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4월 20일 후기 및 27일 세미나 공지

작성자
현옥
작성일
2017-04-24 13:54
조회
265
물론 짐작은 했었지만 들뢰즈는 역시 어렵네여! 데카르트도 모르고 라이프니츠는 더더욱 모르니, 그들의 사유 위에 전개되는 들뢰즈의 사유를 따라가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식을 절감하고 있습니다요!^^)

스피노자는 참 특이하게도 자신만의 새로운 개념을 전혀 만들어내지 않은 철학자라고 하네요. 실체니 속성, 양태와 같은 개념들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로부터 그대로 가져오지만 그 개념들을 변형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삶의 윤리를 발명합니다. 예를 들어 ‘실체’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흔히 개체라고 부르는 것, 즉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물이나 실재를 지칭하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이 실체개념을 ‘다른 것의 도움이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발전시키지만 무한실체(신)와 유한실체로 구분하고, 유한실체 안에서 신체와 정신을 다시 분리시킴으로써 모순에 빠집니다. 사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이 이원론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요. 본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데카르트는 17세기의 눈부신 자연과학의 발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건 달리 말하자면 우주자연은 수학적(기하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인과성의 세계)라는 얘기인 셈이죠. 그런데 이렇게 전제하고 나면 ‘자유의지’의 여지가 사라지고,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나 神(종교나 신앙)의 자리 역시 없어지게 된다는 거죠. 데카르트는 신의 초월성이나 전능함의 자리를 보존하고 싶었던 걸까요? 결론적으로 그는 연장속성이 지배하는 자연의 인과적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영혼이나 자유의지 혹은 신의 자리)를 따로 만들기 위해 사유속성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무한실체인 신은 이 자리를 위해 요청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리하여 두 속성, 즉 신체와 영혼은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실체가 되었고, 신체의 힘과 정신의 힘, 감정의 힘과 이성의 힘은 차라리 반비례에 가까운 관계가 되어 버렸는데(정념론) 우리 근대인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후예인 셈이지요. 또 하나 데카르트에게는 실체와 속성 역시 분리되어 있습니다. 즉 실체는 존재론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개념적, 인식론적으로는 자립성이 없어서 속성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건데요, 헤겔이 그렇게 생각하고 스피노자를 비판했던 것처럼, 데카르트에게 속성은 실체의 하위개념이 되는 셈이지요. 이런 경우 여러 개의 속성이 더해져서 그 합이 실체가 되는 방식이므로 당연히 수적인 구별 또한 가능하겠지요.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와 속성 개념을 모두 받아들이지만, ‘실체는 자기 안에 있으며, 자기를 통해서 인식되는 것’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존재론적 독립성과 인식론적 독립성을 확립합니다. 즉 정의 그대로 유한실체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실체는 무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 다른 원인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인식될 수 있기에 실체는 원칙적으로 완전히 가지적(인식가능)이라고 표명한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실체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속성을 통해서지요. 실체가 속성을 통해 알려진다는 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와 무슨 차이가 있나 싶지만, 스피노자의 속성은 실체의 하위개념이 아니라 실체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달리 말하면 실체라고도 할 수 있는)이고, 하나의 속성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수적으로 구별되는 각각의 속성들이 모두 있어야 완전성을 표현할 수 있지만(이럴 경우, 팔이나 다리가 하나 부족하면 완전성에서 벗어난 셈이 되고요),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정상성이란 전제 자체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팔 다리(연장속성)가 모두 절단났다고 해도, 사유속성 하나만으로도 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또 속성은 단지 실체를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한다는 것! 이게 아마도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라는 텍스트를 통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지점일 듯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속성이 실체의 하위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할 뿐더러 무한하다는 것은 우리가 삶을 구성하는 방식 혹은 강도에 따라 무한하게 변화할 수 있는 실재적인 가능성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닐까 그저 막연히 짐작해볼 뿐입니다. 은하쌤 얘기처럼 이 텍스트를 다 읽고 나서 서론을 다시 한 번 읽으면, 들뢰즈가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해 ‘표현’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끝으로 스피노자의 실체는 저 하나만으로도 무한하게 신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속성들이 무한하게 모여진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 논리적으로 따져보아도 이런 실체는 우주자연 안에 단 하나밖에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스피노자에게는 더 이상의 가능세계란 없습니다. 전능한 신에 의해 생겨났다가 신의 의지에 의해 어느 날 사라질 수도 있는 그런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며 가능성의 세계일뿐이니까요. 또한 이런 무한한 세계 안에서 수적인 구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속성도 완전하게 신을 표현할 수 있으므로 인간과 다른 모든 것들과의 존재론적인 위계는 없으며, 수적구별이 통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끼리도 물론 그렇구요(물론 이건 요즈음 우리가 얘기하는 ‘민주적 평등’하고는 다른 얘기죠).

양태에 관해서는 할 얘기가 엄청 많아질 텐데,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해보기로 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지난 시간에 읽은 자료(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해제)와 또 하나의 자료를 읽으시고요 서론과 1부를 한 번 더 정리해서 얘기를 나눠보기로 하겠습니다. 양태를 중심으로.

지난 시간 쓰셨던 분들도 공통과제를 한 번 더 써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안 쓰신 분들은 꼭 써오셔야 합니다요!

간식은 정연씨가 준비하시겠다고 자청하셨습니다!^^

재미나게 공부하시고, 즐겁게 만나요~
전체 1

  • 2017-04-25 13:10
    샘께서 쓰신 두편의 후기글을 읽고 아침부터 화락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네요. 늘 세심한 멘토링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