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겨울특강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읽기 : 제 5강 <갇힌 여인>, <사라진 알베르틴>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02-22 18:37
조회
266
프루스트 5강. 평범한 사랑이 위대한 우정보다 낫다 : <갇힌 여인>, <사라진 알베르틴> 후기 / 이응


사랑할 때, 바보같고 어리석은 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랑학개론’으로 읽어도 넘나 재밌는 책이라고 합니다. 이번 시간은 ‘사랑’에 대한 선민샘의 즉문즉설과 프루스트식 사랑의 통찰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재미있게도 프루스트 식 사랑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대요. 대신 남자들은 못된 여자들 때문에 미쳐버리고, 어처구니 없고 어리석은 사랑의 여러 풍경이 보여집니다. 왜 프루스트는 이런 지못미의 연애만을 그린 것일까요?

선민샘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셨어요. 어떤 사랑에서도 존재의 비참과 자아의 비루함을 읽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서가 아닐까 하고.

사랑에 빠질 때 느끼는 질투와 집착, 소유욕, 거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감정들. ‘내가 왜이러지?’ 하는 자신에 대한 놀라움. 그렇게 불같던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반면 사랑인줄도 모르고 살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덮쳐와 그 빈자리에 오열하게 만드는.

시대와 공간은 달라도 프루스트가 보여주는 사랑은 지금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한 번이라도 바보같고 어리석은 자신을 만났던 사람이라면 프루스트의 통찰이 와닿지 아니할 수 없을듯 하네요.

고럼 프루스트가 말하는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볼까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사랑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는 첫 번 째 커플은 스완과 오데트입니다. 부르주아지 스완이 매춘부인 오데트에게 반한건 왜일까요? 그건 오데트의 ‘백치미’에 있다고 해요. 오데트가 백치가 아니었다면, 남자를 이렇게 저렇게 이용해보겠다는 속셈이 있었다면 수가 금방 들키기 때문에 금세 질리고 말았을거래요. 하지만 백치 오데트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지적인 스완으로 하여금 계속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 여자의 행동은 대체 뭐였을까?” “그 여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거지?” 실로 이렇게 ‘머리를 쓰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요. 그렇게 스완은 자신을 거덜내게 만드는 오데트에게로 빠지게 됩니다.


마르셀이 질베르트를 좋아할 때도 이런 사랑의 패턴은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질베르트는 스완과 오데트의 딸인데요, 마르셀은 오데트 자체가 아니라 오데트를 감싸고 있는 환상과 사랑에 빠집니다. ‘스완의 딸이니까 얼마나 아는게 많을까’, ‘오데트처럼 센스있는 귀부인의 딸이라면 얼마나 안목이 있을까’ 하고요. 결국 스완이나 마르셀이 사랑했던 것은 오데트나 질베르트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풍기는 기호로 인해 만들어지는 환상인 것이지요. 그 환상에는 자기 욕망이 투사되어 있고요.

후에 마르셀이 알베르틴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도 같은 작동방식이예요. 저 사람의 세계에는 내가 모르는 뭔가 있을거라는 상상. 그것이 사랑의 욕망을 부추기지요. 마르셀이 알베르틴을 선택하게 된 것은 ‘지금 자신에게 없는 세계’를 알베르틴에게서 보았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사랑’에 대한 관념

프루스트는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를 좋아하는 경우는 없다는걸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지닌 대상으로서 상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을 만나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세계를 지닌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는거라구요. 프루스트가 보기에 그런건 다 ‘자기애’라고 해요. 자기 욕망을 투사해서 상대를 찾기 때문에 결국은 권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자기애.스완은 오데트를 욕망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애에 지나지 않았지요.

프루스트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에도 여전히 사랑이 이토록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은, 사랑이 개인 내면의 개성과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래요.

사랑, 그 모든 것은 어떤 관념에 주술 걸리듯 묶여있다고 해요. 푸르스트에 따르면 운명이란 우연을 타고 온대요. 그 우연에 접속되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개성이 눈을 뜨고, 활기를 얻고, 그때 나는 나에 대해 알게 되고요. 그 우연이 오기 전까지 숨 죽어 있던 그 무수한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경험을 하게되지요.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욕망은 그 무수한 가능성을, 개성을, 활기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과 다르지 않은가 봐요. 그렇지만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무시무시한(내 망상에 다 담기지 않는) 인격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고요, 더불어 자신의 인격을 새롭게 펼쳐낼 용기도 지녀야 한대요. 하지만 내 몽상 속에 상대를 고정시킨 채,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그를 무시하고 현재의 내 상식으로만 재단할 때 그 사랑은 편협한 자기애에 다름 아니게 되지요.


마르셀이 알베르틴과의 사랑에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어요. 사랑은 이래야 한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 나는 이렇다는 갖가지 규정들로 자기 망상에 방해되는 것을 재단하는 방식으로 사랑했던 거지요. 거기에 더해 그녀가 내 곁에 있어도 그녀의 눈과 입술이 저 밖의 어디를 향해 있을거라는 의심과 질투는 그녀를 감금하게 만들어요. 그녀의 온 존재가 펼쳐내는 시간을 소유함으로써 그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은거지요. 하지만 알베르틴의 그 생기와 활력은 집 안에 감금되자마자 시들어버립니다.


시간의 위대한 능력, 망각

알베르틴이 죽고난 이후 마르셀은 이전보다 더한 마음의 감옥에 갇힙니다. 이제 알베르틴은 죽고 없는데 그녀에게 죄를 묻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도 없는데 애꿎게도 알베르틴에 대한 마음은 더더욱 타올라요.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 질베르트는 마르셀에게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이지만, 알베르틴은 죽었으나 생생히 현전하는 존재인 거예요.

그러나 결국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잊게되지요.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알베르틴에 대한 회한도 어느 틈엔가 서서히 죽어가고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 후에 남은 것은, 모든 것이 잊혀지고 사라지리라는 공허함. 푸르스트는 망각만이 우리를 죽이고 새 삶을 준다고 말해요. 잊혀진 옛 애인들,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자신을 떠나보내게 해준 사람들이라고.


우정보다 사랑이 낫다

이 사랑의 실패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사랑하지 말자’는 결론같은게 아닐거예요. 사랑을 통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보게만드는거. “인간은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신 안에서만 남들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거지요.

그래서인가 프루스트는 ‘우정’에 그닥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자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서로를 인정해주고 안락을 제공하는 우정은 오히려 권태를 지연시킬 뿐이라구요. 번뇌 없는 우정보다는 고통스러운 사랑이 낫다는게지요.

사랑은 자신이라는 감옥을 보게 만들고, 그곳을 탈출하고 싶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어주니까요. 그러니 불같은 사랑 하시기를. 그리하여 사랑을 넘어 예술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을 얻으시기를.

선민샘은 다음과 같은 산뜻한 문장으로 강의를 마무리하셨슴다ㅋ

“사랑하소서! 고통받으면서(웃음)”
전체 2

  • 2017-02-23 21:44
    지못미의 사랑ㅋㅋㅋㅋㅋ그렇게 미쳐버리는 사랑이 아무런 자극도 못되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정보다 낫다는 프루스트의 지론이 재밌었어요. 그리고 알베르틴과 마르셀의 기구한 사랑도.

  • 2017-02-24 13:02
    자, 자! 봄에는 사랑사랑!! 사랑은 지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마음의 전쟁터! 돌진합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