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308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3-04 15:39
조회
233
지난 시간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K는 城이다.

우리가 사는 성 안에는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적 욕망, 그리고 음탕한 포르노그래피와 탐욕스러운 프롤레타리아들이 득시글대지요. 우리는 이를 이러저러한 말들로 정리한 뒤(예컨대 자본주의 사회, 계급화, 성의 상품화…) 그에 대한 타개책을 제시하거나 누군가 제시해주길 기다리기 일쑤입니다만 카프카의 글쓰기는 그와 전혀 다른 길을 걷습니다.
카프카의 성을 처음 접한 많은 독자들은 그곳이 비현실적인 시공간이라고, 그의 글쓰기는 초현실주의적이라고 정리하기 십상이지만, <카프카>를 쓴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그의 글쓰기야말로 바로 지금, 바로 여기를 생생하게 좇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랄 수 있답니다.
채운 쌤 설명은 이렇습니다. — 왜냐하면, 카프카는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생생한 운동을 쓰기 때문이다. 현실의 생생한 작동을 이러저러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소위 리얼리즘 문학이야말로 생과 존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글쓰기랄 수 있다. 생은 특정한 배치 속의 이러저러한 관계에 의해 부단히 작동 중이고, 존재는 그것의 일시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K는 고유한 주체일 수 없습니다. 카프카가 사용하는 K는 언제나 배치의 결과물입니다. K를 지나쳐가고 K를 관통해가고 또 K에 의해 진동하고 동요하는 욕망의 선들에 의해 K는 직조된답니다.
이러한 욕망이 움싯거리는 장소,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동하면서 어떤 것을 무한히 멀어지게 하는 장소, 그것이 성입니다.
K는 성이 아니라면 K일 수 없고, 성은 K(라는 기능function))에 의해 특정하게 출현합니다.
“K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증식하는 일반적 기능이며, 끊임없이 선분화되지만 또한 끊임없이 모든 선분 위로 흘러가는 존재이다. (...) '일반적'이라는 말은 개체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이란 말은 하나의 기능[함수]을 표시하고, 가장 고독한 개체조차 그것이 통과하는 계열들의 모든 항들에 접속되는 만큼 일반적 기능을 갖게 된다. <소송>에서 K는 은행원이고, 이 선분상에서 관리나 고객의 모든 계열과, 또 친구인 엘자와 접속된다. 하지만 그는 또한 체포되었고, 이로써 감시인.목격자 및 뷔르스트너 양과 접속된다. 또 그는 기소되었고, 이로써 정리와 판사 그리고 세탁부와 접속된다. 또한 그는 소송 당사자로서 변호사 및 레니와 접속된다. 또 그는 예술가로서, 티토렐리 및 작은 소녀들과 접속된다 등등. 일반적 기능은 필연적이고 사회적이고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능소, 그것은 관리인 동시에 욕망이다”(<카프카>, 194)

고로 K는 성. 성은 K의 운명.
하지만 이 말이 오해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K의 운명인 성은 고정불변의 장소가 아닙니다. 채운 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성으로부터 달아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안에서 살 것인가다.
그러니까 성은 굴레가 아니랍니다. (우리의 믿음과 달리)자본주의가 현대인의 굴레가 아니듯이.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내 바깥에 있는 억압자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욕망, 나를 직조한 특정한 선분이기도 하니까요.
주말마다 동서양 철학 강의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이따금 새로운 금융상품 안내를 받고 있는 나, 이른 아침에는 고급 스파에서 전신관리를 받고 점심에는 논어를 읽고 저녁에는 자녀들을 학원과 학교에서 픽업하는 나, 맑스 세미나에 빠짐없이 참석해왔지만 실직자인 가족을 내심 이러저러하게 평가하는 나 등등이 우리죠-_-
여기 어디에 외부의 적이 있습니까? 있는 것이라곤 그저 수많은 욕망이 — 더 많은 소비를 욕망하고, 더 높이 성공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것에 슬그머니 권태로워진 욕망, 의아해진 마음, 진저리치는 마음 등등이 혼재되어 들끓는 배치이자 나 자신뿐이지요.
배치는 말하자면 흔히 생각하듯 외부적 환경이 아니라 개체와 내재적 관계를 맺는 요동치고 운동하는 장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을 굴레라 하는 건 정확한 진단일 수 없지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살고 있고, 그것과 더불어 변화할 뿐입니다. 달아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대체 무엇으로부터 달아난단 말인가요? 자본주의 사회의 속물적 욕망은 내 안에 있는데.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그 안에서 살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성과 나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 카프카가 소설을 통해 한 것이 이것이었답니다. 성을 ‘규정’(=재현=과거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무슨 잘난 비판 따위를 하는 게 아니라, 성내에서 분열하고 증식하는 것을 보고 쓰는 것.
채운 쌤 설명에 따르면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한 문학이랍니다. 말하자면 문학은 소수성과 마주쳐야 하고, 소수성을 생성해야 하고, 소수자-되기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소수성, 그러니까 매끈한 말로 포착될 수 없는 미세하고 작은 것들의 생성과 운동. 재현의 방식으로는 결코 출현될 수 없는 어떤 정동. 한 번도 언어의 주체가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들.
고로 필연적으로 권력과 욕망의 문제를 건드리는데, 그것을 주제나 내용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표현 및 문체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이렇게 보면 ‘카프카’라는 이름이 곧 ‘문학’의 다른 이름처럼 여겨지기도 하네요. 카프카는 결코 분석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문장으로 쥐떼와 어린 여자의 외침으로 들끓는 세계를 처음으로 우리에게 열어 보이지요. 그 순간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성을 보게 됩니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움직이는 성, 잡을 수 없지만 분명히 작동하면서 내게 영향을 끼치는, 살아 있는 성을.

채운 쌤께서 루쉰과 마오쩌둥 등을 언급하신 것도 이 맥락에서 인상적이었지요. 루쉰에게 혁명이란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은 실패하므로 언제나 다음 혁명을 불러옵니다. 혁명이 성공을 유지하려 할 때 혁명세력이 곧바로 반동세력이 된다는 것을 숱한 역사가 보여준 바 있잖아요.
혁명, 반혁명, 혁-혁명(^^;) 따위로 어지러운 20세기 초 중국 한가운데에서 루쉰은 그래서, 채운 쌤 표현에 따르면 ‘혁명가가 혁명되어야 할 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묻게 됩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앞선 정리가 이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요. 혁명은, 그리고 혁명되어야 할 것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혁명은 어떤 목적지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고, 혁명은 특정한 상황만을 대상으로 취하는 명사가 아닙니다. 혁명이란 혁명 그 자신마저도 목적어로 취하는 변화무쌍한 동사가 되어야 하지요. 왜냐하면 리좀 안에 수목적인 것이 있으니까. 탈영토화가 곧바로 재영토화로 이루어지니까. 가장 정의로운 선택이 파시즘적 선분과 이어지기도 하니까. 수업시간에 들은 표현에 의하면 “모든 순간은 달아날 수 있는 시간이자 먹힐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하여 루쉰에게 혁명이란 되어가는 것일 따름입니다. 매번 새로운 도주선을 그리며 달리는 것, 매번 고유한 속도를 창안하는 것, 그것이 곧 영구혁명이고 절대적 탈영토화랍니다. 카프카는 자신의 일기와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통해 이를 부단히 해나갔고요.

자, 다음 시간부터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들어갑니다. 아직 진도 사항을 전달받지 못했는데, 목차를 보니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군요. 일단 1부 읽어오심 되지 않을까 싶네요. 167페이지까지군요^_^ (변동될 시 댓글 달겠습니다)

간식은 건화+락쿤쌤께 부탁드려요.

그럼 모두 돌아오는 수요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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