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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조지프 앤턴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7-06-20 14:32
조회
352
[길 위의 생] 조지프 앤턴

1. 살만 루슈디 자서전을 쓰다

이것은 너무나도 멋진 이야기야! 정말 쓰지 않을 수 없어! 난 이야기의 처음도 알고, 끝도 알지. 먼저 1990년대를 관통하는 서양과 무슬림 사이의 정치적 긴장관계가 들어갈 거야. 그러다가 무차별적 테러리즘이 불쑥 고개를 들고 튀어나오게 될 테지.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시대로 넘어가는풍경도 그려질 거야. 누가 나오느냐고? 철의 여인 대처와 민주당의 핫 아이콘 클린턴은 물론이거니와 내로라하는 세계의 작가들이 활약하게 되지. 수잔 손탁, 에드워드 사이드, 권터 그라스, 이언 메큐언, 가르시아 마르께스! 어디 작가 뿐이야? 그룹 U2의 리더 보노가 중간 중간 노래를 할 거야. 프랑스 여배우 잔 모로는 화려했던 누벨바그를 읊어 줄거고. 참, 헐리우드의 로빈 윌리암스도 잠깐 나와!

이렇게 뻑적지근한 외적 세계만 있는 건 아니야. 굵직한 대서사 속으로 내밀한 러브스토리가 엮여 들어갈 테니. 형식도 기가 막히지! 마치 탐정 소설처럼 스릴 넘칠 거거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적과 아군을 끊임없이 분리해 내야 하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을 막느라 날마다 전략을 짜야해. 그러면서도 연애를 해야 하고, 아이를 길러야 하며, 무엇보다 글을 써야 하는 일상을 놓치지 않아야 하지. 그런데 말야,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설계도를 그릴 필요는 없어. 인물들의 외모나 개성, 심지어 그 이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돼. 각 에피소드들의 의미라구? 그런 건 정말 따지지 말자. 모든 것이 멋지게 어우러질 거야. 어디서 이런 근사한 이야기를 찾았냐고? 하하! 사실 이건 내 이야기야!

살만 루슈디는 1947년 6월 17일 인도 뭄바이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영국으로 건너가 작가가 되었다. 2012년 9월 그는 깨알같이 써 두었던 일기와 노트, 자신과 관련된 각종 기사들을 참고해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한국어 번역은 800페이지가 넘는) 자서전을 완성했다. 겨우 50대 중반인데 자서전을? 그런데 자신의 전 생애를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대신 1989년부터 2000년까지의 약 십여년 만을 썼다. 왜?

1989년 루슈디는 이슬람의 수장인 호메이니로부터 ‘너는 악마다! 죽음을 선고하노라!’라는 전능한 명령 ‘파트와’를 받았다. 호메이니는 모든 이슬람인들에게 루슈디 살해의 기회를 주었고, 거기에 상금까지 걸었다. 왜냐하면 1988년 루슈디가 펴낸 『악마의 시』가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의 아내를 창녀에 비유했으며 코란의 일부를 ‘악마의 시’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불경한 것을 불태워라, 없애버려라! 파트와가 선고된 그날부터 이후 10년 동안 루슈디는 24시간 살해 위협에 노출되었고, 끝내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지위는 순식간에 영국 내에서 보호 순위 2급(여왕 다음으로 위험에 노출된 중요한 존재)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가 이슬람의 악마로만 변신했던 것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루슈디를 볼 수 있다는 말은 그 일대가 테러 가능 지역이 됨을 의미했으므로, 이제 그는 평화로운 런던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의 원인, 테러를 불러들이는 런던의 악마가 되었다.

루슈디는 그 누구의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 무엇보다 작가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루슈디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위협에 맞서 싸웠다. 십년 간의 투쟁. 1999년 호메이니의 죽음과 함께 이란에서 루슈디에 관한 파트와 철회가 발표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다시 그의 목에 현상금이 붙을 때도 있었지만, 마침내 루슈디는 자유를 찾았다. 지난 십년 루슈디는 무엇을 겪고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런데 이 자서전의 제목이 흥미롭다. 조지프 앤턴? 물론 루슈디는 조지프 앤턴이란 이름 뒤에 숨어서 그 십년을 버텼다. 하지만 그 가상의 이름을 왜 자서전의 제목으로 삼았던 걸까? 더욱 더 주목을 끄는 점은 자서전의 스타일이다. 이 책은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루슈디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종일관 ‘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루슈디가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으로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2. 조지프 앤턴, 출구를 열어줘

조지프 앤턴은 누구인가? 아무도 모르게 은거 주택을 구입하거나 물건을 매매하기 위해, 최소한 문서상으로나마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 가명을 하나 정해야 했을 때, 루슈디는 몇 개의 후보자들 중에서 '조지프 앤턴'을 골랐다. 조지프 콘라드(Joseph Conrad)와 안톤 체홉(Anton Chekhov)을 기념하면서였다. 살만 루슈디는 존경하는 문학가의 이름 속으로 우선 숨어 들어갔던 것이다.

루슈디는 『악마의 시』를 쓰기 전까지 언어의 무한한 힘을 믿었었다. 하지만 ‘썼으니 죽어라’고 하는 파트와는 언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루슈디는 가상의 세계를 썼다. 그런데 그 허구를 불신한 이들이 나타나 작가를 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악마의 시』라고 하는 허구는 현실 속을 걸어다니며 점점 더 사람들을 분열시켰다. 종교적 차이로, 인종적 차이로. 이 파트와와 함께 루슈디 그 자신도 찢기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다정하게 불러주던 ‘살만’은 휘발되어 버렸고, “살만에서 떨어져나간 루슈디는 헤드라인 속으로, 신문지 속으로, 그리고 공중파 영상 속으로 훨훨 날아가 표어가 되고, 시위 구호가 되고, 욕지거리가 되고, 아무튼 남들이 원하는 대로 온갖 무엇이 되었다.”(『조지프 앤턴』, 218쪽)

현실 속을 걸어 다니는 허구는 작가의 삶을 삼켜버렸다. 그런데 조지프 앤턴에게는 희안한 힘이 있었다. 루슈디가 언어로부터 받은 상처를 서서히 치유해준 것이다. 루슈디는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과 함께 살아 있는 허구가 되어 마트에 가고,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차를 빌려 교외 여행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조금씩 테러 밖의 일상을 회복했다. ‘조지프 앤턴’이 대지를 딛고 차가운 테러리즘의 공기를 마시는 동안, 루슈디는 ‘새로움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문학과 정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도대체 ‘이야기란 뭔가?’라는 화두를 안고 글을 써내려 갔다. 서평, 아들에게 들려 줄 동화, 수편의 단편소설 등. 물론 『무어의 마지막 한숨』과 같은 장편 소설에 다시 도전하기도 했다. 사생활과 공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보호감독(그의 은둔 저택 안에는 영국 최고의 정부요원이 총을 들고 그를 지키기 위해 24시간 보초를 섰다)의 십년 동안 조지프 앤턴이라는 허구는 한 조각의 자유를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카프카의 원숭이 빨간 피터가 사방으로 자신을 막아 선 철창을 벗어나기 위해 원숭이의 본성을 벗고 인간의 흉내를 내었던 것처럼(『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루슈디는 허구 때문에 현실의 감옥에 갇혔으나, 허구의 탈을 쓰고서 호메이니가 씌운 철창을 빠져나갔다.

3. 나는 그다

루슈디는 조지프 앤턴과 함께 언어의 힘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런데 조지프 앤턴으로 살았다고 해서 자서전을 3인칭으로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왜 3인칭이어야 했을까? 어쩌면 루슈디는 ‘나는 이것을 겪었다’, ‘내가 느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나’로 되돌아오는 지겨운 나르시즘이야말로 ‘너는 불태워 죽어 마땅하다!’고 선언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뿌리임을 깨닫지 않았을까? 서양과 동양은 이런 점에서 다르다, 우리 문화와 너희 문화는 이 지점에서 갈라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니까 너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모든 문화적 근본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상대주의는 그 문화의 원형을 규정해 놓고, 해석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한다. 호메이니는 감히 저 따위 짝퉁 무슬림이 가짜(소설)로 우리의 원형(진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던 것이다.

루슈디는 자신의 지난 10년이 정말 멋진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알았다. 일분 일초를 통과하던 온갖 희노애락은 그 자체로 훌륭한 소재였다. 하지만 루슈디는 자서전을 일기나 고백으로, 고집스런 한탄이나 자존심을 건 복수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겪은 모든 일은 모두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자서전에서 적과 친구를 비롯해서 전부인, 현재 애인, 이런저런 배신자와 조력자 모두를 실명으로 등장시켰다. 딱 한 사람 조지프 앤톤만 빼고! 우리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분기하는 중인 걸! 그들의 이름도 그들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과 친구는 모두 살만 루슈디의 운명을 나누어 살았다. 루슈디가 3인칭 시점을 취함으로써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것은 그의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가져야 옳은가? 우리 모두는 이야기와 더불어 살고 이야기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려줄 권리는,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방식을 결정할 권리는 과연 누구의 것이며 마땅히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누구나 이야기와 함께, 이른바 거대서사 속에서 살아간다. 국가도 하나의 이야기, 가족도 하나의 이야기, 종교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예술가인 그는 이 질문의 유일한 답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 권리는 만인의 것이며 마땅히 만인의 것이어야 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거대서사를 비판하고 논쟁하고 풍자할 수 있어야 한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거대서사도 변화하기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거대서사에 대해 말하는 방식도 자유로워야 한다. 경건하든 불경스럽든, 열광적이든 냉소적이든. 그것은 열린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권리다.(『조지프 앤턴』, 469쪽)

조지프 앤턴은 죽었다. 살만 루슈디는 작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루슈디는 유쾌하지 않았다. 9.11일 이후 전세계는 테러 시대에 돌입했고 작가 한 사람에게 향하던 혐오는 평범한 동네 교회와 사원으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팝음악 공연장이나 도시의 사거리 위로, 더 낮고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루슈디를 죽음으로 내몰던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기는 “모든 무슬림을 처단하라!”는 역테러를 불러왔다.

문제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루슈디는 허구의 세계에서 답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문학과 정치를 둘러싼 논쟁은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광범위한 인터넷망 속에서 무엇이라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곧장 가상 현실로 넘어갈 수 있는 마당에 허구니 현실이니 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것 자체가 유치해졌다. 곤란한 비유지만, 호메이니만큼 허구의 중요성을 간파하는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루슈디는 『조지프 앤턴』의 마지막에 허구의 존재론을 쓴다. 물론 그는 작가 개인의 재능이 만든 결과물로서의 문학을 찬미하지는 않는다. 대신 루슈디는 인류가 원래부터 허구를 통해 세계의 변경을 넓히려고 했음을 상기한다. 스스로를 압박하지 마라. 그저 한 사람의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이스라엘인, 무슬림으로만 살고 싶은가? 남자로만 여자로만, 아버지로만 아들로만 머물지 말고 가라, 다른 곳으로 가라! 루슈디는 작가의 임무란 ‘우주를 조금 더 열어 보이는’ 데에 있다고 하면서, 진정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책을 닫는다.

그것이 그의 참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려 주는 사람, 온갖 형상을 만들어내는 사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이제 비평과 논쟁의 세계를 떠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에 다시 전념하는 것이 현명할 터였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사로잡았던 예술의 세계, ‘긴가민가’의 세계,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러쿵저러쿵’의 세계로 돌아가 상상의 바다에서 진실을 찾는 여행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조지프 앤턴』, 814쪽)

 
전체 4

  • 2017-06-20 16:30
    오홋 재밌네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홀려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조지프 앤턴도 읽고 싶어지네요.분량의 압박이.

  • 2017-06-20 19:29
    우후!
    책은 또 어찌나 순식간에 읽히는지요! 아마 깜짝 놀라게 되실 꺼예요. 진짜 재미있습니다. <조지프 앤턴> ! ^^

  • 2017-06-21 14:55
    규문 송년회 때 채운 샘께서 책 선물 하실 때 오로지 값나가 보인다는 이유로 이 책을 골랐다가 , 분량 땜에 선뜻 달겨들지 못했었는데, 한번 읽어 들어가니 마치 폭퐁 속으로 들어간 듯 정신없는 며칠을 보낸 듯합니다. 선민 샘 글도 이책의 호흡을 닮은 듯 휙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네요. 글고, 샘께서 언젠가 소개해 주신, 호시노 미치오의 글도 읽고 푹 빠진 기억이 있네요. 좋은 글 늘 감사드립니다~~^^.

    • 2017-06-21 19:55
      선생님도 조지프 앤턴을 만나셨군요! 진짜 멋있죠. 선생님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구절은 어디일까요?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