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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9.16 강의 후기

작성자
김지현
작성일
2017-09-17 20:08
조회
177
태욱 선생님 빼고 다 있는 우리 ‘태욱조’에서는 세미나를 하면서 ‘양생’과 ‘망각’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은남 선생님은 현대인들이 근심을 망각하기 위해서 쉽게 사고 버리는 ‘예쁜 쓰레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렴한 낭비’로 순간의 근심을 모면하는 ‘망각’은 차라리 회피에 가깝다고 봐야겠지요. 건화씨가 망각은 ‘정신의 소화작용’과 같다는 니체의 말을 언급하면서, 장자의 ‘망각’도 이와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잊는 게 아니라, 잊음과 동시에 뭔가를 생성하는 ‘망각’에 대해서 길게 논의를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중증 건망증에 준하는 ‘망각’, 현대인들이 쉽게 하는 ‘저렴한 낭비’와 장자의 ‘망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게 ‘태욱조’의 결론이었습니다.

망각이 일어나는 우리 정신(精神)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1.기억의 고집

‘mind’를 우리말로 옮기면 ‘마음’또는 ‘정신(精神)’이 되지만, 정신(精神)으로 풀이하면 더 근원적으로 느껴집니다. 정(精)과 신(神)은 장자가 생존하기 이전부터 이미 쓰였는데, 이 둘을 연결시킨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은 장자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정(精)과 신(神)은 생명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으로, ‘energy'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정(精)이라면 정으로부터 방출된 개체적인 것을 신(神)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어디까지나 설명일 뿐이지, 정(精)과 신(神)은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근원적인 정신(精神)까지 구분 지으려고 하는 우리의 ‘규정성’은 뭔가를 인식하게 하지만, 불필요한 관념을 만들기도 합니다. 무엇인가를 언어적으로 정리해서 규정할 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건들은 ‘기억’이 될 수 없고, 이런 ‘수동적’ 망각은 논의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과를 먹고 소화하는 과정으로 비유해보면, 사과가 사과 인 채로는 위산과 결합할 수가 없습니다. 씹고 다지는 분리와 해체가 거듭되어서 적당한 상태일 때 위산과 결합해서 소화되고 최종의 영양소로 우리 몸에 흡수됩니다. 반면 반지나 동전을 삼켰다면 그대로 몸 밖으로 배출되겠지요. 떠올리면 방금 당한 것처럼 고스란히 느껴지는 묵은 감정,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사고들은 삼킨 반지나 동전처럼 소화되지 않고 기억으로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인식이 몸보다 더 고약한 게 있다면, 곱씹을수록 감정은 점점 커지고 때가 되어 배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시비판별, 상식, 고정관념을 고집하는 한 ‘기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머물러 있는 ‘기억의 고집’은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 ‘규정성’을 유지하려는 고집만큼 견고하겠지요.

 

2. 망각과 양생

양생주편 제 1장은 ‘우리의 생명은 한계가 있지만, 지식은 무한하다’로 시작됩니다. 생(生)은 유한한 것인데, 우리가 인식한 세계는 고정되어 변하지도 않고 영원하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 고정된 인식의 세계를 장자는 지(知)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무지(無知)는 나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지(知)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헤집어서 그것을 해체하는 과정 모두를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무지(無知)와 망각을 저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장자의 망각은 굉장히 능동적인 것이지요.

자연은 우리가 인식하는 범위를 넘어가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말도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습니다. 공자가 육 십세에 도달했다는 ‘이순(耳順)’은 ‘聲入心通 無所違逆 (외부세계가 감각으로 내 안으로 들어오지만 거슬리는 바가 없다)’로 풀이되는 데, 이 같은 경지라면 자신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을 겪어서 다 흘려보낼 수 있겠지요. 노자가 말한 ‘谷神’과 ‘虛’는 흘려보낼 것은 다 흘려보내서 뭐든 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장자가 ‘망각’을 양생과 관련지은 이유는 사람들이 지(知)에 붙들려서 정기(精氣)를 함부로 쓴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더 붙들어두려고, 싫은 것은 그것들과 싸우기 위해서 정기(精氣)를 소모합니다. 반면 꽃이 더 예뻐지기 위해서, 만개한 상태를 유지하느라 자신의 정기(精氣)를 쓰지는 않지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그 시기마다 정기(精氣)를 다 쓸 뿐, 아껴두는 바도 없습니다. 주어진 사건을 겪어내는 데 온전히 에너지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연의 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내가 주력해야 되는 부분에 정기(精氣)를 쓰고 쓸데없는 자의식, 남과의 비교, 경쟁에 쓰는 감정 소모를 그만둬서 정(精)을 보존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장자>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얻은 양생의 방법이 아닐까요.

세미나 시간에 <장자>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니체’의 설명을 가져도 써도 되겠느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장자’도 ‘니체’도 잘 모르면서 대충 뭉개거나 오해를 만들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우리끼리 하는 세미나의 묘미는 ‘당당한 무식함’이 아닐까요. 조금 아는 것이라도 쥐어짜서(마른 행주 짜는 심정으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범하는 오류와 억측, 실수쯤은 감수하려고 합니다. 저는 건화씨의 ‘니체’ 인용이 ‘이게 그 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거든요. <장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불교, 논어, 노자 등등 ‘태욱 선생님’ 빼고(은남 조를 지켜야 하니까요) 세미나 시간에 다 불러들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해와 오류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知)가 사정없이 깨지는 무지(無知)의 시간, 조별 세미나 발표가 있으니까요.
전체 3

  • 2017-09-17 21:41
    매시간 말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말이 또 다 사라져버립니다. 시간과 함께 생각도 흐르니까요... 제법무상. 아무튼 그 무상 속에서 저 나름대로 장자를 '해석'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모두 힘을 아끼지 마시길!^^ 태욱샘 빼고 다 있는 태욱조에는 무엇보다 지현이가 있군요! 하긴, 은남도 있고 완수도 있고 거나도 있고... 있을 게(?) 정말 다 있네요!ㅋㅋㅋ

  • 2017-09-18 10:44
    역시 쉽지 않아요.... 읽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떠올랐다가 그걸 정리해서 쓰려니 막막하네요. 글쓰기도 어렵고~ 장자도 어렵고~ 막막하긴 하지만 이걸 또 돌파하려는 게 재밌네요. 물론 돌파는 안 되지만 ㅋㅋㅋ

  • 2017-09-18 13:18
    오 마지막 당당한 무식함 좋아요. 물론 뭘 알아야 무식도 당당해지지만...일단 당당하게!!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