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2.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2-09 19:33
조회
298
이번 주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를 읽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전반부에서 들뢰즈·가타리는 그들이 말하는 ‘소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고 있습니다. 소수성은 <천개의 고원>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몇몇 장에서 다뤄졌었죠.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언어’라는 것, 그리고 ‘문학’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천개의 고원>의 많은 장들은 언어의 문제를 직접 다루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언어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죠. 아마 그것은 언어가 인간과 관련된 것 중 가장 탈영토화 계수가 높은 지층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천개의 고원>에서 저자들은 인간의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얘기했었죠. 언어는 이미 고정된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이탈해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탈영토화된 것은 또한 저자들은 가장 강하게 재영토화 된다고도 했었죠. 생각해보면 언어가 갖는 규정성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견고한 지층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들뢰즈·가타리는 언어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문학은, 특히 저자들이 주목하는 문학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고 언어를 의문에 부친다는 점에서 정치적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문학은 도주의 문제였습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원숭이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들은 ‘자유’가 아니라 ‘출구’를 찾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출구는 주어져 있지 않은, 그러나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만들어내야만”하는 것입니다. 즉 주어진 자유, 주어진 많은 선택지들은 우리에게 출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러한 선택지들은 출구를 가로막습니다. 채운쌤은 세잔을 언급하셨는데, 로렌스에 따르면 세잔의 정물화는 싸움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 재현적인 사과로부터 이탈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결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세잔의 사과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자체가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모든 작품은 실패입니다. 성공했다는 것, 싸움의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졌다는 것은 그자체로 출구 역시 매끈하게 메워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그러고 보면 ‘이번에 에세이를 잘 못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벌써 마음속에 모아 놓고 있는 제가 참 한심해집니다. 좋은 글은 완벽하게 갖춰진 환경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못한 상황과 싸우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쓸 수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쓰는 것. 카프카 역시 바로 이 지점에 봉착해서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프라하의 유대인이라는 독특한 위치는 카프카에게서 언어를 빼앗아 갔습니다. 독일어도, 이디시어도, 체코어도 그에게 주어진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글을 쓸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었습니다. 채운쌤은 이를 외마디 비명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데서 터져 나오는 신음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카프카의 인물들은 결코 자유를 외치지 않습니다. <학술원>의 원숭이가 그랬고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기존의 어떤 영역에도 환원될 수 없는 출구로 빠져나갑니다. 원숭이인 채로 우리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되기’로 탈주해버리고, 노동자의 권리투쟁 대신 벌레로 변이하는 것. 카프카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카프카의 유대인 동료들은 많은 경우 시오니즘으로 빠졌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탄압하는 제국에 대항해서 ‘민족’이라는 또 다른 영토를 수립하는 방식인 것이죠. 그러나 카프카는 주류적 언어로도, 또한 그것에 대항하는 게토의 언어로도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썼다고 합니다.

정리해보자면 소수성이란 어떤 하나의 항이 아닙니다. 어떤 항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흐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소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소수성은 ‘소수자로서 쓰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러한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라면 오히려 쓰는 작업은 수월할 수 있겠죠. 그러나 소수적 글쓰기는 계속 말한 것처럼 불가능성을 목도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인 채로 쓸 수 없는 순간 시작되는 게 소수 문학이겠죠.

소수 문학에게는 주어진 독자가 없습니다. 소수 문학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파울 클레의 표현을 빌어 ‘도래할 민중’이라는 개념을 쓰는데, 소수 문학에게는 항상 주어진 독자가 아니라 도래할 민중이 있습니다. 도래할 민중은 실체화되어 있는 집단이 아니라, 작품과 마주침으로써 변이되고 또 작품을 변이시키는 생성중인 독자들입니다. 장 뤽 고다르는 바로 이러한 도래할 민중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채운쌤이 인용하신 고다르의 말이 너무 멋있어서 숨이 멎는 줄 알았네요.

“나는 이제 대중을 더 잘 존중하기 위해,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시간을 통과했다. 그들을 더 잘 존중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대중으로서 취급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서 그들이 있는 그 속에 존재하는 남자 혹은 여자로서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적 지식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혁명적 지식인이 되는 것뿐이다!”(고다르, 1972년의 인터뷰, 채운쌤 강의안 재인용)

너무 멋있습니다ㅠㅠ. 소수적 예술은 민중을 재현하지도, 갈등의 구조를 재현하지도 않으면서도 정치적입니다. 아니,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이지요. 소수적 예술의 정치성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어떤 ‘정치적’이라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판단되지 않고 ‘어떤 민중을 만들어내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만 판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채운쌤은 작가의 임무는 표현의 도구를 찾지 못한 것들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 실체화 시키지 않고 민중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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