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7/6 스피노자 세미나 후기

작성자
만두
작성일
2017-07-12 14:24
조회
255
데카르트의 자신에 의한또는 자기 원인

 

데카르트에게도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이 있다. 데카르트식 정의는 “실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자기 원인이지만, 작용 원인이 그 결과의 원인이라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 그렇다.”

카테루스와 아르노가 데카르트에게 가한 비판은 위의 ‘자기 원인’이 부정적으로만 이야기되거나 또는 원인의 부재였다. 이것은 스피노자와도 일맥 통한다. 데카르트식 원인이란 그저 <따라서 어떤 것/힘이 있다>는 식의 일반적인 용어이거나 <그러므로 이것 혹은 저것이 아니다>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원인은 (결과) 바깥에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데카르트의 자기 원인에는 원인이 보이질 않는다. 실존의 이유는 기술했다지만 – 신이 형상적 본질을 갖지만 - 왜 신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실존하게 되었는지 작용 원인[본질]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어떤 작용에 의해 있는지 충분 이유를 품고 있지는 못하다는 비판이다.

데카르트는 우리들이 신의 본질의 그 ‘온전한 적극성’에 동의 혹은 그저 따라와 줄 것을 요청하는 셈이다. 즉 신은 작용 원인을 갖지 않는 어떤 형상 원인을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의 작용원인으로는 신을 이해할 수 없기에 오직 원인의 역할과 같은 어떤 유비적인 역할을 하는 신의 본질에 그저 눈감아 달라는 것이다. 신의 본질은 이렇게 유비로 된 형상 원인이라 그 작용 원인 또한 유비적으로만 이해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품고 있는 다의성-탁월성-유비를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아도 그 귀결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분석적인 방법이 도달하는 지점 또는 어떤 한계를 직감하게 된다. “분석적 방법은 자연적으로 유비적인 존재 개념에 귀착‘된다는 한계. 우리는 분석적 방법의 마지막 자리에서 신을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자신에 의한

 

신은 자기 원인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다.(1부 정리25 주석)

 

결과적으로 데카르트는 이 찜찜한 유비 때문에 자기 원인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넘어가는 지점은 위의 정리가 품고 있는 의미처럼 사물의 작용원인과 동일한 작용원인으로의 자기원인이다. 데카르트에게 결여된 그것은 바로 그 자체로 근거 지을 수 있는 원인인 ‘속성’이었다. 자기 원인은 오직 속성들로 인해 그 자체로 획득/도달한다.

속성들은 신의 절대적 본성을 구성하는 내재적 형상적 요소들이다. 내재 또는 형상적이라는 어휘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속성들은 신의 실존을 구성하지 않는다면 신의 본성을 구성할 수 없다. 즉 속성들은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실존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본질을 표현하지도 못한다. 속성들은 그 자체로서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자기 원인으로 만드는 형상 이유를 구성한다. 속성이라는 조건에서 ‘자체 내’, ‘자신에 의해’라는 말은 데카르트의 유비가 아니어도 이제 완전히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신은 속성들 속에서만 실존하고 작용한다. 이 속성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바 그대로 신 밖에 무엇이 아니라 신의 구성요소이고 이를 통해서만 신은 작용하고 실존한다. 따라서 자기 원인은 우리가 알거나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의 그 작용 원인이고 동일한 의미로 말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신의 자기 원인은 형상원인과 작용원인의 통일성을 얻게 된다. 또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과 피조물들의 본질에 함축된 속성 또한 통일성을 갖는다. 속성들의 일의성. 들뢰즈는 이를 원인들과 속성들의 이중적 일의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한마디로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이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 부분(207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 의문은 간과했던 중요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스피노자는 신이 창조한 거라고 믿어왔던 피조물들의 자리를 신의 변양들이자 속성의 양태들로 바꿔버렸다. 또한 내재성의 원리는 우리에게 신이 실존하고 작용하는 원리와 동일하게 우리 양태들도 실존하고 작용한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마치 양태들도 신과 같이 자기 원인인 것처럼. 그럼 너와 나, 이 사물과 저 사물이 과연 유일한 원리/이유로 작용하고 실존하는 같은 것들인가? 양태들의 그 모든 고유한 본질과 역능은 없다는 궤변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일의성에 대한 오해는 “자기 원인과 작용 원인이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양태가 실체와 동일한 존재 혹은 동일한 완전성을 가진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오해다.

속성의 일의성은 “실체는 자체 내에, 변양들은 자기가 아닌 타자로서의 실체 안에서 (형상적으로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속성들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양태들의 본질에 의해 함축됨”을 뜻한다. 그래서 내재성은 일의성의 새로운 모습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재성의 철학은 모든 존재 형상의 동등성에서 따라나오는 실재의 일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를 우리는 종합적 방법이라 부른다. 종합적 방법은 이 공통 존재 혹은 내재인이라고 불릴 원인으로부터 출발한다. 들뢰즈는 “하나의 존재, 동등한 존재, 일의적이고 공통적인 존재의 이론”으로 내재성의 철학을 평하며 이것을 “진정한 긍정의 조건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제일 원인[근접원인]으로부터 출발함이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종합적인 방법임을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떠한 사전지식이나 전제 없이도 바로 철학함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참된 철학의 목표가 우리의 이해 능력을 아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내재된 일의적이고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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