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925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9-19 17:06
조회
2690
지난 월요일에는 <맛지마니까야> 1품 10경까지 함께 읽고 만나 ‘갈애’ 및 ‘두카’에 대해 함께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개념들을 충분히 이해해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정리하는 것이 이번 과제입니다. 苦란 무엇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오온, 갈애 등의 개념을 경유해야겠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고통스럽다고 여겨왔고,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풀고자 했는지 점검하고, 이와 다르게 붓다는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하라고 하는지 정리해보기!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10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셔요^_^

지난 수업 후기 맡아주신 분은 윤지쌤과 단아쌤입니다. 조만간 올라올 테니 즐겁게 읽고 복습해주시고요.

다음 시간 간식은 은남쌤과 아로리쌤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음… 그냥 가기 아쉬우니 짧게 수업 복기를…?

존재는 춤
채운 쌤 말씀이었습니다. 존재란 어쩌면 춤이 아닐까? 내가 무언가를 결심한 뒤 의도한 바를 행한다고 우리는 믿지만, 어쩌면 우리는 나를 둘러싼 소리의 파동들에 맞춰 춤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첫 시간에 본 영상이 이를 아주 잘 보여주지요. 각기 음파에 의해 각기 다르게 춤을 추는 액체를 보면서 세계는 저런 식으로 무언가가 생겨나고 자라고 사라지는구나, 우리가 진화라 부르는 것도, 의지와 결단, 성공과 실패라고 부르는 것도 다 저 춤들에 다름 아니구나, 싶었지요.
존재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이 소리들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고, 애초 소리들과 무관하게 출현하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소리, 특정한 별들의 기운, 특정한 땅의 기운, 특정한 인간들의 기운이 만들어낸, 특정한 에너지의 이합집산, 이것이 존재들이 겪는 삶의 과정인 셈.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늘 질문 하나가 솟아나지요. 그럼 그 소리 위에서 춤추는 나는 그저 무구하기만 한 존재, 내가 하는 그 어떤 짓거리도 무고한 것인가? 그 어떤 끔찍한 살상도, 특정 대상을 향한 지긋지긋한 증오 내지 무관심도 내 세계가 내게 요구한 춤사위일 뿐,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 되는가? 음…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갈애와 두카
함께 읽었던 복사물(<붓다의 옛길> 일부)에서는 ‘의사’ 붓다가 진단하기로 인간 병의 근본 원인은 갈애에 있다고 하지요.
갈애란 무엇인가? 글자대로 풀자면 대상을 향한 목마른 욕망 정도 되겠네요. 어떤 대상에 대해 감각이 기쁨을 느끼면 그때 갈애가 시작되고 그곳에 갈애가 뿌리를 내린다 합니다. 특정한 맛, 향기, 색깔이라든지, 크게는 돈과 권력, 이성, 가족 등의 특정 대상이라든지에 대한 갈애… 우리는 이 같은 갈애에 의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내 행동과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끊임없이 어떤 행위를 도모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냅니다. 인류의 문명이란 것도 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겠죠.
그러니 갈애가 나쁠 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苦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그래서 채운 쌤께서도 불교의 苦 개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고통과 다르다고 강조하신 듯합니다.
보통의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한 게 안 되었을 때, 가졌던 것을 잃었을 때 고통스러워하지요. 물론 그것도 고통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게 고통스러운 진짜 이유는 물건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물건을 도로 가져오면 되지요. 아주 쉽습니다. 헌데 그러면 고통이 사라질까요? 아닙니다.
불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세계의 ‘무상함’에 대해 통찰하지 못하는 한 苦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비단 물건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시시각각, 매 찰나 사라지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채 물건에 집착하고 인간에 집착하고 장소와 사건에 집착하니, 삶이 언제나 불만족스럽고 한탄스럽고 무거울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다시 기를 쓰고 새롭게 집착해 붙들 대상을 찾아 살면서 온 생을 보내는 겁니다.
그러므로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 그 또한 苦입니다. 즐거움과 苦가 반대가 아니래요.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苦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언제나 고통 받는 인간이 찾는 일시적인 진통제 같은 것이랍니다.

문제 풀기? 만들기?
세계의 무상함, 그리고 존재의 근원적 苦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도 인간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요. 채운 쌤 말씀처럼 전두환도 문제를 아주 열심히 푸느라 계엄령을 선포했었겠죠. 아마 지금도 열심히 그렇게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첫 날 본 영상에서도 그렇고, 복사물에서도 그렇고, 문제를 열심히 풀기 위해 인간이 하는 일이 실은 더 큰 문제, 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를 만드는 일로 이어지기가 십상입니다. 왜? 문제가 만들어진 원인을 통찰하지 못한 채, 그저 해소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불교는 단지 ‘네 맘 편한 게 최고’라고 속삭이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의 사유 체계는 세계의 무상성에 무지한 인간이 그 얼마나 끔찍한 짓을 열심히 저지를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해석해낼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전쟁과 학살, 한 도시에서 수차례 일어나는 묻지마 살인이나 존속살해를 볼까요. 미국은 열심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법무부와 경찰청, 온갖 사회단체들도 열심히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부대가 투입되거나 감시 체제가 더 촘촘해지고 심리 상담이 늘어난다고 해서 전쟁이 사라지고 폭력이 사라질까요? 각자가 느낀 불만족(=苦)에서 시작해 일시적이고 좁은 견해로 구성한 세계에 대해 이러저러한 답을 내보았자 늘어나는 건 그로 인한 충돌과 갈등일 뿐입니다. 정의로운 대통령과 공정한 법률과 용감한 군인과 경찰은 그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집착하는 것에 붙들려 또 새로운 고통거리를 만드는 데 급급하지요.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던가요? 내가 본 게 맞다고, 내 판단이 옳다고, 네가 나와 너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 한에서 고심해 문제를 풀려고 하니 되는 것 하나 없이 마음만 어둡고 무거워지지요. 아니면 문제를 풀었다고 착각하며 살다 다시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거나.
이것도 존재가 추는 춤인가요?! 네, 맞습니다. 이 또한 이러저러한 인연 조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하지만 그러므로 나는 무고한가요? 불교는 아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니까 붓다도 그토록 계정혜를 강조하셨겠지요. 내가 어떤 조건들과 더불어, 어떤 다른 무용수들과 더불어, 어떤 리듬을 유독 강하게 느끼며 지금 이 춤을 추는지 볼 수 있는 힘을 기를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은 초연하고 유연하고 가벼운 무용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요.

춤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생각해보고 싶네요.
자, 모두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경전 11경부터 24경까지 읽어 오시고요, 숙제방에 올라와 있는 다른 학인들의 씨앗문장을 각자 출력해 오심 됩니다. 우리 모두 늦지 말기~ ^_^
전체 2

  • 2017-09-24 15:22
    수경샘~ 자기 글을 사람 수데로 인쇄해 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것을 하나씩 다 인쇄해 오는 건가요?

    • 2017-09-24 18:11
      네 선생님들 각자 수업시간에 보실 다른 분들 글을 출력하심 돼요. 내일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