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썬더곰의 벤쿠버 이야기 | 경글리쉬의 습격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6-04-14 22:30
조회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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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글리쉬는 나날이 진보하여. .>

 

현서) 엄마, 공룡이 왜 없어졌는지 알아?

엄마곰) 글쎄, 밥을 잘 안먹고, 엄마 말을 잘 안들으니까. . 어쩌....

현서) 그게 아니야아~ 슈링스똬아가 왔었어.

엄마곰) 슈가 뭐? 슈, 링스따?

현서) 아이 참! 따라해 봐. "슈", "링", "스", "똬", "아" !  근데, 엄마 이거 알아? 슈링스똬아가 어디서 왔는지?

은서) 모르겠지 뭐.

엄마곰) @.@ ;;

현서) 유니버스야. 따라해봐 "유", "니", "버", "스" !

 

현서와 은서가 서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제 누가 영어로 물어도 왠만한 눈치는 다 생겨서 예스! 노! 정도는 거뜬히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랑 놀 때에도 "노! 마이 턴.(No. My turn = 안돼. 내 차례야)" 라던가, "나이스 추라이!(Nice try! = 와! 잘했다야~) 정도의 추임새도 곧잘 할 수 있고요. 일년 정도, 돌이켜보면 외국어 때문에 저보다도 고생을 더 한 것 같은데요.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엄마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다! 오~ 부들부들~

 

어제 어린이집에서 공룡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나 봅니다. '우주에서 커다란 혜성이 지구에 오는 바람에, 공룡이 꽝! 맞아서 죽고 말았다.' 정도의 지식을 얻은 뒤, 자랑스럽게 저의 잘못된 상식을 고쳐주고(공룡은 엄마 말 잘듣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사라졌다), 더불어 당연히 제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영어도 가르쳐준 것이지요. 특히 현서가 중점을 둔 것은 발음이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꼬박꼬박 발음했는데, 헉! 그 한 글자 한 글자는 또 경상도 억양!(특히 "똬"를 크게 강조하면서 훅 "아"에서 강세를 내리는 식의) @.@;;

 

'슈링스똬아(shooting star : 별똥별)', '유니버스(universe : 우주)' 아, , 어렵다 어려워.

어제는 두 딸들 앞에서 한 스무 번은 영어 말하기 시험을 본 것 같아요.

 

현서) 엄마, 한 번만 더 해봐. "슈", "링", "스", "똬", "아" !

엄마) "슈!", "링!", "스!", "똬!", "아!"

현서) 잘했어!

엄마) @.@

 

말을 배우는 것은 결국 특정한 권력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속시원히 표현하고 싶지만, 결국 사회가 허락하는 용법 안에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내가 말을 선택한다기 보다, 그 언어가 나의 말을 선택합니다. 여기서 엄마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모어'라는 단어에는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있지만, 결국 그 모어도 아이에게는 일종의 명령입니다. 밥은 이렇게 먹는 것이고,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를 훈련하는 과정에서 밥도 얻어먹고, 예쁨도 받기 위해 익힐 수밖에 없는 게 '모어'는 아닐까요?

 

외국어를 배우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의 권력 관계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저도 가끔씩 다 큰 어른이 초등학교 어린이보다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는데, 그것은 아이에 대한 제 권위가, 언어 능력 덕분에 뒤집어진다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저는 같은 또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영어를 쓰는 일이, 아예 영어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 앞에서보다 더 껄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제 생각이나 경험이 정말 어눌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제가 누리고 있던 사회적 지위(나이 마흔, 대학 졸업자)를 확실히 실감하게 되거든요. 그 지위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예 입을 닫게 되는 거지요. 이뿐 아니라, 특정한 언어 공동체 안에서, 그 언어 수행 능력의 수준에 따라 개인의 활동 범위가 제한되기도 합니다. 제가 벤쿠버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한다면, 정말이지 영어를 잘 안써도 되는 일밖에 구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런 노동은 대게 또 특화되어 있으니까요.

 

한참 말을 배우고 있는 현서, 은서는 드디어 영어를 무기로 엄마의 권위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한국말을 진짜 잘해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뿌듯함!

'엄마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의 통쾌함!

'엄마나 자신이나 말 못해서 겪는 불편함은 비슷하겠구나' 싶은 동변상련의 위로까지!

은서 현서는 요즘 아주 기세등등합니다. 심지어 은서는 "[영어를 쓰는] 캐나다에서는 안 그래~" 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이빨은 안 닦겠다!"고 바둥거리기도 했답니다.

 

아, 참. 하나 또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전 같으면, "슈링스똬아가 우리말로는 뭐야?"하고 묻기도 했을 텐데, 그건 묻지를 않았어요. 두 단어를 일 대 일로 등치시키는 놀이를 더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봐야 겠습니다.

 

* 봄이 왔다 못해, 벌써 가버린 것인지 초여름 날씨처럼 화창하고 따땃합니다. 집 앞 벚꽃은 아직 다 안떨어졌습니다. 채운 선생님께서 끙끙 앓으시던 2층 방에서 자전거타는 아이와 벚꽃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체 2

  • 2016-04-15 17:06
    저 사진은 그야말로 그림같구나.... 그 2층에서 보이던 나무에서 저런 꽃이 피었다니... 아, 이 밀려오는 슬픔.... 끄억끄억

  • 2016-04-17 02:27
    그 때 사주셨던 작은 화분에 아기 손톱같은 꽃들도 많이 피었어요. 온통 핑크핑크! 은서가 세진이 이모는 '핑크'를 좋아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며! 크윽크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