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3.01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3-07 11:29
조회
230
후기가 너무 늦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채운쌤은 지난 강의를 앤디 메리필드의 <마주침의 정치>를 인용하며 시작하셨습니다. 앤디 메리필드에 따르면 “현재의 교착점은 지극히 카프카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곽’이나 ‘보루’는 맑시즘이 전제하는 것과 달리 진영이나 계급 사이에 가로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카프카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시야에 있고, 대개 우리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메리필드는 카프카가 “우리를 자본주의 하에 붙잡아 두고 있는 철저하게 현대적인 갈등을 마르크스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의 세계는 실체 없는 시스템에 의해 작동합니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했던 것처럼 국가는 어딘가에 붙잡을 수 있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절편들을 공명시키는 실체 없는 공명상자로 존재하죠. 카프카는 바로 이러한 사태를, 가두는 자 없이 갇혀있고, 외부나 내부, 권력과 주체라는 이분법적 적대관계가 무화된 세계를 보여준다고 합니다(카프카를 거의 읽지 않고 들뢰즈, 가타리가 말한 카프카를 말하려니 굉장히 어색하네요). 채운쌤은 카프카가 이러한 입구도 출구도 없는 세계 자체가 우리에게 감옥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도주선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카프카를 통해 이야기하는 소수문학은 이미 주어진 계급이나, 주어진 집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집단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소수문학은 ‘소수자’라는 주어진 집단성을 옹호하거나 숭배하고 그들에게 정치성을 부여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죠. 카프카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아직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은 기형들을 기록한 것이며 이 점에서 예술은 시계처럼 가끔 앞서가는 거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술은 분명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무관한 자리에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현재를 반영하는 거울은 아니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미 여기에 있지만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는, 보여지게 함으로써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카프카는 예술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채운쌤은 도주선 역시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이해해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를 읽는 동안 ‘도주선’이라는 말이 지닌 힘 때문인지 뭔가 거대하고 ‘혁명적인’ 대탈주(?)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채운쌤은 도주선이란 ‘낮은 걸음으로 조용히 오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증식시키며 스스로를 확장해갑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분할집단의 증식’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자본주의는 어딘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관계들을 자본주의적 욕망을 경유하게끔 비틀어 낸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것이 모든 자본주의적 분할집단의 폭파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채운쌤은 차라리 그러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그러한 배치를 앞질러서 보여주는 것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일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징후를 읽어내는 것, 욕망을 읽어내는 것. 이것이 소수문학이, 카프카가 도주선을 그리는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배치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배치를 증식시키거나 독특하게 구부리거나하는 관계의 함수로서 존재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에 따르면 카프카의 소설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개체가 채택한 일반적 기능으로서의 K”라기보다는 “고립된 개인조차 그것의 부품이 될 뿐인 다의적 배치의 작동으로서의 K”가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치와의 관계 속에 있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 배치의 함수라면, 우리는 성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성 바깥에 나간다고 해도 그곳은 또 다른 성(배치)일 테니까요.
마지막에 들뢰즈, 가타리는 “내재성의 장을 향한 개방”을 이야기하는데, 채운쌤은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해주셨습니다. 내재성의 장을 향해 나를 개방한다는 것은, 내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가 나라는 것,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주선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에 그릴 수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내재성의 장에 자신을 열어놓은 채로, 어떤 ‘좋은 일’이라는 명분 없이 행하고 자신의 행위를 그대로 감당하는 것이 도주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운쌤은 이번 학기동안 '도주선의 발명'이라는 화두를 들고 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학기동안 어떻게 도주선의 이미지를 구체화해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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