠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듯 하고, 평평한 도는 군데군데 실매듭이 있는 것 같고, 상덕(上德)은 고집하는 게 없는 것 같고, 가장 하얀 것은 얼룩이 있는 듯하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굳건한 덕()은 짝이 있는 것 같고, 소박한 도의 본체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것 같다.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는 것 같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우주의 소리는 간간이 들리며, 위대한 상()은 형체가 없는 것 같으니, ()는 은미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알지 못하게] 무위(無爲)로 잘 베풀고, 잘 완성시켜준다.

 

우쌤은 이 장을 3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글자로 표현하면 첫 째는 반(反)으로 반대되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도(道)의 모습을 형용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大)=반(返)으로 규정할 수 없는 도(道)의 운동을 형용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선(善)으로 우쌤은 이것을 무위(無爲)로 풀어주셨는데, 도(道)가 만물을 완성시켜주는 작용을 형용한 것입니다.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는 지니고 있는 덕의 수준을 나눈 것입니다. 우쌤은 하사(下士)에 대해서 도(道)에 맡기면 천하가 개판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해주셨습니다.

근(勤)은 ‘삼가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망(亡)은 ‘없다’라는 의미에서 “무”로 읽습니다.

건언(建言)은 왕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쌤은 이와 반대된 의미로 유유대신(唯唯大臣)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유(唯)는 공손히 대답하는 것으로, 유유대신은 왕이 하는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신하를 가리킵니다.

41장에는 약(若)이 많이 나오는데, 전체적인 문장 구조는 ‘A는 마치 B인 듯하다’입니다. 우쌤은 40장의 반(反)과 연결해서 보면 재미있다고 하셨습니다.

이(夷)는 ‘평평하다’, ‘평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반대로 뢰(纇)는 중간중간 실매듭이 있는 모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상덕(上德)을 실(實)로도 보셨는데, 그러면 곡(谷)의 비어있는 모습(虛)과 더 분명하게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주석에서는 “자신의 덕을 덕으로 하지 않으니 품지 않는 바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이것을 ‘고집하는 게 없음’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욕(辱)은 ‘얼룩’(黷)이란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건(建)은 ‘굳건하다’라는 뜻에서 건(健)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고 하셨습니다. 투(偸)는 ‘물건을 훔치다’의 뜻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주위 환경에 자신을 맞추는 무위(無爲)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 ‘배필’, ‘짝이 있다’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질진(質眞)은 ‘소박한 도의 본체’라고 풀어주셨습니다. 주석에는 “자신의 진(眞)을 자랑하지 않는다.”라고 돼있습니다.

대방(大方)은 매우 큰 네모를 뜻하고, 우(隅)는 모퉁이입니다. 우쌤은 무우(無隅)를 ‘도를 확정할 수 없다’, ‘이름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상(大象)은 35장에도 나왔는데, 도(道)를 뜻합니다.

도은(道隱)과 무명(無名) 사이에는 말 이을 이(而)가 들어가야 더 해석이 말끔하다고 하셨습니다.

 

42.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 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에서 일()이 나오고, ()에서 이()가 나오고, ()에서 삼()이 나오고, ()에서 만물이 나온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으니, 활발한 기운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는 오직 외로움(), 모자람(), 능력 없음(不穀)인데, 왕과 제후는 그것을 칭호로 삼는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덜어냈는데 늘어나며, 어떤 경우에는 늘리는데 부족해진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는, 나 또한 가르친다. 과도하게 힘을 쓰는 것은 명대로 살지 못함이니, 나도 그런 것을 가르침의 원칙으로 삼겠다.

 

일(一)을 낳는 도(道)는 우주의 시원, 형이상학적인 도(道)입니다. 일(一)을 두고 여러 학자들이 다르게 보는데, 주자는 리(理)로, 장재는 기(氣)로, 왕필은 무(無)로 봤습니다.

일(一)은 운동성이 있다는 점에서 도(道)와 구별됩니다. 주석에서는 일(一)에서 이(二)가 생긴 것을 지칭할 수 있는 이름{(言) 혹은 (名)}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우쌤은 도(道)에서 만물을 나오는 이 과정이 곧 어떤 순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충기(沖氣)는 ‘활발한 기’입니다.

진고응은 인지소오(人之所惡)부터는 39장의 착간이라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뺐습니다.

고(孤), 과(寡), 불곡(不穀)은 39장에 쓰인 것과 같이 통치자의 덕목입니다.

량(梁)은 여러 뜻이 있는데, 우쌤은 일단 징검다리, 외나무다리, 멀쩡한 다리 등등의 다리 라인이라고 소개해주셨습니다. 그밖에도 량(梁)은 양상군자의 ‘양’이고, 고량주의 ‘량’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노략질 략(掠)과 통용돼서 갑자기 힘을 강하게 쓰는 모양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43.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閒,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은 천하의 지극히 견고한 것을 부리고, ()는 틈이 없는데도 들어감이 있으니, 나는 무위(無爲)가 유익하게 됨을 안다. 말을 앞세우지 않는 가르침과 무위(無爲)의 이로움을 천하에 미치는 자가 드물다.

 

강한 것을 움직이는 것이 약(弱)이라는 점에서 우쌤은 43장의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을 40장의 약자, 도지용(弱者, 道之用)과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치빙(馳騁)은 말을 부려서 움직이는 모양으로 ‘부리다’, ‘움직이다’의 뜻입니다.

閒은 ‘한가하다’로 읽을 때는 한(閑)으로 읽고, ‘사이’로 읽을 때는 간(間)으로 읽습니다. 우쌤은 여기서는 간(間)으로 읽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불언지교(不言之敎)는 5장에도 나오는데, 여기서의 교(敎)는 42장에서 가르침의 본보기(敎父)와 연결됩니다.

희(希)는 ‘드물다’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44.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명예와 몸 중에 무엇이 친한가? 몸과 재화 중에 무엇이 중요한가? [명예와 재화를] 얻는 것과 [몸을] 훼손시키는 것 중 무엇이 병인가? 그러므로 [내가 처한 상황을 모를 정도로] 지나치게 추구하면 반드시 크게 비용을 치르고, 재물을 많이 감추면 반드시 재물을 잃는다. 만족을 알면 욕되지 않고, 한계를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명대로 살 수 있다.

 

명(名)은 명예(譽)를 뜻합니다.

친(親)은 귀(貴)의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귀하다’ 혹은 ‘절실하다’입니다.

주석에서는 “명예를 숭상하고 높은 것을 좋아하면, 반드시 그 몸과는 소원해진다.”고 돼있습니다.

다(多)는 중(重)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득(得)은 명예와 재화를 얻는 것이고, 망(亡)은 몸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곧 죽음을 뜻합니다.

심애(甚愛)는

비(費)는 ‘비용을 치르다’인데, 여기서는 득(得)을 추구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다장(多藏)은 물건을 많이 쌓은 것입니다.

후(厚)는 ‘두텁다’보다는 ‘많이’의 의미입니다.

 

태초에 일이 있었다는 말은 도의 작용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머리에 그려내기가 쉽지 않네요. 1장과 2장을 생각하면서 보는 데 점점 머리가 꼬이는 것 같아요. ㅋㅋ;; 만약 노자의 철학을 정치 철학으로 본다면, 도에서부터 시작할 게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윤리에서 도를 그려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유무의 순환, 상생·상극 등등. 저는 갈 길이 멀었습니다.
전체 3

  • 2017-06-20 13:05
    歇 !!!
    잠깐 틈을 내서 읽으려고 열었다가 낚임..
    번역만 쭉 읽으면 넘 웃겨요 ㅋㅋㅋ 저만 그런가요 ^^;;;
    '天無以淸將恐裂~~' 부분에서 하늘이 늘 푸르기만 하면 장차 무너지니까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설명이 언뜻 떠오르는데요.. 땅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도요..그 설명 들었을 때 흥미로웠던 기억이에요.

    • 2017-06-20 19:49
      헐 ㅋㅋㅋㅋ 강의 때 들어도 뭔가 웃겼어요 ㅋㅋㅋㅋ 저만 그런가요. / 본문 해석은 최대한 우쌤의 설명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잘 안 되지만..... ㅎㅎ:;;

      • 2017-06-20 20:26
        퇴근길에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관련해서 삼각형이 떠올랐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태극 상태에 점을 하나 찍으면 도가 생겨나고, 똑같은 점을 하나 더 찍으면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마지막에 점을 하나 더 찍고 쭉쭉 이으면 하나의 세계인 삼각형이 창조되어요! ㅋㅋㅋㅋㅋ
        우리는 그 삼각형 속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히죽거리며 집에 왔네요. ^^; 유치하셨다면 죄송해용...저는 넘나 잼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