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7월11일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7-07-14 08:27
조회
369
7.11 절탁M 3학기 첫 시간 후기

3학기를 맞아 M팀에 경사가 있었어요. 예쁘고 푸릇푸릇한 20대 두 분이 함께 공부하기로 했지요.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요. 남은 3,4학기 즐겁게 공부해 봐요. 환영합니다.

이번학기, 벌써 근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중세 말부터 태동하던 자본주의가 이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4권의 문학 텍스트 중 처음 읽은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근대 문학사의 초기에 위치한 작가입니다. 근대 소설은 중세까지의 소설들이, 구전을 모아 작가가 배치하고 해석하던 것과 달리, 작가의 순수 제작품이라고 합니다. 한 작가가 쓸 수 있는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조합하여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언어의 기능이 변화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의 언어는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라틴어와 한자가 그렇지요. 그러던 것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입말인 속어로 쓰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지난학기 읽었던 단테나 초서의 글이 그렇지요. 19세기로 넘어 오면 이제 언어는 투명해집니다. 언어 자체가 가지는 가치값이 없어진다는 뜻이지요. 말하고 씌여진 그대로가 의미가 되는 것이죠. 언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의 역할만을 하는 도구가 됩니다. 때문에 19세기는 리얼리즘- 사실주의 소설이 유행하게 되고 발자크나 에밀 졸라등의 작가들이 쓴 글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와 달리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어는 시공간적 굴절을 겪으면서 잉여가 계속 덧붙여지기 때문에 투명할 수 없다고 보았죠. 해서 기승전결을 가지고 삶을 단선적 논리로 해석하고자 했던 발자크나 에밀졸라와 달리 사회 속에서 공존하는 다양한 모순들이 어떻게 사람의 심리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인간에 집중해 열린 이야기를 펼칩니다. 바흐찐은 ‘시대의 대화를 청취하고’ 현실자체에서 그가 발견한, ‘삶으로 파고드는 마치 동력을 가진 듯한 생동적 형상의 사상’들을 담아냈다고 평하고 있네요.

<가난한 사람들>은 제부쉬낀과 바르바라가 주고받는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편지 형식의 글도 19세기 처음 등장한 작법이라고 합니다. 편지로 된 글은 독자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치 주인공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언어가 매개역할을 잘 한 것이죠. 익명의 다수가 대규모로 움직이던 시대에는 통일된 언어가 필요했고, 그것을 편지형식으로 전달함으로써 더욱 공감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읽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관청에서 서기로 일하는 제부쉬낀은 문학 작품을 읽고, 바르바라의 편지를 읽습니다. 바르바라도 문학 작품과 편지를 읽지요. 바르바라의 첫사랑, 대학에 다녔던 뽀끄로프스키도 장서를 읽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의 읽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의 읽기를 가르는 것은 고골의 작품 <외투>를 보는 관점입니다. 바르바라가 좋은 작품이라고 권하는 이 책에 대해 제부쉬낀은 화를 냅니다. ‘누가 궁핍하게 사는 것을 왜 써 대서 비웃음을 사게 만드는 거냐’고. 제부쉬낀은 이것을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바르바라는 <외투>속 가난에서 자신을 본 것이죠. 그녀에게 돈은 신분 상승의 도구이고, 인정받기 위한 도구가 되기 때문에 결국 사랑하는 제부쉬낀을 두고 돈 많은 시골지주 비꼬프씨와 결혼하게 됩니다. 뽀끄로프스키는 장서를 읽는 사람으로 규범과 형식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바르바라가 그에게 선물하는 것은 푸쉬킨 전집이지요. 자신의 삶과 공간에서 어느 하나도 흐트러지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국 이른 나이에 죽습니다. 세 사람의 다른 읽기의 양상이 다른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중 읽기를 넘어 자기 문체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자존이 중요했고 자기 언어를 말하고자 했던 제부쉬낀 뿐입니다.

이쯤 되니까 제부쉬낀이 어떤 존재인지 무척 궁금해지지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물질적으로 가난합니다. 제 고향을 떠나 도시의 궁핍한 환경에 내던져진 사람들이죠. 제부쉬낀은 이들에게 ‘주는 자’입니다. 처음엔 바르바라를 위해 가불까지 해가며 선물을 하고(옷, 사탕, 꽃.등)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숙집 사람, 심지어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에 까지 확장됩니다. 세미나에선 이 장면을 이구동성 분수를 모르는 일이라고 타박했지요. 근데 선민샘은 ‘주는 자’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셨죠. 아무런 댓가 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털어줄 수 있는 사람, 할 수 없는 것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 ‘최소한’ 이라는 것을 상정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인가?

그럼 가난은 무엇일까요? 제부쉬낀은 관청에서 30년째 정서하는 일을 하지만 늘 당당합니다. 정당한 노동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선물로 나가는 돈이 버는 것 보다 많아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갑니다. 당연히 못 빌립니다. 담보도 없고 아예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빌려주지 않습니다. 업자들의 가치는 돈에만 있습니다. 돈 빼고 다른 가치는 모두 거세한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서류 정리를 하다가 실수를 해 관청의 각하에게 호출 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각하를 만났을 때 마침 다 낡아 빠진 옷에서 단추가 떨어지게 되지요, 각하는 함께 들어갔던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제부쉬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다고 하며 100루불을 주고 악수를 청합니다. 바르바라에게 보내는 편지에 ‘제게 귀중한 것은 백루불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친히.... 이 천한 손을 잡아주신 것이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저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라며 온 영혼이 전율을 느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책에서 보면 처음으로 ‘악수’ 라는 신체접촉이 있는 장면이고 직접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고리대금업자들과 달리 각하는 아무 댓가 없이 백루불이라는 돈을 전달하고 ‘당신과 비슷한 서열의 장군을 대하’듯 그를 대해,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수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지요. 제부쉬낀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은 ‘자존’이고 인간으로서 수치를 아는 것이지요. 문학이라는 추상적 지식을 찾고, 오페라를 볼만큼 예술적 욕구도 가진,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지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수치를 모르는 일입니다. 단추가 떨어진 수치에 함께 공감 할 줄 아는 각하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존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측면에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본적으로 너무 다른 바르바라와는,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작품 안에서 한 번도 직접 만나는 장면이 없고, 직접 나누는 대화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샘은 결혼이라는 것, 가족을 만든다는 것에 대하여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결혼은 특히 핵가족의 구성은 부르조아 계급의 탄생과 궤를 같이합니다. 이들이 결혼이라는 구조에 메이지 않는 것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는 것 같고, 또한 바르바라가 결혼으로 떠난 하숙집으로 제부쉬낀이 이사를 옵니다. 하숙집 주인은 두 사람 모두와 먼 친척의 관계이죠. 그랬을 때 다른 형태의 가족, 다른 형태의 사랑을 그려 볼 여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 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문학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 샘의 주문이 있었습니다. 한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다른 장면과 비교하며 스토리 이면에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또 하나 자신의 질문을 작가에게 던지라는 것이지요. 텍스트를 읽고 5가지 질문을 만들어 오는데 그 질문의 답은 작가를 통해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샘의 열정적인 강의에 첫 수업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입력해 새로 온 친구들이 많이 버거웠을 거예요. 집 가면서 오뎅 국물의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었네요.

3학기 역사 텍스트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입니다. 이번 시간엔 옮긴이의 해제를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1944년 씌여진 이 책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는 그 분석이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겠지요. 이 책이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폴라니는 현실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적 과정을 통해 풀어내고 있습니다. 때문에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세계 금융자본의 붕괴를 경험한 적이 있는 현대 시장에도 의미 있는 주제를 주고 있습니다. 폴라니는 인류사적 문제를 자기 문제화하여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자본주의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안에서 복잡한 변수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순간 다른 방식의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즉 생성 조건을 바꾸어 보는 등의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이지요. 역사가 던지는 가장 큰 의미는 지금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심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시장에 대한 환상 있습니다. 애덤스미스로부터 시작된 19세기 자유 방임형 시장경제는 시장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에, 국가의 최소개입을 통해 시장 조정 능력을 극대화해주어야 한다는 환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초 대공황과 파시즘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특히 상품의 생산 소비의 균형이 깨지는 공항을 통해 시장의 환상은 깨어지게 됩니다.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을 통해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시장경제 유토피아로 여겨지는 ‘자기조정 시장’이 도달 할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것을 말합니다. 환상을 깨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성인 것도 진화의 산물도 아닌 어떤 조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틈을 찾아내자고 말합니다.

‘자기조정 시장’은 시장은 내버려두면 알아서 수요 공급을 조절하여 자율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자기조정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이 때 조정의 주체는 어디인가? 이 질문 안에서 경제가 사법과 정치와 만나게 됩니다. 시장 경제는 복잡한 지형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정치, 문화, 사회내의 제 문제들과 만나 형성됩니다. 그래서 경제를 바꾼다고 하는 것은 경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를 보는 것은 사회를 보는 것이어야 하는 거죠, 경제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문제라는 의미에서 ‘시장경제’라는 용어 대신 ‘시장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폴라니는 모든 가치를 경제로 환원하는 맑스주의와도,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와도 다릅니다. 또한 국가주도의 사회개혁이나 계획경제도 인간의 자유와 의지로 결정되는 ‘사회적’ 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폴라니는 경제를 조망하면서 어떻게 개인의 내면을 조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개인적 집단적 차원에서 자신의 내면에 담고 있는 가치와 욕망을 살피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지요. 이런 고민이 그의 독특한 기능적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는데, 이는 국가 중심적 경제를 거부하는 조합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입니다. 생활 협동조합이나 소비자 협동조합, 소규모 공동체의 자율 경제 시스템에 대한 고민등을 현실 안에서 제시합니다. 그런 만큼 그는 보통 경제가 가정이나 예측을 통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반해 현실 경제는 현실에서 보아야한다는 실체경제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진입한 현재의 키워드는 ‘경쟁’입니다. 경쟁 시스템 바깥은 아예 배제되고, 경쟁시스템 안으로 들어온 이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철저히 자기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인간이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기 때문에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할 수밖에 없고 투자하는 모든 것이 또 자본화 되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상품이자 자본이 되는 것이죠.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자유와는 상관없는 개인의 삶을 개인에게 맡겨버리는 문제이자, 투자와 자본과 자유로 자본주의를 잘 포장해 놓은 것에 불과하죠.

이때에 국가는 자본이 돌아가는 디테일한 제도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맑시스트들은 자본의 힘이 강화되면 자본이 세계를 질서화 하여 국가의 역할이 약화 될 것이라고 보았지요. 그러나  반대지요. 현재의 국가들은 자본이 돌아가는데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거나 원활히 돌아가도록 제도 만들거나 하기 때문에 국가가 할 일이 훨씬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파악하는데 있어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구조와 자본의 이윤만으로 읽어낼 수 없는 아주 많은 변수들이 있는 것이고 이것을 조정하고 촘촘히 구조화하기 위해  국가들의 긴밀한 네트워크는 더 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흔히 합니다. 이 생각은 아주 세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경제만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폴라니는 맑시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즉,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경제문제를 보려고 하여죠. 허나 ‘모든 것이 관계의 산물’이라고 파악하는 맑스의 근본질문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인간을 둘러싼 관계가 변화한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가 달라짐을 의미하죠. 그래서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나의 신체를 바꿔 놓는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는 왜 다른 삶을 살기 어려운가? 자본이 미세하게 펼쳐 놓은 그물에 걸리는 내 욕망은 무엇인지? 어떤 조건이 나의 욕망을 구조화하고 있는지? 옮긴이는 해제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유토피아라고 밝혀진 19세기 자유주의가 더 깊고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로  20세기 말에 나타나 세계를 뒤덮을 줄 몰랐을 것이라고. 그러나 세상만물을 모두 상품으로 바꾸는 신자유주의도 한계에 봉착했다는 불안이 만연해 있다고. 금본위제의 붕괴가 불러온 자유주의의 거대한 전환의 급류가 다시 몰려올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의 욕망을 자본에 맡기지 않을 날선 감각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 나를 보존하는 일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시간 역사는 칼 폴라니 1부 다시 읽어옵니다. 아주 꼼꼼이. 샘의 기습 질문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문학은 <가난한 사람들> 심화 글쓰기 해옵니다.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의 주제를 정하고 그 문장에 적합한 한 장면을 찾고 자신의 해석을 붙여 A4 한 장 정도로 작성해 오시면 됩니다. 9;40분까지. 간식은 윤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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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4 10:23
    오오 반장만이 아니라 모두가 9시 40분까지 입성인가요? 놀랍네요 ^^ 모두 열공즐공하세요. 가난한 사람들 심화 글쓰기 좋으네요 ^___^

  • 2017-07-14 17:03
    우리 반장님! 멋진 후기 스타트이신가요? 후기를 다시 읽으니, 제부쉬낀의 말, 글 모든 것이 다시 떠오릅니다. 가난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왜 "읽지 않으면 안되는가?"
    다음 시간에도 청년 도스토예프스키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