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겨울특강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읽기 : 제 4강 <소돔과 고모라>

작성자
소담
작성일
2017-02-13 11:50
조회
323
이번 시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강의를 진행하셨는데요, 이 편은 이름에서도 알아볼 수 있듯이 동성애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말로 소돔은 남색가를, 고모라는 여색가를 뜻한다고 합니다.) 강의를 들어가기 앞서 선생님께서 예전에 동성애와 관련한 대한 수업을 하셨을 때, 학생들(특히 남학생의 경우)이 동성애에 대해 심한 거부반응을 나타낸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동성애라면 일반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평범한 사랑의 형태는 아니지만, 왜 동성애가 우리에게 불편함을 넘은 혐오를 주는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했습니다. 이런 경향은 프루스트가 작품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는데요, 우선 동성애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동성애’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3세기 1869년으로, 그 전에는 동성 간의 사랑만을 특별하게 구분하여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무렵에 ‘소도미’라는 개념에 동성애자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소도미’는 ‘자연에 반한 성행위’를 하는 모든 부류들, 그리고 하느님과 국가에 대항하는 범죄자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비난을 받았던 이유도 그들의 성행위 자체에서라기보다는 그들이 뻔뻔하게 자신들의 경향을 고수한 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예전인 그리스 시대에는 시민권을 획득한 성인 남자가 미숙한 청년을 교육시킬 때 자연스럽게 동성애적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 이전에는 동성애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 보다 너그러웠던 것 같습니다. 또한 신분이 높은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상대를 고를 수 있었고 당시에는 그것을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족들이 향유하는 동성애는 자신의 남성다움을 더욱 과시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고 따라서 동성애의 이미지는 강하고 능동적인 남성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성애는 여성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형태로 인식됩니다. 이는 근대에서 국가라는 개념이 출현한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국가라는 가상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성이 주도권을 쥐게 되고, 여성은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이미지화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를 한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비틀어버리는 결과를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던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프루스트가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에도 만연했기 때문에, 동시대에 프루스트보다 영향력 있던 작가 앙드레 지드는 본인 역시 동성애자였으나 동성애와 관련된 작품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동성애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에서 프루스트의 <소돔과 고모라>는 자칫하면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동성애를 통해 대체 어떤 바를 써 내고자 했을는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놀랍게도 동성애자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고 하면 단연 남작인 샤를뤼스를 뺄 수 없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초반에서 샤를뤼스는 빌파리지 부인의 댁에서 정원사 쥐피앙을 만나게 됩니다. 프루스트는 샤를뤼스가 정원사인 쥐피앙에게 한 눈에 반하는 장면에서 파격적이게도 둘의 모습을 난초꽃과 땅벌의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암꽃이 요염하게 암술대와 수술대를 비틀어 곤충을 유혹하듯 쥐피앙은 교태스러운(한편으론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샤를뤼스는 이에 홀린 곤충처럼 쥐피앙에게 다가갑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를 프루스트가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다고 평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동성애가 뭐냐, 자연에서는 이종 간에도 사랑을 나누는데! 동성애를 혐오하는 자들은 ‘자연에 반한다’는 이유를 들먹이지만, 프루스트는 동물계가 아닌 식물계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동성애 또한 자연의 일부에 포섭시킵니다. 앙드레 지드가 <코리동>에서 객관적인 논리를 통해 동성애를 옹호했던 것에 비해, 프루스트는 사실적인 내용이 아닌 어떠한 도덕적 잣대도 문제 삼지 않는 식물계의 차원에서 두 종족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말합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둘의 움직임은 굉장히 우연적으로 이뤄집니다. 본인들조차도 ‘자신의 역할을 해치울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처럼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샤를뤼스가 남성적인 면모 속에 여성성을 품고 있듯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특정 자질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본인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죽어서까지 발견되지 않는 자신의 성질이 존재한다면?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는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남자나 여자로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성이란 표면적인 판단에 불과할지도 모르며, ‘동성애’라는 단어도 상대를 바라보는 하나의 지적 관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프루스트는 말하는 게 아닐까요.

 

샤를뤼스로 대표되는 소돔과 뱅퇴유 아가씨와 그의 연인으로 대표되는 고모라는 그야말로 도덕의 끝을 달립니다. 사를뤼스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 상대를 우롱하는 매저키스트로, 이후에는 극단으로 타락한 자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변태성욕자가 됩니다. 결국에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모텔을 만들어 온갖 플레이(...)를 일삼아 얼굴은 퉁퉁 붓고 살도 뒤룩뒤룩 쪄서 거리를 지나가도 아무도 그가 남작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쾌락을 위해 외모도, 계급도 저버린 샤를뤼스는 인간이 정한 모든 금기를 깨부수며 악덕이라는 것이, 도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는가’를 알고 놀라게 됩니다.

뱅퇴유 아가씨의 여자친구는 그가 죽고 난 뒤 딸(뱅퇴유 아가씨)과의 성행위를 통해 그를 모독하는 것으로 관능적인 쾌락을 느끼는 새디스트입니다. 그녀는 딸을 통해 뱅퇴유에 대한 부녀간에서 나타나는 숭배의 정을 배웠지만, 반대로 이런 도덕을 저버리는 데서 즐거워합니다. 이런 그녀들의 모독 행위는 이후 뱅퇴유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들로 인해 뱅퇴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차츰 줄어들게 되고, 뱅퇴유 아가씨의 연인은 죽은 음악가가 남긴 암호 투성이 악보를 헌신적으로 해석하여 그에게 불멸의 영광을 전해주려 노력합니다. 동성애가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그들의 유대는 그녀가 도덕을 부정하였기에, 도덕이 닿지 않는 새로운 지평에서 비로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지평에는 뱅퇴유가 남긴 악보, 예술이 자리하고 있다고 프루스트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카구치 안고는 인간을 두고 제도나 법으로 한정할 수 없는 ‘영원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고기’라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등장하는 동성애자들도 도덕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지평을 얘기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테두리 안의 사람들까지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동성애자들 역시 동일한 사랑의 법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샤를뤼스는 이후 모렐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를 너무 사랑해 많은 돈을 들여 음악회도 열어주지만 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합니다. 결국엔 그가 자신의 형과 관계를 맺자 샤를뤼스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합니다. 프루스트가 바라보는 이런 사랑의 모습들─이끌림과 결합, 질투, 소유의 욕망─에 관한 것은 다음 시간에~

 

다음 주 간식은 저와 현옥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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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5 23:06
    잘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