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에세이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9-07 20:03
조회
130
〈인간적인〉이 모두 끝났습니다! 1권은 벌써 가물가물하네요. 언제 두 권을 다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이번 시즌은 에세이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따로 말씀 안 드려도 준비를 열심히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세미나를 정리하는 느낌으로 차분하게 써주심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책을 뒤적거려봐야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니체가 워낙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라, 덩달아 온갖 주제들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선 은남샘은 니체과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구절들에 주목해주셨습니다. 205절, 304절, 327절 등에서 니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임을 잊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조롱 섞인 지적이 주를 이뤘죠. 저는 그 중에서도 304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오류들의 기원에는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 인간적인 허영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가장 겸손한 사람이 자연과 세계속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느끼는 허영심에 비하면 가장 허영심에 찬 인간이 가지는 허영심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저는 203절을 중심에 놓고 발제를 했는데요. 203절에서 니체는 사람들이 경험은 너무 많이하면서 숙고는 너무 적게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이때 니체가 말하는 경험과 숙고가 무엇일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습니다. 제 발제와 관련하여 경아샘은 ‘망각’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241절에서 니체는 “잘 관찰하는 법과 그러면서 잠시 동안 자신을 잊어버리는 법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듣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241절에서 니체가 말하는 ‘자기망각’이 203절에서 이야기하는 ‘숙고’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셨죠. 니체는 분명 ‘체험’과 ‘사유’를 구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떻게 자기경험을 보편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방식으로 체험을 조직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고민들이 ‘숙고’, ‘관찰’, ‘자신을 잊어버리기’ 등등의 말들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네요. 수늬샘께서는 에세이쓰는 과정을 숙고, 관찰, 망각의 시간으로 가져가보자는 멋진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현정샘은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습니다. 170절에서 니체는 ‘근면한 시대의 양심’을 말하며 “이 양심은 우리에게 가장 가치있는 시간과 오전을 예술을 위해 할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이렇게 노동과의 비교 속에서 예술이 평가절하될수록 예술은 “반쯤 죽어가던 사람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강한 흥분제”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술이 처한 상황에 니체가 자기시대로부터 읽어낸 경향과 일치하는 것 같아서 놀랐습니다. 같은 절에서 니체는 “언젠가 다시 자유롭고 충만한 축제와 기쁨의 날들이 우리 삶을 이끄는 시대에는 우리의 거대한 예술도 필요 없는 것이 되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정샘은 이 부분에서 니체가 삶의 미학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지적해주셨습니다. 니체가 ‘예술’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어떤 분과로서의 예술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2권의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에서 니체는 예술을 “인간 본성의 기원에 따라 되풀이해서 솟아나오게 되는 저 고통스러운 것, 끔찍한 것, 혐오스러운 것과 같은 저 모든 추악한 것을 은폐하거나 새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위대하고 건강한 시대가 도래한다면 소수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임무를 전담할 필요가 없게 될지도 모르죠. 모두가 삶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조형해낼 수 있게 된다면 예술은 없어지고, 모든 삶이 예술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희샘은 317절을 언급하셨습니다. 니체는 이 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진정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화석 진열장”을 소유하는 데 만족한다고 말합니다. 성희샘은 선생님 본인이 니체가 말하는 화석 진열장을 소유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죠. 니체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낚시하는 자의 태도를 취하지 말고 양어장을 소유한 자의 태도를 취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의견이 자기 안에서 자라나고 성숙되는 과정을 모두 겪어야 비로소 그것을 자기화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우리는 크든 작든 모두 의견들의 화석진열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를 통해서 함께 화석을 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계숙샘은 323절이 감동적이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서 니체의 삶에 대한 긍정을 엿보셨다고. 저도 323절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니체는 자신이 손상을 입혔더라도 후회나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좋은 일로 중재할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니체는 형벌을 받을 때에는 이미 좋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감정으로 그 벌을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형벌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어리석은 행동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니체는 “형벌을 받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인류의 은인이라고 느껴도 좋다”고까지 말합니다.

후기는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다음주 월요일 2시에 출력된 에세이 들고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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