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8.29 절차탁마 M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9-01 19:46
조회
220
170829 절차탁마 M 후기

<드라큘라 2>

<드라큘라>의 기록: 드라큘라는 안개 같은 존재입니다. 온갖 것들로 변하고 또 인간은 가지 못하는 곳을 손쉽게 넘나들지요. 그러다보니 형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책 제목은 <드라큘라>인데 정작 드라큘라가 등장하는 장면은 몇 개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글로 쓸 만큼 드라큘라는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남는 것은 그에 대한 무성한 이야기들, 그에 대해 어떻게든 표상하려고 하는 노력들만 무성한 것이 바로 책 <드라큘라>입니다. 그러면서 반 헬싱을 비롯한 사람들은 잡히지 않는 드라큘라가 어떤 존재인지 확정하려고 했던 것이죠.
쓰기 전까지 드라큘라는 미지의 존재이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범주 안으로 계속해서 그를 소환하는 행위(쓰기) 끝에 드라큘라는 잡힙니다. 그야말로 난도질을 당하지요. 근대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인간의 지성으로 끝까지 추적해서 밝혀야 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시대가 바로 인본주의를 모토로 하는 근대였던 것이죠.
근대 이전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출신, 누구네 집 자식이면 충분했지요. 하지만 근대는 규정하고 확정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드라큘라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철저하게 분석되어 공략되어 버리죠. 조너선 하커는 후에 자신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드라큘라가 ‘한 뭉치의 타자된 종이’로 남았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이방인, 과거, 미지의 존재 드라큘라는 그렇게 끊임없이 기록되고 규정되면서 거대한 두려움에서 한 뭉치 종이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드라큘라 보다는 <드라큘라>라는 책 자체가 무섭게 느껴지네요. 그들의 집념은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기보단 모든 것을 확정해야 하며, 확정되어야 한다는 근대인의 오만함이 그들 행동력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과학과 미신: 드라큘라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반 헬싱 박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계속 드라큘라가 있다는 얘기를 하기를 꺼립니다. 루시가 죽음에 이르러도 그는 흡혈귀에 대해 감히 말하지 못하지요.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까지, 그는 많은 증거를 모으고 수어드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드라큘라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장을 보여야 했습니다. 증거를 들이밀기 전까지 사람들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뿐만 아니라 박사 스스로도 증거가 모이기 전까지 드라큘라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 서양의 논리였습니다. 정보의 집적과 운용이 그들의 무기였지요. 그 전까지 드라큘라를 비롯한 무수한 괴기, 미개지, 과거, 비서양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증거를 찾아다닌 끝에 드러난 진실을 반 헬싱 박사는 받아들입니다. 그때부터는 거침이 없지요. 미신이라고 할 만한 마늘꽃, 십자가, 말뚝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죽은 자의 목을 베는 것도 감행합니다. 수어드 박사는 반 헬싱 박사를 따라하면서 사실 구속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아닌가 하고 회의합니다. 그만큼 과학적 사고 끝에 밝혀낸 진실은 미신적이었고 미신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뭐가 과학이고 뭐가 미신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먼저 선빵(?)을 날린 쪽이 임자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라큘라>를 읽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앎으로부터 소외된 드라큘라: 드라큘라를 다시 보죠. 그는 유럽의 저 끝, 루마니아에서 왔습니다. 백작이라는 구시대적인 직함을 달고 있고요. 성도 으리으리합니다만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자신도 900년은 너끈히 살았다고 자부하죠. 그가 하는 말은 너무도 오래되어 근대를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잔인함으로 비춰집니다. 그런 그가 산업혁명으로 최첨단을 달리는 유럽의 서쪽 끝, 영국으로 와서, 그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의 방식으로 땅을 사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나름 이 백작님이 노력(?)한 것 같지 않으세요? 고성에서 떵떵거리며 살아도 되는데 그래도 요즘 것들(!) 방식으로 살아보겠다고 나름 도박을 걸어보신 것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드라큘라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근대인들이 구축한 지식의 거울에 포착되지 않는 존재였거든요. 바로 ‘인간’이지요. 근대의 발명품은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직접 책임지는 합리적 존재 인간.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그저 학문의 ‘대상’이 되어 이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관찰당하고 기록되는 존재, ‘식민지 화’ 되는 존재가 되어 갑니다. 선민쌤께서는 근대 이후 문학의 테마 중 하나가 ‘식민지인은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인은 말을 하려는 순간 자신들을 식민지인으로 만든 제국의 회로에 대해 배워야 하기 때문이죠. 이미 대상화가 된 존재가 자기 말을 하려면 오히려 그들의 회로에 적극적으로 포섭되어야 하는 역설이 일어나고 말죠. 어쩐지 영어 발음에 신경 쓰며 조너선에게 점검받는 드라큘라 백작님이 생각나서 짠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광기와 이성: <드라큘라>는 근대의 이분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 같습니다. 동방과 서방, 괴물과 인간, 식민지와 제국... 그리고 광기와 이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드라큘라>에는 랜필드라는 존재가 나오지요. 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고 구속복을 입었으며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애완동물을 기르거나 외출할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처지로 나옵니다. 그의 병명은 생육식증’입니다. 먹이사슬, 생명의 위계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죠. 그는 자신이 생육식을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공평무사한 이성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피와 살을 먹어서 생명력을 흡수하는 이 모습...드라큘라 백작과 닮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드라큘라를 주인님으로 모시지요.
랜필드의 기이한 점은 광인이면서 완벽한 논리력으로 수어드 박사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은 정상임을 입증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구속복을 벗지 못합니다.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에는 논리적 이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근대인들에게 광인은 이해하지 못할 존재이자 자신들의 세계를 무너뜨릴 위험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랜필드는 심지어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증명하냐고 의심을 제기하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올린 이성과 문명은 무너지고 말 테니까요. 드라큘라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괴물의 존재는 단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근대적 이성의 존립 근거를 위협합니다.
정옥쌤은 랜필드를 드라큘라와 더불어 정상과 광기 사이의 경계에서 발생한,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셨지요. 심지어 랜필드는 생명의 위계에서 벗어나 자기 영혼의 자유를 원했기에 드라큘라에게도 대적합니다. 드라큘라는 죽어서도 그의 손에 떨어진 희생양을 놓아주지 않는 포식자입니다. 그런데 랜필드는 영혼의 자유를 위해 그에게 지배받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꾼 랜필드에게 광기와 이성,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는 그런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으니까요.

드라큘라와 시장경제: 마지막으로 <드라큘라>는 시장경제에 대한 비유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흡혈귀의 피는 고착되지 않는 흐름을 의미하죠. 자본주의 이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졌던 순수혈통이 가치를 잃고 어떻게든 흐르고 섞여서 멈추지 않는 시장경제를 보여주는 것이 흡혈귀 이야기입니다.
또 드라큘라는 희생양에게서 ‘피’만을 뽑습니다. 이것은 개별 인간으로부터 그의 삶의 맥락을 모두 소거하고 노동만을 추출하는 경제 논리와 닮았습니다. 거기다 어느 틈으로나 스며드는 그의 변신술, 시간/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원래부터 그는 있어왔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영생 모두 시장경제의 유동성 및 확장성과 환상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죠.
드라큘라의 희생자는 결국 그의 동일한 존재가 되어 다른 사람의 피를 빨며 돌아다닙니다. 이것은 시장경제에서 뿌리 뽑힌 존재가 시장과 동일화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던 공동체로부터 뿌리 뽑힌 인간은 시장 경제 질서에 맞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돈을 매개로만 사고하고 관계 맺는다든가, 자신을 더 좋은 상품이 되게 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든가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거대한 전환>

<거대한 전환> 후반부에서는 어떻게 파시즘이 단지 ‘사악한 정치인’의 짓이 아닌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려 들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폴라니는 파시즘을 단순히 정치(히틀러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경제적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말하죠. 파시즘에 대한 중요한 해석 중 하나는 라이히가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입니다. 라이히는 대중이 파시즘의 희생자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이야말로 파시즘을 원했다고 보았습니다. 강력한 지도자가 밀어붙이는 정책을 보고 사람들은 ‘정말 저렇게 될 것 같다’고 여겼기에 파시즘에 지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무의식과 사회적 관점의 상관관계를 놓쳐서는 파시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력의 증대만 고려한 포드주의는 산더미 같은 상품을 만들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동안 노동자들은 그 시간에 맞춰 쉬지 말아야 했고 되도록 생산을 많이 해야 했지요. 그러나 생산을 많이 한다고 뭐가 잘되겠습니까? 팔아야지요. 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는 곧 거대한 공황을 가져옵니다. 시장경제의 자기조정능력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나지요.
폴라니는 거대한 포드주의(생산력 급증)가 중시하는 효율성이 가져온 부작용의 대안으로 정부개입의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미국의 뉴딜정책과 같은 케인즈주의. 이것은 계획경제로, 생산을 조정하고 분배하며 강력한 국가가 주도한 정책이었죠. 두 번째는 바로 파시즘입니다. 히틀러는 시장질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분배에 관심을 두지 않았죠. 다만 우리의 생산으로 남는 이익을 뺏기지 않겠다는 발상을 가지고 인종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파시즘은 나라마다 다르게, 하지만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게 나타났습니다. 공통점은 하나, 시장을 부정하는 게 아닌 인민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다는 것.
폴라니는 마지막 챕터에서 자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계속해서 강조한 대로 시장에는 자기조정능력이 없지요. 즉 자기조정능력이 환상이라면 그것은 시장경제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환상성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본은 늘 시장 자신이 아니라 정치적 개입을 통해 위기를 돌파한다는 것도 폴라니가 보여준 사실입니다. 시장경제는 계속해서 새로운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고 방해를 없애달라고 하는 한편 진정한 시장경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순 속에서 굴러갈 테니까요. 하지만 시장경제‘사회’라는 것이 구성되었다는 것을 안 지금, 우리는 다른 역동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폴라니가 우리에게 주는 팁(?)은 경제문제를 경제적으로만 질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제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사고방식을 벗을 때 우리는 다른 사회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은 휴강입니다...만 에세이 준비기간인 관계로 각자 나름대로의 성과물(!)을 가지고 만납니다. 오후 1시까지.

정식 에세이 발표는 9월 12일 오전 10시입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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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2 07:56
    후기를 읽으니 드라큘라가 더욱 짠~ 해집니다. 이번 3학기는 정말 네 작품 모두 뽕을 뽑아서 읽은 것 같습니다. 그 열정을 잘 살려서 시장 경제의 환상을 정면돌파해보는 에세이 쓰기 시간을 만들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