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7.25 절차탁마 M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7-27 01:23
조회
272
170725 절차탁마 M 후기

1. 보바리 부인

이번 시간에는 <보바리 부인>을 읽고 여러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돈과 사랑: <보바리 보인>에 나온 돈은 그냥 화폐가 아닙니다. 바로 어음입니다. 뢰르는 엠마에게 물건을 먼저 쥐어주고 그 후에 엄청난 액숙의 청구서를 보냅니다. 샤를르는 뢰르에게 어음을 써서 돈을 마련합니다. 지금 당장 중에 있는 돈이 아니라 미래에 수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끌어다 쓴 돈, 그래서 지금 내 돈이 아닌 허상을 이 소설의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있는 것인 양 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온 돈이라는 것은 엠마가 그렇게 목을 매던 사랑과 닮았습니다. 일단 둘 다 없는 실체를 상정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몰두합니다. 그리고 뢰르씨가 미리 쥐어주는 상품들, 그리고 연애에 딸려오는 선물이나 편지 등 그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리표상들이 존재하고 또 당사자들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또 엠마 스스로가 화폐 혹은 변덕스러운 사랑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엠마는 정염에 휩싸여 사랑을 하다가 죽기를 소망하고 또 자신에게 갚을 빚이 있고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소위 ‘돌려막기’를 하게 되죠. 자신을 던져서요. 즉 자기 스스로 상품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바로 엠마가 사랑이 주는 죽음에서는 회복했지만 돈이 주는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천방지축’인 엠마는 돈의 흐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돈의 흐름이란 그녀의 정념이 어떻든 상관없이 늘 정량이 약속대로, 계산한 대로 돌아다니는 것이니까요. A만큼을 구매하기 위한다면 반드시 A만큼의 돈이 있어야 하는 세계를 플로베르는 냉정하게 그려냅니다. 그는 돈에 얽힌 인간의 심리묘사보다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결정하는 돈의 세계를 마치 살을 째서 그 안을 들여다보듯 해부하는 시선으로 쓴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 <보바리 부인>에서 해선 안 될 짓을 한 사람,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의외로 의견이 다양했습니다. 윤순쌤과 보영쌤은 돈놀이를 해서 보바리 부부의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뢰르가 나쁘다고 했고 저는 모두 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같지만 로돌프와 엠마는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며 룰을 어겼으므로 나쁘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선민쌤께선 마지막 오메가 맹인 거지를 거리에서 치우기 위해 말을 만들고 있던 일을 덮는 등의 기사를 썼기 때문에, 그리고 훈장을 받기도 전에 자신이 훈장을 받은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룰을 위반했을 뿐더러 이 소설에 나타난 파멸의 지름길(?) 명예의 ‘선결제’를 자행한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각자 의견은 다르지만 모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드러내지 않았거나 왜곡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타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점에서 공통된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의 존재: 보바리 부부는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부부생활에 아이가 생겼는데 도무지 이 아이가 이야기의 전면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늘 집과 떨어진 유모와 생활하고 있거나 아니면 가끔 샤를르의 미래 계획 속에나 등장하지요. 엠마가 죽고 난 다음에도 샤를르의 시야에 아이는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바리 부부의 시야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 자신의 만족으로 꽉 차 있거든요. 아이가 들어설 겨를이 없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곧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니까요.
반면 오메의 집에는 자식들도 대두되고 친척 아이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세미나에서 나온 표현에 의하면 ‘설계자’입니다. 즉 인간관계에서 전체를 보는 자입니다. 어느 집에 무엇이 있고 그걸 자신이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꿰뚫고 있는 오메는 평소엔 아주 친절한 이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목표가 아주 확실하게 설정되어 있고 거기로 이행하는 데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죠. 좋게 말하면 준비성이 철저한 인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물입니다. 그런 오메의 기질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보바리 부부의 상태와 대비됩니다.

읽는 자(앎과 무지): 보바리 부인은 책을 읽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보바리 씨도 평소에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의학 잡지를 구독해서 읽습니다. 학생 레옹도 책을 읽는 사람이고 훌륭한 서재를 가진 오메는 종교보다는 철학에 더 심취해 있으며 나중에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엠마는 읽기를 통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엠마에게 읽기 자체는 하나의 체험입니다. 엠마가 읽을 때 파리, 상류사회, 신사, 로맨스 등등 그녀에게 현재 없는 것이 마치 있는 것처럼 펼쳐집니다. 그녀는 그 체험에 푹 빠져들지요. 하지만 그 체험은 욕망의 허구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엠마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결국 전혀 누리지 못했으니까요. 누렸더라도 결국 그녀의 것이 아닌 화려한 세계의 문물은 막대한 액수가 적힌 청구서로 돌아옵니다.

합리성: 오메는 자신의 신이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적으로 이해하는 그는 정념에 휩싸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나락으로 떨어지는 엠마와 상반됩니다. 눈 먼 거지를 만났을 때 엠마는 질색하지만 오메는 그를 어떻게 해야 고쳐줄 수 있는지 계산하는 것도 한 가지 예입니다. 하지만 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사실상 위선이었다는 것이 작품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오메는 자신이 결국 자신이 고치지 못한 장님 거지를 길거리에서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니까요.

죽음: 엠마의 선택은 매우 극단적입니다. 비소를 털어 넣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다가오기 전, 그녀는 죽음에 대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잠들고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비소를 털어 넣고요! 엠마의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결국 그녀의 삶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엠마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때 이 순간을 영원히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에 죽고 싶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이런 권태로운 삶을 살 바에는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얘기를 하고요. 실제로 그녀는 생활을 팽개치고 어음을 써서 화려한 환상에 젖어들거나 애인과의 밀회에 빠져들죠. 즉 그녀는 권태의 증감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차라리 극단을 선택한 그녀에게 곧 죽음의 고통이 다가옵니다. 이런 과정마저도 꼭 엠마의 삶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온한 죽음이라는 환상을 갖기가 무섭게 실질적인 죽음이 다가오니까요. 이런 전개는 자신의 욕망의 조건에 대해 무지했던 그녀에게 작가가 내리는 단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운명: 샤를르의 인생은 처음에는 논리정연하게 소개됩니다. 어리숙해서 비웃음 당했고 여자에게 빠져서 의과시험에 낙방했고 마음을 고쳐먹어서 의과시험에 붙었죠. 그러다가 엠마라는 주인공이 부각되면서 샤를르는 이야기의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그런데 샤를르의 태도를 계속 비춰보면 그의 인생은 자기가 충분히 앞뒤 맥락을 맞춰가며 제어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엠마의 입장에서 전개된 이야기 안에서 그는 아내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는 '호구' 남편이었죠. 엠마가 죽고 진상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을 이런 파산상태로 이끈 것이 오롯한 자신이 아니라 엠마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불륜 상대에게 '운명'이라는 말을 남긴 것이죠.
그럼 엠마의 운명은 어떨까요? 그녀는 조건에 대한 무지와 불만족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허구와 상상에 내맡겼죠. 그런데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고 삶의 권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화려함을 추구하고, 그런데도 권태롭고...이런 패턴을 그려가며 그녀는 자신도 알지 못한 새 그 인과를 짊어지게 됩니다. 알고 있었지만 영원히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운명의 몫, 바로 거액의 청구서들입니다. 엠마는 그 환상에 자신을 내맡겼고,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화폐로 만들어 돌리죠. 하지만 이 돈의 흐름은 엠마가 원한다고 해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욕망: <보바리 부인>은 파리가 아닌 시골이 배경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용빌'이라는 지방도시가 배경이죠. 왜 파리가 아니라 용빌이었을까? 첫째로 그래야 이야기가 이렇게 단계를 밟아 진행되어 완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옹에 따르면 이런 욕망의 충동을 따르는 사람들은 파리에 널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바리 부인 같은 사람이 파리에 있었다면 '순삭'? ^^;; 순식간에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을까요? 둘째로 파리라는 곳의 욕망을 대리체험하는 동시에 욕망의 공상성과 허구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용빌에 있기에 엠마는 파리라는 곳을 욕망하고, 파리라는 환상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그것을 추구합니다. '보바리즘', 즉 자신이 듣거나 읽은 것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두드러지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파리보다는 용빌이 제격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허구적인 욕망에 목매는 것은 지금도 낯선 풍경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당연시 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카드로 선결제를 하고 실체가 없는, 그저 숫자가 오가는 청구서 사이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거기다 미디어나 광고는 마치 우리가 그것을 정말 욕망하는 것처럼 만들기도 하고요. 심지어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데도 거기에는 엄청난 금액의 거래가 오가기도 합니다. (배너 광고나 조회수 같은 것이 우리의 시선 한번, 클릭 한번으로 이익을 창출하지요.) 우리는 <보바리 부인>에서 ‘보바리즘’을 보지만 사실 우리가 그런 (어쩌면 더 심한) 상태인 것은 아닐까요?

2.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2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사탄의 맷돌’입니다. 경제개발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하나로 뭉개버리는 ‘사탄의 맷돌’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폴라니는 세 가지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1. 어떻게 하면 이 맷돌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것인가? 2.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경제적 상식은 과연 자명한 것인가? 3. 인간은 어떻게 팔 수 없는 것까지 팔게 되었는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이번 시간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류학: 20세기는 사르트르의 시대였습니다. 지식인들은 곧 특권계층이었고 그들의 어깨에는 역사의 올바른 방향이라는 무거운 짐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그 책임은 지식인에게 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는 대학생이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의 7,8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대학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늘 데모하고 축제날 더 특별하게 데모하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에 대한 책임감을 지식인이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지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부담스러운 일이긴 했습니다. ‘올바르면서도 짐스러운 사르트르’, 이것이 들뢰즈나 푸코를 비롯한 당시 대학생이 느끼는 사르트르였다고 하네요. 이때 사르트르라는 짐에서 해방되는 출로는 철학이 아닌 사회학 쪽에서 납니다.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입니다. 인류학은 철학이 아닌 사회학입니다. 사회조사를 하고 통계를 내고 그것의 데이터를 추려서 결론을 내는 학문이죠. 그런데 이런 인류학에서 직접 문명이 아닌 곳에 가서 데이터를 내 봤더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통하지 않더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역사의 진보도 없고 경제적 이익에 대한 상식도 전혀 달랐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틈을 내는 학문이 바로 인류학이었던 것입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자명성을 깨기 위해 폴라니도 인류학의 도움을 받습니다. 인류학에서 관찰한 사회는 축적이 곧 욕을 부르는 곳입니다. 쿨라 무역은 곧 주고 또 줘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무역이고 포틀래치는 서로 축적하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섬을 돌며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눠주려는 교역입니다. 지금 우리는 축적을 많이 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더란 말이죠. 인류학은 인간이 이익을 추구한다는 전제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동해서 많은 것을 생산하고 팔려고 한다는 상식도 뒤엎고요.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제활동이 사실은 지구상에서 일부만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의 생각은 결국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이익추구+교환관계: 폴라니는 계속 강조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장경제가 등장한지는 얼마 되지 않은, 아주 최근의 일이라고요. 지구적으로 생각하면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폴라니는 인간 본성을 생각하는 지평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계유지가 아니라 이익추구를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내가 A를 주면 저 쪽에서도 내게 A에 상응하는 뭔가를 줘야 한다는 교환관계를 맺게 됩니다.
산업혁명이 중요한 이유는 기계를 도입하고 대량생산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인간의 관계 맺는 방식이 모두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바꿔지지 않으면 뭔가를 했다고, 혹은 뭔가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하기에는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사회가 너무 많습니다.
만약 내 생일파티에 친구가 축하하러 와 준다면? 그럼 나도 그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환관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정은 원래 비대칭적인 관계입니다. 내가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도 그 친구가 꼭 내 생일파티에 올 필요는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내가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을 때 친구도 나도 이미 그것으로 주고받은 게 있는 것이니까요. 꼭 초대에 응해 각자 생일파티에 가는 것이 우정이고 서로의 호의에 대한 보답과 보상이라는 것은 교환관계가 당연시 되면서 생겨난 우정의 상입니다.

변화의 속도와 삶의 속도의 균형(저항과 개입): 폴라니는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인클로저 운동이 가져오는 변화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았다고요. 어떤 시대든 사회적 변화에 따른 ‘멘붕’은 옵니다. 그런데 폴라니는 그런 지점에서 경제적 논리에 우리를 놓아두면 안 된다는 것을 ‘개입’정책을 예를 들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차피 겪을 변화라면, 어떻게 덜 충격을 받는 방식으로 겪을 것인가. 그것은 경제의 바깥 영역에서 개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 정책일 수도 있고 시민단체의 운동일 수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그나마 저항이 있어야 정부가 규제를 도입하고 변화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늦춘다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시장경제체제가 확장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요. 시장경제가 가져오는 황폐화는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냥 손 놓고만 있는 것과 황폐화를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속도를 늦춰 삶의 속도와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저항은 필요한 것입니다.

분배: 분배가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세금을 조금만 내면 당연히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많이 내면 많이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도 당연시되고요. 하지만 이것은 화폐 교환논리, 많이 기여하지 않은 사람이 많이 가져가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의 당연함을 폴라니는 인류학에서 상호성과 재분배의 원리를 설명하며 깹니다. 만약을 위해 더 많은 ‘내 것’을 쌓아두는 것은 사실 안전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공동의 재산을 쌓아두는 편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기가 더 수월한데,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라는 전제가 있는 한 이런 원리는 작동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경제가 당연하지 않은 사회는 이런 상호성과 재분배의 원리로 위기가 닥쳤을 때 개인에게 돌아오는 리스크를 최소화 합니다.

새로운 필요: 이런 시장경제가 허구라는 것을 알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때 시장적 가치가 지배하지 않는 새로운 영역의 생성이 필요합니다. 물건이 화폐가치로 환원되기 전, 물물교환을 할 때 그 물건의 가치는 오로지 나의 필요였습니다. 이때는 물건과 물건 사이에 객관적 가치라는 것은 없었던 것이죠. 아무런 화폐적 보상이 없는데도 주는/즐겁게 받는 관계의 발명도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자립에 대한 새로운 상을 생각해 볼 수도 있고요. 가령 현재 청년이 부모의 도움 없이 자립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단 보증금을 마련할만한 돈을 모아야 하고 또 세를 낼만한 정기적 수입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때 맹점은 나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다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동을 하고 그것으로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생각, 혹은 빚을 내서 내 집을 갖고 그 다음에 갚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죠. 어느 쪽이든 ‘자립’은 요원합니다. 이때 자립에 대한 생각을 바꿔서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주거공간에 대한 생각, 생활비와 여가시간의 소비에 대한 생각도 다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즉 새로운 경제적 영역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다음주 과제
<보바리 부인> 이번에 정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공통과제 써 옵니다. 키워드와 연관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무엇인지 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을 전개해서 써 옵니다~
<거대한 전환> 2부 7장에서 10장까지 읽어옵니다. 각자 맡은 부분 발제 해 오시고요^^ 우리가 경제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주절주절’ 써 와서 함께 이야기 해 보아요~

-간식은 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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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8 12:06
    보바리 부인의 어리석음에 대한 플로베르의 통렬한 비판은 플로베르 그 자신의 계급, 바로 그의 시대 전체를 향한 그의 매서운 시선을 보여줍니다. 칼 폴라니와 함께 보바리 부인의 삶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