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28. 다른 기쁨이 가능하다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6-17 12:37
조회
536
다른 기쁨이 가능하다

내가 아는 기쁨은 곧잘 슬픔으로 변하곤 한다. 내게 익숙한 기쁨은 질투나 미움, 서운함과 같은 소위 부정적 정서와 정말 다른 것일까. 저 마음들이 정말 별개일까. 생활하다보면 어떤 식이든 저 마음들이 공모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중한 ‘기쁨’을 지키지 못하여 미움이나 슬픔 등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쁨은 분명 증오, 경멸 등의 감정과 한통속일 수 있다.

어디선가 ‘존경’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인간인 한에서 존경을 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좋은 칭호 없는 자에게는 존경도 존중도 보내지 못한다. 또, 이와 같은 존경은 쉽게 반대 태도로 변할 수 있다. 어떤 식이든 내게 ‘손해가 된다’ 싶을 때, 더 이상 ‘내게 이익이 없다’ 싶을 때, 존경의 마음은 순식간에 미움이나 타박으로 돌변할 수 있다. 인생 고통의 원인이라고 여겨버릴 수도 있다.

기쁨에 대해서도 얼마나 다를까. 중기씨의 달달한 미소 앞에서 얻는 기쁨은 같은 것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냉담으로 변할 수 있다.(심한가. 무시 정도로 해둬야겠다.) 떼쟁이 아이는 사탕 하나라도 급히 쥐어야 웃는다.(나는 그렇게 사탕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것을 쥐어야만 아니 쥐어주어야만 가능한 기쁨 밖에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군자의 기쁨은 달라 보였다. 특별한 외부상황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연해보였고 또 관대하다 싶은 점도 있었다. 채운샘은 배움은 기쁨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고 이야기 해 주시기도 했다. 아귀다툼에 추동되지 않고 쉽사리 적대로 돌변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 다른 기쁨이 가능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함께 하는 갖가지 관계들에서 다른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논어》의 첫 구절을 보자. 이 유명한 구절은 배움의 구절이다. 또, 다른 기쁨을 누리는 법에 관한 구절이라고도 할 만 하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항상 그것을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친구(朋)가 있어 먼 곳에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위 구절에는 두 가지 기쁨이 나온다. 하지만 세 가지라 해도 될 것이다. (1) 배우고 항상 익혀 즐겁다. (2)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니 또 즐겁다. (3)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다.

주자에 따르면 '배우고 항상 익히는 일'(1)은 낯선 것이 자기에게 스며 체화되는 과정에서 오는 기쁨을 선사한다. 이 과정에서는 새로 배우는 일 못지 않게 그것을 거듭 익히는 일(習)이 중요하다. 새가 날개짓을 하듯 배운 바를 부단히 익힌다. 씨를 뿌려 곡식이 자라는 일이 땅에서 일어난다면 사람에게는 배우는 것이 익숙해지는 일이 일어난다. 거듭 반복하고, 생각하고, 시도해보는 과정에서 배운 바는 마음에 젖어들고 어느새 체화되어 행동으로 나타나게 한다. 배움의 기쁨은 이 과정에서 샘솟는다.

생각해보면 낯선 마음 하나 찾아오는 것에도 불편해한다. 철통경비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자신에게 익숙한 정서 상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러하니 배우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다. “힘들어. 어색해. 이상해….” 새로 배우는 것들이 일으키는 반응들 앞에서 익히는 일을 멈추는 일은 지금도 반복 중이다.(-.-) 배움의 기쁨을 모른다면 이 때문이 아닐지. 배움이 기쁨을 낳는 것은 그것을 감당하고 견디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없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친구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배움의 즐거움은 친구와 관련되기도 한다.(2)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여기서 친구는 동류(同類)로 주석되어 있다. 무엇인가 함께 도모하는 무리. 그저 친근한 관계 보다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同志)로 풀이한다. 채운샘은 친구가 먼 데서 온다는 것(有朋 自遠方來)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주셨다. 이질성과의 접속이라는 것이다. 먼 데서 온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자라온 토양이 다른 이들… 이 이질적 존재들과 접속한다. 더불어 배우는 일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움의 기쁨은 이렇게나 관대하다.

《논어》의 첫 구절에 대해 쓰고 있으면 역시 세 번째 부분에 가서는 힘이 빠진다. 대강 쓰고 싶기도 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써야지’ 자위해 보기도 한다. 어쨌든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누군가의 말처럼 배우는 일은 자신에게 달렸지만 그에 대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다.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내게 이 구절의 묘미는 ‘어째서 성이나고 서운한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데 있다. 상황이나 대상을 탓할 때조차 근본적으로는 무너진 자기 기대나 바람,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대체 왜, 무엇을 알아주기를 바라나. 그것은 자기 고집으로 관찰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남이 알아주는 일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방식으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범부들에게는 남이 알아주는 것만큼 독이 되는 일도 없다.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어쩌다 누군가 그를 알아주고, 칭송해주고… 이 속에서 어느 순간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법들을 잊어버릴지 모른다.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여기서 군자의 기쁨을 말할 수 있다면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의 기쁨일 것이다.

《논어》 첫 구절 정리는 여기서 마친다. 격몽스쿨에서 이 구절을 함께 읽었을 때 왠지 떨렸다. 다른 기쁨을 만들어내는 실마리 하나를 얻은 것만 같았고, 그런 생각들이 크게든 작게든 공유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능하지 않을까. 쉽게 실망이나 타박과 같은 마음으로 변하는 기쁨 밖에 모르는 지금일지라도 말이다. 오늘은 배우는 공간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위안도 크게 해본다. 정말 다행이 아닌가. 배움을 구하는 자, 분명 언젠가 다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조금씩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격몽스쿨은 일요일 아침 9시 30분에 규문 홀(;;)에서 한다.
전체 2

  • 2016-06-17 18:18
    우왕~ 규문의 '그곳'을 무어라 명명해야 할지 몰랐는데, '규문 홀'이었어! 마자마자, 규문은 홀과 스터디룸 & 키친으로 구성되어 있지ㅋㅋ

  • 2016-06-18 1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