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겨울특강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 : 제 2강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서>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1-22 21:16
조회
371
170120 프루스트 강의 후기 / 혜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제1권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왔을 때만 해도 ‘변태 부르주아 레저’라는 비난을 받으며 외면 받았던 책입니다. 프루스트는 이 책을 앙드레 지드의 출판사에서 내고 싶었지만 편집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자비출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재3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출판되었을 때, 갑자기 이 책은 독자들의 환영 받는 작품의 반열에 올랐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데미안>이 주름잡던 시대의 일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는 <데미안>,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3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고 합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는 소설이었다는 것. 그런데 자기 자신을 찾기는 하지만 두 작품의 종착지는 정 반대입니다. <데미안>의 경우 총알로 서로를 대규모로 쏴 죽이는 전쟁에서 ‘자연의 아주 소중한, 딱 한 번뿐인 시도인 인간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서문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자신의 이야기는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것으로, 전쟁에 나가서 죽더라도 그건 자신의 이야기임을 명심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자기 이야기를 찾는 작품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프루스트는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전쟁 전에 완성된 기획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 <데미안>과는 정 반대로 인간이 자기 경험을 장악할 수 없으며 ‘나’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프루스트의 소설이 각광받게 된 이유는 전쟁 직후 독자의 감수성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자기들이 ‘세기의 마지막 곶’에 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지형과 관계없이 직선으로 빠르게 주파할 수 있는 기차의 발명과 시간을 캡쳐 하여 바로 간직할 수 있는 사진과 축음기의 발명은 사람들이 시공간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럴진대 과거는 어서 빨리 떨어버려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미래주의 선언은 어서 빨리 이 과거를 섬멸하고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죠.

하지만 발달된 기술로 치러진 전쟁은 처참했습니다. 빠르게 도착한 미래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전쟁은 사람들에게 바로 보여주었습니다. 매번 들어본 적도 없는 숫자의 사람이 단번에 죽었고, 이 사실은 전쟁에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동일한 허무와 상실을 느끼게 했습니다. 즉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기술의 진보 앞에서 패배감을 느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가 출간되었습니다. 프루스트는 그들이 떨어버리고 싶어 몸부림을 치던 과거가 곧 낙원임을, 풍요로운 대지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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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쌤의 아름다운 간식 :D

여담이지만 이번 시간에는 연미쌤께서 직접 만드신 마들렌과 향긋한 홍차 티백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마들렌은 너무 맛있어서 강의 시작도 전에 털어 먹었지만 홍차는 오래 즐기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홍차와 함께 이번 시간에 읽은 장면은 ‘프티트 마들렌’과 ‘차 한 숟가락’을 마르셀이 ‘평소 습관과 달리’ 들었던 그 유명한 장면입니다.

마르셀은 과자를 먹고 홍차를 마시자 ‘행복감’을 느끼고 곧 ‘나는 나 스스로를 평범하고, 우연적이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행복감’이야말로 프루스트의 화두입니다. 회상할 때 느끼는 이 기쁨은 무엇인가? 그건 자기가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때는 회상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가 과거를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문제는 이 행복감이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과거를 상기하는 노력을 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떤 순간을 만났을 때 이 순간은 매우 의미 있으며 행복하게 회상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상관이 없는 행복감이라는 사실입니다. 프루스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행복감은 사건이 매번 변주 되면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실체화된 과거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프루스트는 오히려 그렇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박제하는 두 가지 장치를 비판합니다. 하나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습관입니다. 언어 중에서도 특히 이름은 대표적인 박제 장치입니다. 이름은 그 대상을 대할 때, 혹은 그 대상을 대하기도 전에 한 가지 형태로 박제해버리는 관념입니다. 이 박제는 우리가 현실을 만날 때 곧장 실망하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프루스트는 마르셀에게 ‘질베르트’라는 이름이 닿아서 팽창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질베르트라는 이름은 고귀한 지성 스완의 딸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킵니다. 그렇지만 정작 만난 질베르트는 거짓말쟁이에 문학에는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이름은 결국 다양하게 사건을 경험할 기회를 단지 실망으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루스트는 화자의 이름인 ‘마르셀’을 작품 속에서 언급하는 것은 손에 꼽으며 인물들의 작위나 성, 별명을 바꾸면서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습관 역시 나를 너무도 편안하게, 오랫동안 바꾸지 않도록 붙들면서 경험을 다양하게 회상하는 기쁨을 방해합니다. 내가 한 가지 습관에 오랫동안 얽매여 있는 동안에는 과거를 다르게 맛보는 행복감은 요원합니다. 그런데 습관을 바꾸기 위해 바꿀 대상을 밖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나의 습관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만나는 여자 때문에 자신의 습관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습관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건 기껏 타지로 여행을 가서 호텔방을 자기 방의 물건으로 채워 넣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습관으로 축소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습관이란 다른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습관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습관은 일종의 표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 것을 한데 섞어 뽑아낸 평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평균에서 느낄만한 것은 ‘김빠진’ 심상 뿐.

핵심은 회상이 아니라 그 회상하는 것을 ‘쓴다’는 것에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자기가 부정했던 그 언어로 작품을 썼습니다. 지복의 과거는 평소와 달리 먹었던 과자에서 비롯되는 우연이었지만 우연만을 계속해서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

1권에서 마르셀은 우리의 잃어버린 영혼은 짐승과 식물, 무생물 안에 깃들어 있다는 켈트인의 신앙을 말합니다.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그 잃어버린 영혼을 알아보면 영혼은 해방되고 죽음은 정복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접촉한 것들, 과거와의 관계에서 나의 생사는 결정된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관계의 차원을 계속해서 넓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연히 감각으로 촉발된 과거라는 행복을 되찾으려면 지성을 발동하여 아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사유의 모험. 이는 예술에서 느끼는 다채로운 시간의 범위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내일’ 내가 습관을 깨겠다고 계획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켜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계획은 가장 큰 변수인 ‘나’가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미래라든가 내일에 대한 계획은 다 망상입니다. 필요한 것은 타인이나 미래가 아닌 오늘의 내 한 걸음. 그것뿐입니다.

간식은 아라쌤, 래미쌤

다음 강의는 2월 3일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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