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09.25 아침놀 첫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9-14 18:08
조회
124
첫 에세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매주 공통과제를 쓴 것도 아니고, 강의를 들은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저는 에세이쓰기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상황이시리라 넘겨짚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완성도를 떠나서 즐겁게 써오신 게 느껴졌달까요^^? 에세이를 더 자주 쓰는 게 좋겠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채운샘이 해주신 코멘트의 핵심은 ‘해석’이었습니다. ‘니체 구절의 멋짐을 그대로 가져오지 말고 물고 늘어져서 해석하라!’ 사실 지난 시즌 마지막 시간의 강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셨었죠. 니체 구절을 멋지게 해석해보라고.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현정샘과 저는 구절 하나 해석하는 게 힘들어서 온갖 말들을 덧붙이게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니체와 만나기 위해선 니체를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니체와 우리 사이에는 두 세기라는 시간적 차이와 문화·지리적 장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니체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별 의미도 없겠죠.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니체와 만날 수 있을까요? 19세기 말 독일의 니체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을 무엇인가를 그로부터 훔쳐냄으로써! 채운샘은 우리의 고민이 니체의 개념에 닿을 수 있게끔 입구와 출구를 분명하게 만들어서, 니체를 맥락화하고 자신의 고민을 니체로부터 개념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석하라!’ 앞으로 세미나를 하는 내내 이 말씀을 품고 가야겠습니다.

‘해석’이라는 문제는 니체 철학 안에서도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동안 잘 풀리지 않던 개념이 ‘관점주의’였는데, 이번 에세이 코멘트 중에 채운샘이 이 개념을 설명해주셨죠. 관점주의라는 개념의 키워드가 바로 해석입니다.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와는 무관합니다.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유일한 불변의 진리란 없다’라는 정도로는 관점주의를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하죠.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세계는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으며 해석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입자와 파동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입자와 파동을 각자의 방식으로 구성해냄으로써만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죠. 그러니까 어떤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출현시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리고 창조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는 ‘해석들’만이 존재합니다.

관점주의는 ‘어떤 힘으로 세계를 해석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동안 제가 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주어진 세계에 ‘대한’ 윤리였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은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전제 속에서 제기되었죠. 그런데 이러한 질문방식은 공허합니다. 세계를 해석하고 창조해내는 방식에는 이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죠. 윤리의 문제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힘의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얼마나 ‘올바르고 정의롭고 선하게 살 것인가’를 묻는 대신 ‘어떤 힘의지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힘의지의 능동/수동을 묻는 것이죠.

니체 또한 주어져있지 않습니다. 니체는 그의 텍스트를 우리가 구성해내는 동시에 우리 앞에 출현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어져 있는 니체를 넘어서 그의 구절들을 훔쳐낼 때, 해석하는 이의 힘의 배치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해석, 해석, 세 번 말씀드리지만 해석! 다음 학기엔 저부터 니체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다다음주, 그러니까 9월 25일에는 (새로운 책!) 《아침놀》을 45절 까지(61페이지 까지)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과 발제는 제가 문자로 조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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