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겨울특강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읽기: 제 6강 『사라진 알베르틴』

작성자
한승희
작성일
2017-03-01 15:21
조회
180
제 6강 배움과 예술 - 『사라진 알베르틴』 후기

 

  6강에서는 프루스트가 보는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지 다루었습니다. 화자 마르셀이 좋아한 작가 베르고트를 통해 프루스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지고의 예술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베르고트는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 그림 앞에서 “노란색 벽면의 풍요로운 질감”을 발견하고, 화가가 그 색의 인상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이 고쳐 그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림을 보며 그는 글쓰기 또한 완료라는 것 없이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그러고는 곧! 죽었다고 합니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다가 죽는! 오직 고치는 과정만 있을 뿐인 이런 태도를 프루스트는 예술로 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프루스트의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났습니다. 몸이 병약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초건강을 보여준 프루스트는 작품을 쓰는 10년 간 일관된 긴장감을 유지하며 매일 글을 쓰고 고치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10년 간 매일! 엄청난 예술의 태도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감정, 고통과 거리를 두며 끝없이 투쟁하는 글쓰기를 한 결과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이 소설에는 음악과 회화가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프루스트의 화가들(유예진, 현암사)』라는 책이 있을 정도입니다. 프루스트가 보는 음악은 ‘언어화 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한 예술’, 회화는 ‘언어가 가진 관념을 지워가는 예술’, 문학은 ‘언어 안에 있는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인상을 창조하는 예술’이며 ‘언어로 깨달음을 표현하는 예술’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토록 예술을 많이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교계에서도, 사랑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허무한 생’을 극복하는 길을 오직 예술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우연한 환희의 순간을 충만한 물질로서 재탄생 시키는 과정! 프루스트는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일회적이고 유한한 삶, 우울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저작을 7년 간 읽으면서 예술론을 공부했습니다. 러스킨은 영국의 예술철학자로, 빅토리아 시대를 뒷받침한 사상인 ‘공리주의’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물질적 부, 도시 문명을 예찬하며 인간 윤리를 경시한 시대에 위기를 느낀 그는 ‘자연’에서 도덕의 본질을 찾았고, 예술가는 단지 자연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프루스트는 ‘예술 작품이 표현하는 대상 그 자체에는 어떤 도덕적 가치도 없으며, 그것을 객관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러스킨의 예술론에 반대합니다. 프루스트에게 예술은 현재를 뒤로한 채 멀리 있는 자연 또는 미래에서 진리를 찾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우울할지라도 지금 살아 있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우울과 권태로운 일상을 살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죽음마저 아랑곳하지 않게 만드는 어떤 확신과 같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예상치 않은 곳에서 ‘현재’로 나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마들렌 과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건) 이 기쁨이 무엇인가? 이 질문을 탐구해 들어갈 수 있는 순간도 오직 현재 뿐! 작품 속에서 마르셀은 탐구하며, 깨달아갑니다. 이 놀라운 환희, 모두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발베크에서 본 나무의 조망, 마르탱빌 종탑의 조망, 수많은 감각들이 한 순간에 펼쳐지는 초월적 기쁨! 이것이 무엇인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모든 과거가 부활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마르셀은 시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이렇게 되찾은 시간을 촉발하는 매개체가 완벽하게 무용한 ‘돌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이든 유용성을 기준으로 의미를 따집니다. 익숙한 유용성을 떠나서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어떤 목적도 없이 대상을 볼 때 존재는 더욱 풍요로운 의미를 띈 존재로 보이게 됩니다. 마르셀에게 ‘돌멩이’는 완전한 우연, 완전한 무용성으로 다가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채롭고 끝없는 시간의 윤무를 체험하게 해줍니다.

  생의 허무함을 넘어서는 환희의 순간은 이처럼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대상과의 마주침으로부터, 감각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지만, 그 순간에 왜 기쁜지 스스로 사유하지는 않습니다. 기쁨의 이유를 온 지성을 발휘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순간 또한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참된 삶, 끝내는 발견되고 환히 드러나는 삶, 유일무이한 삶, 실로 우리가 살아온 삶, 바 로 이것이 문학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가가 그렇듯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순간순 간 살아있는 삶 말이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은 그것을 밝혀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그 삶을 보지 못한다. …(중략)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떠날 수가 있고, 그 풍경이 달에서의 풍경만큼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우리 눈에 비치는 것과는 다른 우주에 관해 알 수 있다. (『되찾은 시간』)

 

  마르셀이 깨달아가는 과정을 쓴 인용문들을 함께 읽으며 강의를 계속 들었습니다. 오선민샘은 이 인용문을 통해 우리가 예술 작품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작가의 사유, 통찰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작품(대상) 자체에 감탄만 하며 멍하니 감상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삶을 밝혀내는 사유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루스트는 ‘우리는 엘스티르 한 사람, 뱅퇴유 한 사람 덕분에, 그러한 예술가들 덕분에 그게 가능해져 말 그대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마음껏 날아다닌다.’(『갇힌 여인』)라고 썼습니다. 예술가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풍경을 찾아 헤매지 않고, 세계를 보는 백 가지의 다른 눈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오선민샘과 우리 모두 프루스트의 이 문장에서 감동받았습니다. (맞나요?^^;) 그리고 세계를 보는 다른 눈을 갖기 위해, 이 별에서 저 별로 마음껏 날아다니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위대한 음악가, 화가들을 통해 마르셀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예술적 영감, 기교가 아니라 ‘창조의 지난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강의 맨 앞에 등장했던 ‘고치고, 또 고치는’ 지난한 과정만이 예술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동성애자 딸 때문에 엄청난 번뇌로 고통스러워하던 음악가 뱅퇴유는 딸의 인생, 자신의 도덕적 편견에 대해 묻고 또 물으면서 악곡을 창조했습니다. 화가 엘스티르의 아뜰리에는 과학자의 실험실 못지않은 창작의 실험 장소였고, 마르셀은 그의 작품에 대해 “‘아버지이신 천주’께서 온갖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셨다고 하면, 엘스티르는 사물에서 그 이름을 없애버림으로써, 또는 다른 이름을 줌으로써 그것을 다시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만드는 창조, 프루스트는 무한히 수련하는 창작 과정을 예술로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예술가의 태도 자체입니다.

  마지막으로 엘스티르의 ‘예술가의 존재론’(『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을 읽으며 강의는 끝났습니다. 이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엘스티르가 어떻게 자기 자신조차도 배움의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엘스티르는 우리가 살아온 불쾌한 기억조차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의 특별함이 아니라, 온갖 경험을 통과하며 우리가 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통찰을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오선민샘의 말씀은 ‘깨달음을 구해서 남겨야 한다. 생각은 머릿속에만 있으면 휘발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남기기 위한 방편인 예술은 오직 자기 수련을 위한 것이다. 누구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무상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매일매일 일관되게 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루라도 중단하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ㅎㅎ

 

다음 주는 마지막 강의입니다. 프루스트의 예술 중 ‘문학’에 더욱 중점을 두고 ‘왜 쓰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고 하셨습니다. 무척 기대가 됩니다. ^^
전체 1

  • 2017-03-01 21:27
    프루스트는 내 맘 속에! 정말 감동스러웠던 시간이었죠. 프루스트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 돌아다니는 여행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 그것은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만이 가능한 길이어서 지난 시간 끝에는 좀 엄숙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작품 읽기의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있네용. 각자 프루스트의 안경을 끼고 본 세상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