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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9-17 20:28
조회
143
170923 동사서독 공지

1. 정신을 기르다

이번에 읽은 [양생주], [각의], [성선]편에서는 ‘양신(養神)’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신을 기르다, 정신을 지키다 등 ‘정신(神)’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요. 이때의 정신은 육체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신(神)은 인간을 설명하는 다른 차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기독교에서는 신(god)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움직이는 인간과 근원을 따로 두는 사고방식이지요. 반면 과학자들은 에너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에너지란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명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증거는 움직이는 인간 자체입니다. 또 과학에서는 세계를 입자와 파동으로 말합니다. 파동은 눈에 보이는 차원이 아닙니다만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관찰자가 세계를 볼 때는 그의 관점에 따라 세계가 입자로서 출현을 하지요. 하지만 파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는 없고 세계가 파동이라고 해서 입자가 단지 환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둘은 같이 가는 것이니까요.
동양에는 신(god)이 없습니다. 비가시적인 근원이 있고 그것이 보이는 작용의 세계가 있지요. 정(精)/기(氣)/신(神)이라는 말은 근원의 측면과 작용의 측면을 모두 함축하고 있습니다. 체(體)와 용(用)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이 있게 하는 근원 도(道)가 있는데, 이것은 작용의 차원에서 보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질적 관점에서 보면 도라고 하지만 작용의 차원에서 보면 각기 다른 개체로 드러나니까요.
우리가 ‘과정’이라고 말하는 움직임은 곧 ‘결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도는 이 세계에 파편적으로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펼쳐지는 작용 속에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성인이 도에 대해 말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쉽습니다. 하지만 정작 도에 대해 미세하게 파 내려가면 성인도 알지 못한다고, 중용에서 말합니다. 도대체 쉽다는 것인지 어렵다는 것인지. 미세하게 알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를 ‘들으면’그만인 것인지...어렵습니다ㅠㅠ
다시 신(神)에 대해 말해보자면, 이것은 양생의 달인 포정이 소를 보는 방식입니다. 그는 눈이 아니라 신(神)으로 소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옳다구나 하고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신(神)은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소를 감각하는 것을 넘어선 차원이라고요. 그런데 여전히 ‘그래서 신(神)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게요. 고정관념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장자의 말을 그렇게 익숙한 방식으로 장자 말로 덮고 넘어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장자는 ‘잊음(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기억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지만 사실 내 몸은 기억으로 움직이지 않죠. 우리는 잊은 채 살아갑니다. 별 생각 없이 길을 나서고 몸이 기억하는 대로 출퇴근을 하고 집을 오가는 것이죠.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잊은 것을 헤집고 그것을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바탕 헤집은 다음 우리는 또 배운 것을 잊어야 합니다. 배운 것이 내 행동이 되는 것, 체득(體得)하는 차원을 장자는 ‘잊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의 삼 단계 같네요. 처음 산이 산인 까닭은 내가 그것을 습관적으로 산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산이 산이 아니게 되는 두 번째 단계는 내가 산이라고 생각하고 실체화 했던 것을 의심하고 성찰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이때는 배운 것을 체득하여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장자는 무지(無知)를 말하면서 대지(大知) 또한 말합니다. 그건 궁극에 가선 무지를 일깨우는 지혜조차 적극적으로 망각하는 체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지(知)의 변증법이라고 하셨지요. 성인은 아이처럼 고정관념이 없지만, 아이와는 다릅니다. 그는 계속해서 외부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헤집고, 다시 그것을 체득하는 자인 것입니다.

2. 억지로 함이 없음

‘무위(無爲)’는 곧 ‘함 없이 함’으로 풀이됩니다. ‘하지 않음’혹은 ‘하지 마’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지로 함이 없음’, 즉 포지티브(positive) 한 방식으로 하는 것만 있음을 말합니다. 채운쌤은 ‘함 없이 함’을 에너지의 잉여를 남기지 않고 한다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억지로 함’은 그 저항이 에너지를 다 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잉여가 남게 합니다. 그리고 결과물은 성기고 힘은 힘대로 써서 힘들고(?)...부정적인(negative) 방식으로 힘을 쓴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힘을 쓰더라도 기쁘지 않고 만족감도 없지요.
자연은 포지티브한 방식으로 힘을 씁니다. 이것은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거나 꽃이 피는 것이 매우 경이로운 생성이면서 에너지를 쓰는 것에 잉여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새싹은 자신이 처한 환경만큼 최선을 다해서 자라나지요. 햇볕과 물을 모두 자신의 것을 전유하면서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양생(養生)이나 정(精)과 신(神)을 보전한다는 것은 사실 갖고 있는 에너지를 꿍쳐두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쓰는 차원일 것입니다.
지금 이 상태, 이 형태를 고정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 매우 ‘억지로 함’이며 부정적인 방식으로 힘을 쓰는 것이죠. 형태를 고정하려고 한다는 것은 나의 변화보다는 ‘내 옆에 있는 사람’, ‘미디어에 비추어지는 불변(不變)의 아름다움’등 타인의 시선 뿐 아니라 ‘더 좋았던 시절의 나’를 신경 쓰며 거기에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좋은 것’뿐만 아니라 반대의 ‘나쁜 것’에 신경을 쓰는 것에도 해당됩니다. 더 나쁜 것에 신경을 쓰며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것은 곧 부정적으로 힘을 쓰는 방식인 것이죠.
니체는 정말 선한 사람은 악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했다고 하죠. 포지티브한 강자의 힘쓰는 방식. 그것은 주변에 무신경하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서 자신이 힘을 쓰는 방식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자연이 그러하듯.


-다음 시간은 내편 [소요유], 외편 [추수]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후기는 지현쌤
-간식은 규창, 완수쌤
-암송은, 2주간 쿤우쌤, 정옥쌤 손에(입에?) 저희 운명을 겁니다 -_-+ All in!!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2

  • 2017-09-18 10:57
    장자나 니체의 공통점은 언어가 참 멋지다는 거죠! 근데 오히려 글 쓸 때 그 멋진 언어에 휘둘리는 것 같습니다. 신(神)으로 본다는 게 뭔지 나름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계속 멈추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의 과정, 참 힘들죠.;; 배움이 체득하는 과정이며 그게 곧 '망각'이라면, 글 쓰는 건 장자의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동반해야 겠네요. 책을 덮고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빡시게 읽어야겠네요....!

  • 2017-09-19 08:50
    ‘김태욱’만 빼고 지들끼리 논다기에 삐쳐서 여기로 들어와 댓글 단다(ㅋ). 요번주엔 ‘망각’과 ‘정신’이 주 테마였구나. 참 끝도 없이 뭔가가 뽑아져나오는 듯한데, 우린 소화불량처럼 체한 상태로 매번 또 그렇게 넘어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ㅠ.
    이번 채움 샘 강의 중엔, 포지티브한 방식으로만 힘을 쓰는, 인간 이외의 것들에 대한 얘기가 확 꽃히더구나. 잉여 없이 자신을 다 탕진해 버리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겸허해하고 또 황홀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다는~~^^.
    그러고, 우리들의 후기를 읽으며 늘 갖게 되는 생각인데, 강의 중에 우리가 들은 것(如是我聞)과 생각하거나 느낀 것(如是我考)이 분명히 구분되어 정리되는 게 우리들의 공부를 위해 나은 방식이 아닐까 싶어. 그게 우리의 생각의 길을 잡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되는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는~~. 물론 나부터가 쉽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