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7.24 수업후기

작성자
계숙
작성일
2017-07-25 16:29
조회
2593
어제의 수업에서, 이번 시즌을 마무리하는 우리 각자의 에세이 계획이 너무나도 관념적이라는 선생님의 사자후(!)가 있었다. 관념적이라는 지적이 있긴 했지만, 나는 그래도 글을 어떻게 쓰겠다는 개요를 작성해온 분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렇게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종이 한 장을 채워오지 못했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글의 개요작성에 대해 주문했는데, 혼자서 못알아 들었다는 것이 창피했다. 안일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앞으로 2~3주 동안 글을 쓸 테니까 하면서, 차차 생각해보자고 미루고 있었다. 이제야 에세이에 대한 압박감이 현실적이 되고 있다. 무엇을 써야 하나, 어떻게 써야하나 하면서 말이다.

선생님은 에세이를 통해 우리가 ‘만나야’ 한다고 하셨다. 그럴듯하게 개념들을 나열하고 지식으로 정리해서는 시간을 때울수는 있지만,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런 식의 공부나 글쓰기는 끊임없이 견해를 만들어내는, 1경에서 그렇게도 경계했던 또 하나의 견해의 그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비근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책을 읽으면서 밀려왔던 수많은 의문들에 열심히 매달리고 매달려 자신의 고민을 책을 통해 돌파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솔하게 자기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며, 이렇게 겪어가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신체성의 문제라고 하셨다. 내가 겪은 만큼, 그것만큼 글이 돌파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자기 고민을 가지고 돌파하겠다는 각오가 현재의 자신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들을 잘 해 보겠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가 문제라고 그 관계를 좋게 만들 어떤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이전의 자신의 견해로부터 조금도 자유로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팔정도의 시작이 정견(올바른 견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이다.

팔정도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과 같이 올바른 00으로 표현되는데, 도대체 불교에서 ‘올바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불교경전 디가니까야에는 32경의 <아따니띠야의 경>과 같이 재가신자를 위한 주문도 있고, 31경의 <쌍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과 같이 재가신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하는 경도 존재한다. 모든 중생이 사성제, 팔정도로 나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삶에 문제의식이 있고, 존재론적 변환이 필요할 때 지혜와 통찰이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한다면, 공부를 어떤 태도로 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론적 가르침, 규정적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신의 경험(주관성)이 이 세계로부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객관성)을 계속 돌아보고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깨달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견은 기존의 자기 견해를 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사유는 집착과 연관되는데, 견해를 깨고 정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기존에 생각했던 ‘생각을 한다’는 자기 언어로 집을 짓는게 아니었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타자인 셈이다. 정어는 언어습관에 대한 것인데, 말이 우리의 존재와 사유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정업은 신체적인 것(身)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意), 언어적인 것(口) 모두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팔정도 각각을 가지고도 얘기할 것이 많다. 도대체 올바르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 말이다. 어떻게 보면 와장창 깨지지 않으면 그 글은 다 가짜이다. 찔리고 불편한 것, 그것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 도대체 붓다가 경계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개념을 뚫고 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진솔하게 꺼낸 문제를 들여다보고 자기 생각을 깨는 것, 그런 점에서 에세이의 특별한 형식은 없다. 원시경전은 후에 개념화를 통해 중론, 유식론, 지관수행 등 각각의 론으로 발전하는데, 개념화 이전의 붓다설법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원시경전을 읽는 묘미가 있다. 자기한테 남는 게 있도록 경전을 읽고,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것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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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5 19:25
    어제 쌤의 사자후가 고대로 오늘 또 들리네요 흑 ㅜ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일인이 오늘도 번뇌속에서 헤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