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 향당 8~18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9-18 19:12
조회
189
「향당(鄕黨)」편이 끝났네요. 다시 환기해보면, ‘향당’은 공자가 평소에 어떤 모습, 행동이었는지를 기록한 편입니다. 말하는 것부터 걸음걸이, 얼굴빛 같은 작은 행동, 복장, 식사예절, 친구관계 등 아주 잡다한 내용이 기록돼있죠. 맥락 없이 읽는다면 공자가 너무 깐깐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양씨가 말했듯이, 공자의 사소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모두 도(道)와 부합된 것입니다. 앎은 삶과 분리된 게 아니라는 걸 구절이 아니라는 걸 이 편 전체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정(爲政)」편 4장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이 원하는 걸 따라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향당」편은 이 경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풀어준 것 같습니다.

 

오늘은 크게 (저번 주에 못 다 한) 음식 및 식사, 마을사람들과 나, 군주와 신하관계,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8. 沽酒市脯 不食

 

매매할 수 있는 술과 육포를 먹지 않았다.

 

고주시포(沽酒市脯)는 시장에서 파는 술과 육포를 말합니다. 왜 안 먹었는지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결함을 해치는 인스턴트 식품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일 안하고 나가서 놀고 먹는 걸 금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不撤薑食 不多食

 

생강 먹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적당히 먹었지] 많이 먹지 않았다. / 생강 먹는 걸 그만두지 않았으나 많이 먹지는 않았다.

 

공자는 생강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주석에서는 신명을 통하게 하고, 불순물을 제거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부다식”까지 연결해서 읽으면, 생강을 먹긴 했으나 그렇다고 많이 먹지는 않은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이 먹지 않았다는 건 탐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적당히’란 개념이 없습니다. 맛이 좋으면 더부룩해질 때까지 계속 밀어 넣습니다. 그런 점에서 탐심(貪心)은 생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祭於公 不宿肉 祭肉 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나라의 제사를 돕고 받은 고기를 묵히지 않았다. 집에서 제사를 지낸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았으니 3일이 지나면 먹지 않으셨다.

 

공(公)은 나라의 제사를 말합니다. 옛날에는 음식이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제사가 있고나면 제사의 음식들을 나눠서 배불리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금에게 고기를 받고난 뒤에는 그것을 묵히지 말고 그날 바로 나눠주면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낸 고기는 당일 해결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3일을 넘기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보존이 어려웠으니 3일이 지나면 고기가 썩었다고 합니다. 음식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경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잘해서 이만큼 누린 것이 아니라는 겸손함의 태도인 것이죠.

 

食不語 寢不言

 

밥 먹을 때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지 않았다.

 

식사나 잠자리에서 말하지 않는 건 산만한 생활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먹을 때는 먹기만 하고, 잘 때는 자는 생활은 요즘 찾기 힘들죠. ^^ 저도 자기 전에 스마트폰 만지작만지작.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비록 거친 밥과 볼품없는 국이라도 반드시 고수레를 했고,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하게 했다.

 

여기서 제(祭)는 ‘고수레’입니다.

과(瓜)는 ‘오이’란 뜻인데, 글자를 풀어보면 ‘여덟’ 팔(八) 두 개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과년(瓜年)한 딸’이란 표현을 쓸 때, ‘과년’하다는 건 16살을 뜻합니다. 옛날에는 16살이 여자의 혼기를 뜻했다고 합니다.

주석에는 성인은 먹고 마시는 것을 입과 배의 욕구를 다하는 것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대체로 성인들의 삶은 금욕적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금욕적인 모습만 주목하지, 그들의 금욕이 천리(天理)에 따라 자연스럽게 드러난 모습이라는 것은 보지 않습니다.

 

9. 席不正 不坐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10.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마을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노인이 나가거든 따라나갔다.

 

장(杖)를 ‘지팡이’입니다. 60이 되면 마을에서 지팡이를 줬다네요.

술자리에서 어른이 나가면 바로 자리를 파한 건 술이 지나치게 되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

 

마을사람들이 병을 쫓는 굿을 벌일 때 옷을 갖춰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

 

나(儺)는 역병을 쫓는 굿을 말합니다. 공식적인 제사는 아니고 민간에서 하는 축제 비슷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무당이 귀신에 빙의도 되고 그런 것에서 연극이 기원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조계(阼階)는 동쪽에 있는 섬돌로 보통 제주가 서는 자리입니다. 공자가 조복을 입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건 비록 유희나 공식 제사가 아니었다 해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석에서는 조상신이 놀라지 않도록 그들을 달래고자 서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11. 問人於他邦 再拜而送之

 

사람을 다른 나라로 방문하게 할 때는 두 번 절하고 그를 보냈다.

 

康子饋藥 拜而受之曰 丘未達 不敢嘗

 

계강자가 약을 보내자, 절하고 그것을 받고는 말했다. “제가 무슨 약인지 / 제 몸이 어떤지 알지 못하니 감히 맛보지 못하겠습니다.”

 

미달(未達)은 ‘알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채운쌤은 이해란 ‘거기에 가 닿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다르지(達) 못했다는 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계강자의 약을 먹지 않은 것도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몸 상태가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약이 어떤 약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원래 약은 진맥을 짚고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안 다음에 지어 먹는 것인데, 계강자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약을 보냈기 때문에 약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받는 것의 예의를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받으면 그걸 써야 하고, 쓰지 않는다면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군주의 선물처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을 때는 받더라도 그걸 왜 쓸 수 없는지 이유를 얘기해야 합니다.

 

12. 廐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 傷人乎不 問馬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조정에서 돌아오고 말하길, “사람이 다쳤느냐?”라 했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 “사람이 다치지 않았느냐?”라 했고 말에 대해 물었다.

 

여기서 말은 짐승보다는 재산의 개념입니다. 공자가 말이 아닌 사람을 먼저 물은 건 재산보다 인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뒷부분은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하나는 사람에 대해 물은 뒤에 재산은 어찌 됐는지 묻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不)이 앞에 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않았느냐?”의 뉘앙스를 가진 질문이 되고, 사람에 대해 물은 뒤에 재산에 대해 물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13. 君 賜食 必正席先嘗之 君 賜腥 必熟而薦之 君 賜生 必育之

 

임금이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자리를 바르게 하고 먼저 그것을 맛보았고, 날고기를 내리면 반드시 익힌 뒤에 그것을 제사음식으로 바쳤고, 살아있는 걸 내리면 반드시 그것을 길렀다.

 

侍食於君 君祭先飯

 

임금을 모시고 밥을 먹을 때는 임금이 고수레를 하면 먼저 맛보았다.

 

疾 君 視之東首 加朝服拖紳

 

병이 심해져도 임금이 그를 보러오거든 머리를 동쪽에 두고 조복을 덮고 허리띠를 위에 올려놓았다.

 

君 命召 不俟駕行矣

 

임금이 명하여 부르면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가(駕)는 말과 수레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부르면, 먼저 임금에게로 걸어가고 나중에 수레가 준비되어 따라오면 그때 타고 가는 게 예라고 합니다.

 

14. 入太廟 每事 問

 

태묘에 들어가면 모든 일을 물었다.

 

15. 朋友死 無所歸 曰於我殯

 

친구가 죽어서 안치할 곳이 없으면, 말하길 나의 집에 빈소를 차려라.”라고 했다.

 

朋友之饋 雖車馬 非祭肉 不拜

 

친구의 선물이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제사에 쓴 고기가 아니면 절하지 않았다.

 

붕우(朋友)는 뜻을 같이하는 벗입니다. 15장에서는 벗에 대해 공자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수레나 말 같이 아무리 비싼 재물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친구 사이에 재물을 공유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뭘 선물해주든 그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는 군요. 다만 제사에 쓴 고기에 절한 것은 친구의 조상을 자신의 조상으로 여겨 공경함을 표한 것입니다.

 

16. 寢不尸 居不容

 

잘 때는 죽은 사람처럼 팔다리를 뻗지 않았고, 일상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꾸미지 않았다.

 

見齊衰者 雖狎 必變 見冕者與瞽者 雖褻 必以貌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비록 익숙한 사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얼굴빛이 변하였고, 관복을 입은 사람과 장님을 보면 비록 일상이라 하더라도 예를 갖추었다.

 

압(狎)은 여러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친히 여기다’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친압(親狎)하다는 말도 있다는 군요. 「자한(子旱)」편 9장과 얘기가 비슷합니다.

 

凶服者 式之 式負版者

 

상복을 입은 사람에게 몸을 굽혀 공경을 표했고, 지도와 호적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에게 몸을 굽혀 공격을 표했다.

 

有盛饌 必變色而作

 

성찬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빛을 바꾸고 감사함을 표했다.

 

迅雷風烈 必變

 

빠른 번개와 바람이 사나우면 반드시 얼굴빛이 바뀌었다.

 

신뇌풍열(迅雷風烈)은 ‘이상기후’입니다. 이상기후가 있을 때 낯빛이 바뀐 건 하늘의 분노를 공경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7. 升車 必正立執綏

 

수레에 오르거든 반드시 바르게 서서 끈을 잡았다.

 

車中 不內顧 不疾言 不親指

 

수레 안에서는 내부를 돌아보지 않았고,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18. 色斯擧矣 翔而後集

 

새는 인기척이 있으면 날아오르니 빙빙 돌다가 나무 위에 내려앉는다.

 

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嗅而作

 

공자가 말하길, “산중 다리의 까투리여 때에 맞구나, 때에 맞구나.” 자로가 그것을 바치자 세 번 냄새를 맡고 일어났다. / 자로가 그것을 잡으려 하자 세 번 날개를 치고 날아갔다.

 

18장은 빠진 문장이 있었을 것이다, 착간이다 등등 여러 논란이 있는 장입니다. 주희는 억지로 해설은 못하겠고 듣는 걸 기록하니 아는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왠지는 몰라도 감동적이었어요. 아님 와꾸주의자의 참을 수 없는 절규(?)일까요?

앞의 이야기에 비해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 자체로 멋진 장인 것 같습니다. 배경은 산중, 1부의 주인공은 까투리, 2부의 주인공은 공자와 자로입니다. 까투리가 인기척을 느끼고 높이 날아올라 빙빙 돌고 나무에 내려앉는 걸 보고 감탄한 공자가 말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요, 풍광에 딱 맞아 감탄한 말로 “때에 맞구나!”라고 한 것이 있고, 다른 건 까투리를 노리는 사냥꾼을 보고는 “도망가야지!”라 하며 걱정한 것입니다.

뒤에 자로 부분도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공(共)을 ‘바치다’ 공(拱)으로 보면 자로가 꿩을 잡고 그것을 공자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로는 공자가 “때에 맞다.”는 말을 꿩이 제철이라는 말로 이해한 것이었죠. 다른 해석은 ‘냄새 맡다’ 후(嗅)를 ‘칠’ 격(狊)으로 봐서 “자로가 까투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날개를 세 번 치고 날아갔다.”입니다. 앞의 해석의 일어나는 게 공자였다면, 뒤의 해석의 일어나는 건 까투리가 됩니다. 까투리가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차이일 뿐 자로는 공자의 말을 먹고 싶다는 걸로 이해한 건 똑같네요.ㅋㅋㅋㅋㅋ

 

다음 주는 9시 반부터 「향당」편 복습하고, 상권 끝낸 기념으로 10시 반부터 상권 전체를 반복해서 읽습니다. 간식은 혜원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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