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수업 끄읏~!!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1-14 16:46
조회
3671
2월 1일 에세이 발표만 남겨두고 이번 학기 수업을 완전히 마쳤습니다.
여행 가신 은하쌤 제외한 선생님들과 조촐...하기보단 배터지는 뒷풀이도 가졌고요.
에세이 걱정은 태산입니다만 음식은 잘도잘도 넘어갔습니다 ㅋㅋ 이래서야 어디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지난 주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에세이 발표 관련 몇 가지 변동사항 있습니다.
일단 에세이 발표는 두 차례 나눠 진행되지 않고 2월 1일 한꺼번에 진행됩니다.
두 학기에 걸쳐 우리 머리를 공격한 화엄경과 에티카를 한 번 제대로 엮어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도전해볼 만한 주제는 이미 채운쌤께서 여러 차례 던져주셨지요.
결국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도 모든 것을 건드려야 한다는 걸 우린 경험상으로 잘 압니다. 다들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정리하고 준비하셔요.

1월 11일 (보너스)수업 시간에는 두 개의 복사물을 함께 읽으며 화엄경 및 불교 개념어들을 조금 정리해보았습니다.
들어는 봤으나 설명하라고 하면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 수많은 개념들이 복사물에 한가득이던데...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시고 정리해두셔요.

수업 내용 중 제 귀에 가장 강하게 꽂힌 것은 다음의 당당한 선언입니다.  "나는 부처다!" 0.0
호오~ 화엄경을 처음 시작한 이래 종종 들어왔던 말이지만 다시 한 번 세세히 들여다보니, 이 말이 깨닫고자 하는 자의 시작점이고 어쩌면 전부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나는 부처다. 처음 발심하고 길을 떠날 때, 또 한 명의 선재가 되어 길을 떠나고자 할 때, 그때 그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주는 것은 바로 이 한 문장입니다.
나는 부처가 되겠다, 는 게 아닙니다. 이 길 끝에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미 부처입니다.
떠나기 전, 선지식을 만나 퍼뜩 마음을 내기 전부터 이미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부처의 세계 안에서 태어난 부처이건만, 내 앞과 옆의 모든 존재가 다 부처이건만, 이를 모르고 나는 내뜻대로 움직이는 나이고 너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너라고, 나랑 잘 맞는 너와 나랑 안 맞는 너가 있다고, 내가 좋아하는 환경과 일은 이것, 내가 혐오하는 환경과 일은 이것이라고 일일이 구분한 뒤 이를 실체화해 살아가지요.
그러면서 좋고 싫음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고 좋은 것을 탐하는 태도는 점점 더 굳어집니다.
이 모두는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우리가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에 인연해 현상되고 또 멸하는 이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 부처이고, 세계가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에게 붙이는 칭호가 부처입니다.
부처란 인연조건 속에서 피었다가 지는 세계 내의 모든 존재를 뜻하기도 하고, 또 세계의 그런 진면목을 알기에 어떤 한 순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아 자재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하기도 한다는 거죠.
그러므로 나는 이미 부처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내 힘으로 지금까지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나를 둘러싼 환경과 만나는 사람들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특정한 성정과 취향을 가진 나는 수많은 '어머니'들 덕에 그렇게 존재합니다.

채운쌤 말씀에 따르면 이를 자각해야만 떠날 수 있답니다. 그럴 때에야 부처 및 깨달음을 실체화하지 않으면서 길을 나설 수 있답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이사무애'와 '사사무애' 같습니다.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이사무애란 한 마디로, 事가 곧 理의 세계임을 아는 것입니다.
리와 사는 서로 장애됨 없는데, 왜냐하면 현상세계 곧 사는 근원적인 리가 표현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어떤 일과 마주쳤을 때 이미 우리 신체는 그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아메바가 촉수로 먹잇감과 위험물을 파악하듯 인간도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대상을 파악하고 판단하고 기억해두지요.
몸을 받은 모든 것은 그렇게 자기 나름의 상을 짓고 이를 계열화해 제 삶을 꾸립니다.
문제는 그 상을 실체화해버릴 때 발생한다지요.
모든 존재와 사건은 그때의 인연조건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그렇게 출현합니다.
그것들이 그와 같이 출현하게 만드는 특정한 조건들, 그것들이 출현하기 전부터 존재하는 어떤 힘들의 장, 이를 불교에서는 리라 표현합니다.
힘들은 한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흩어지면서 새로운 현상들을 또 만들어내길 거듭하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것은 바로 이로 인한 현상들이고요.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만든 인연조건을 보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상을 실체화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두 번째 마음을 낸답니다.
리의 세계도, 리에 의해 직조되는 세계도(둘은 같지 않지만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토록 역동적인데 우리는 이를 화판 위 그림처럼 꽉 붙들어 매놓는 거지요.
하지만 보살은 눈에 보이는 현상은 곧 리에 의한 것임을 알기에 현상을 실체화하지 않습니다. 실체화하지 않으므로 현상세계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답니다.
죄를 묻고 좋다 나쁘다 판단내리지 않은 채 그것을 바라보고 그 조건 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머무는 거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리가 사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절대적이라는 건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리와 사가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로서 드러나지 않는 리란 없으며, 또 애초 사가 없다면 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와 리를 不二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 이것이 화엄사상이 곧 내재성의 철학인 이유입니다.
이로부터 사사무애가 도출됩니다.
드러난 사건을 하나로 실체화해 가치평가하고 특정한 정서에 고착되지 않는다면 사와 사간에 서로 장애되고 반목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개별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윤리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채운쌤께서 말씀하셨죠. 사사무애랑 에티카 3, 4부랑 엮어도 재밌겠다능~)

이렇게 세계의 두 법칙인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를 몸으로 알고 경험하는 것, 이것이 부처입니다.
무엇도 실체화하지 않으며(空조차!) 세계를 긍정하는 것, 이 세계 및 이 시간이 아닌 곳에 대해 어떤 기대나 미련을 갖지 않은 채(이는 자신이 특정 상을 투여한 결과죠) 오직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고 부처의 길입니다.

다시 선재의 구법으로 돌아가봅시다.
만약 그것이 슈퍼마리오 같은 게임이었다면(쏘리~요즘 나오는 게임을 잘 몰라요~) 53인의 선지식을 만나는 과정은 선재가 하나하나 미션을 클리어하는 과정이 되겠죠.
그러므로 점수를 쌓고 득템을 거듭한 선재는 파이널 단계에서 극강의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헌데 보셨다시피 화엄경은 도무지 그런 식의 발전 서사가 아닙니다.
게다가 마지막 만남 이후 선재가 하는 일도 고작(?) 다시 길을 나서는 것이라죠.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선재의 구법수행에는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애초 그에게 목적한 바가 없기 때문이고,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매번 발심하고 걸음을 떼는 그 순간순간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완주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고행과 수난 끝에 득템 가능한 타이틀도 아니고요.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그 법이란 결국 중생 모두가 이미 부처라는 것, 즉 공의 깨달음에 다름 아닙니다)  매순간 깨어 있다면 모든 길 위에서 선재는 부처입니다.
중생과 보살의 차이는 부처의 종자가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가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 그러니까 그가 부처로서 사는가 아닌가 오직 그것에서 드러날 뿐입니다.

다른 데서라면 망상증 환자가 할 법한 소리같이 들리겠지만...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부처입니다. 여러분, 부처가 되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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