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절차탁마 M 8월 8일 수업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08-12 08:02
조회
267
 

1. 두 도시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러시아와 보바리 부인이 살던 프랑스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19세기 영국으로 왔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두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 묘하게 맞물리고 그러면서도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았습니다.


되살아나다


『두 도시 이야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하나 있다면 ‘되살아나다’입니다. 처음 마네뜨 박사를 찾아가려는 로리가 전보에 답으로 전한 말이자, 1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 소설에서 무엇이 되살아났을까요? 바스띠유 감옥에서 탈출한 마네뜨 박사일까요? 마네뜨 박사는 의사에서 죄수가 되었다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의사로 되돌아갑니다. 의사로서 그는 누군가를 고치는데, 나중에는 원수마저 고칩니다. 귀족이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봅니다. 그런 마네뜨 박사는 이전과 같은 의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가하면 1789년 혁명을 바라보는 1859년의 디킨스에게 ‘되살아난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뿌리 뽑힌 존재가 변화하는 시대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했던 당시에, 다시 태어나라는 명령을 제도가 부과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작동이 노동자로 변해 가는 상황, 그 과정에서 인격마저 변형되던 시기, 전환과 재탄생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네트 박사뿐만 아니라 시드니 카턴이야말로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무기력한 변호사이자 주변인으로 살던 그는, 루시와 찰스 다네이를 만난 이후로 무언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합니다. 그러더니 그는 소설 마지막에서 찰스 다네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의 죽음은 재생일까요? 다네이와 카턴은 상당히 닮았다고 나오는데, 왜 다네이가 아닌 카턴이 죽어야했던 걸까요? 영국인이면서 프랑스 혁명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카턴. 무관한 자가 개입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한다는 의미일까요? 변호사인 카턴이 처형당하는 것은 법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걸까요? 자기 힘으로 살 길을 찾는 부르주아 카턴이 죽는 결말은 부르주아 계급이 희생하기를 요구하는 상황인걸까요?


한 편 다네이는 하인에 대한 주인의 의무감을 느끼고 프랑스로 되돌아갑니다. 다네이는 혁명을 뚫고 살아 돌아오지만 ‘다네이’로 돌아온 게 아니라 시드니로 신분을 바꿔 돌아오는데요, 아예 다른 존재가 되어 돌아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존재가 바뀌는 것이 재생의 의미인걸까요?


가족


재생과 부활 이외에, 『두 도시 이야기』를 가족이라는 테마로 살펴보아도 재밌었습니다. 작품에는 중심이 되는 가족이 있는데 바로 마네뜨 일가입니다. 루시와 아버지, 그리고 루시의 남편 찰스 다네이로 구성된 가족인데요, 나중에는 여기에 로리와 프로스양, 그리고 카턴까지 합류해 한 무리를 이룹니다. 이 중심적인 가족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사람이 루시 마네뜨 양인데요, 마네뜨 양은 하얀 이미지, 즉 순결하고 완전무결한 인물로 나옵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찰스, 카턴, 스트라이버 모두가 루시에게 사랑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 왜 마네뜨양은 찰스를 남편으로 삼은 걸까요? 당시는 부르주아 가족 모델이 확립되던 시기이자 여성을 중심에 두고 가정이 꾸려지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지던 시기라는데, 그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마네뜨양 일가의 모습이라 본다면. 찰스와 루시의 만남이 가장 이상적인 결합으로 여겨졌던 걸까요?


그런데 그녀와 아버지 마네뜨 박사 사이의 관계도 일반적인 부녀관계라고 보기엔 이상한 측면이 있습니다. 결혼 전 날 루시는 아버지에게 매달려 눈물짓는가하면, 찰스는 마네뜨 박사에게 결혼을 승낙 받으러가서는 마네뜨양과 마네뜨 박사 사이에 어떠한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처럼 아버지와 딸을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마네뜨 일가가 사는 집은 런던 외곽의 고립된 공간이고, 상당히 폐쇄적입니다. 이들은 현모양처 중심의 가족관계인데다가 다른 인간 관계망이 없습니다. 찰스처럼 결혼해서 한 가족이 되거나, 로리나 프로스양 혹은 카턴처럼 가족으로 포섭되지 않고서는 그들과 교류하지 못합니다. 다채로운 무리가 섞여있다거나 다양한 직업이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가족'끼리만 즐겁고 화목한 공동체. 이들을 통해 근대적인 가족 구성에 대한 어떤 한계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 편 크런처 가족은 아이와 부부 중심으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부르주아 가정의 모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네뜨 일가보다 경제력이 낮죠. 그래서인지 크런처씨는 돈을 버는 데 상당히 민감합니다. 그의 부인이 기도할 때마다 내가 잘 되는 걸 보려면 기도를 때려치우라고 말하는데요, 당대 이미 종교가 가지는 공동체성이 사라지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후 교회는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기도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교회가 영리 추구에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면서 공리주의와 연결되기도 하였다네요. 여러모로 변화하던 19세기 런던, 사람들의 삶도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었던 게 보입니다.


두 도시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바로 두 도시입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저마다 비슷하게 이상한 두 도시가 소설에 동시에 등장합니다. 소설 속 프랑스 땅에는 광기로 치닫는 혁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런던은 혁명의 물결에서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그렇게 좋지도 못한 게, 크런처씨같은 시체도굴꾼이 돌아다니는 도시, 죽은 목숨마저 상품으로 팔아넘기는 도시이기 때문이지요. 혁명기에 프랑스는 가난했습니다. 귀족이 수탈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탈을 자행한 귀족이 사라졌음에도 혁명 이후에 왜 누군가는 여전히 가난한 걸까요?


당시는 제국주의가 시장을 개척하던 시절이고, 민족 중심 혹은 국가중심 이야기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시기라고 합니다. 영국적 특성, 프랑스적 취향같이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대였고, 경계가 세워지던 시기였습니다. 임의로 경계를 세우려 하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것을 싫어하던 시절이지만, 두 도시에는 막으려 해도 소음이 밀려들고 알게 모르게 두 도시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데... 과연 두 도시를 구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그 전에 두 도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이런 수많은 질문에서 각자가 관심을 가진 질문을 발전시켜 완성된 에세이를 한 편 써오기로 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두 도시의 삶,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2.  거대한 전환


지난 번 이야기 한 스피넘랜드법 실행 이후, 영국은 빈곤을 외면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나라는 풍요로워지는데 빈곤은 늘어난 모순적인 상황을 두고 여기저기에서 사회 구제책이 제시되거나,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납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일단 빈곤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이후 사람들은 빈곤을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습니다. 존 벨러스, 제러미 벤담, 로버트 오언 등 다양한 사상가가 등장하지만 결국 이들은 모두 시장질서 안에서 빈곤을 해결하려 했을 뿐입니다. 대니얼 디포는 이 주장에 반기를 들고 “시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편 이 시기는 근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새로운 학문 정치경제학이 탄생한 때이기도 합니다. 타운센드는 서로 잡아먹으면서 개체 수를 조절하는 동물을 보고나서, 인간도 그와 비슷하게 살아갈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의 수를 조절하는 것은 식량의 양이다.” 그런가하면 “굶주림은 제아무리 흉맹한 동물이라도 순하게 길들이는 법이며, 또 제아무리 비비 꼬인 꼴통들이라도 그들에게 예의, 공손함, 순종과 복종 등을 가르치는 법이다.”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굶주림은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하니까, 굶주리도록 내버려둬라 그러면 알아서 일을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폴라니의 역사 검증(?)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굶주림이 문제였던 적은 없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신화가 바로 굶주림이야말로 항상 있었고 그것이 인류를 가르치기도 한다는 환상이지요. 이전까지 빈민 구제는 사회적인 책무였습니다. 교회 교구는 그래서 빈민 구제를 담당하는 기관의 역할도 맡았지요.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시장논리로 풀어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굶주림 앞에 구제는 없습니다. 굶주림 앞에서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굶주림으로 이윤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옮기도록, 즉 굶주림마저 시장논리로 포섭하려 합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가 바로 굶주리지 않으려면 일을 하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용되어 일을 한다는 것은 곧 1) 신체를 길들이는 일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동안 정해진 공간에서 일을 하도록 우리 몸을 맞춰야 합니다. 이는 또한 2) 정신을 길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맘에 들게 행동하지 않으면 짤릴 수 있다, 혹은 우리 덕분에 너희가 굶지 않는다는 공포심을 불어넣어 정신을 단단히 묶어둡니다. 게다가 ‘굶주리면 일하게 된다’는 논리가 확산되면 더 이상 빈민문제를 사회문제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개인의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떠넘기는 세상이 됩니다. “인간이 실제로 짐승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타운센드의 주장. 그의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논리에서 벗어나 살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어야 나머지가 해결된다고 믿는 우리.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굶주림에 대한 ‘만들어진 공포’에 쌓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인간은 식량에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존재에 불과할까요? 우리를 못 살게 하는 것은 굶주림 그 자체인걸까요? 굶주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인 건 아닐까요?


채운샘은 이번 주제와 관련해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을 놓치게 자꾸만 몰아가는 굶주림 상태. 과연 그 상태에서 인간은 정말 짐승으로 전락하고 마는 걸까요?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이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제부쉬낀같은 사람이 있다면 시장주의자들의 논리는 성립할 수 있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철학이고 예술이고 한다‘ 저는 이런 말에 왜 당당하게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라고 반박하지 못했던 걸까요? 철학을 배우고 예술을 공부하는 게 왜 사치스러운 일로, 배불러서 가능한 일로 당연스레 여겨지는 걸까요? 사랑하는 여인에게 빵이 아닌 제라늄을 선물한 제부쉬낀이 새삼스레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저는 제부쉬낀 팬입니다) 어쩌면 화폐를 모든 측정 기준으로 두지 않는다면, 정말 다른 삶이 보이는 건 아닐까요? 저는 학교를 졸업을 하고 난 지금, 미술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미술은 취미로만 하면 되지 않느냐 끊임없이 되물으셨지만, 그래서 저도 오랜 시간 이래도 되는걸까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에 저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어떤 갈망이 저를 여기로 몰아갔어요. 시작은 했지만 이 모험을 둘러싼 수많은 주변의 우려와 약간의 질타(팔자가 좋으니 할 수 있는 선택이다)를 들으며 저는 계속 불안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일은 중요합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요. 제가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갈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고민하고 시도해보아야겠지요. 그런데 분명한 한 가지는 비록 막막할지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이루고 싶은 지점을 향해가는 이 시간이 저에게 의미 있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요즘 하루하루를 꼭꼭 채워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미나를 하고 나면 몸은 지치지만 마음은 묘하게 생생해지듯이요. 이 생생함을 나침반으로 삼아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고, 그 생생함을 나누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찾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고 다음 주 수업에 못 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여행가서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돌아오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거대한 전환 14장까지 까지 읽어오기로 했어요!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는 8월, 한 주간 즐겁게 읽고 쓰고 다음 주에 뵈어요!!

전체 3

  • 2017-08-12 13:41
    수업에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와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생생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저에게도 3학기 수업은 내 욕망의 지점을 다시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다다음주 즐거운 여행후기와 함께 봬어요.
    그런데 문학 글쓰기는 에...에세이는 아니고 한가지 주제를 심화시킨 글이지요.;;

  • 2017-08-13 21:35
    보영쌤~ 생생한 후기를 올리고 산업의 최첨단을 확인하러 가셨나요^-^ 산업혁명으로 인간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다는 게 놀라워요. 우리가 어째서 노동하고 또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게되었는지 되짚어보면 이것밖에 안되었다니 넘었다니 0ㅇ0

  • 2017-08-14 11:27
    시장과 개인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보영 쌤의 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