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2. 24 <명암> 수경조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6-12-26 14:34
조회
377
 

오늘 수경조는 수경쌤과 혜원누나만 과제를 해오고 나머지는 안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안 했는지..... 어쨌든 최대한 그날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명암>은 분량이 많은 만큼 인물들의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사실 소세키의 어떤 작품이 세세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포착이 이전보다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물들의 내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토론할 때 먼저 주목한 것은 인물들의 관계였습니다. 쓰다는 오노부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오노부 역시 쓰다가 자신이 바라는 만큼 행동해주지 않아서 못마땅해 합니다.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서로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지 저는 이해가 안됐습니다. 조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모습은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친정엄마가 오면 특히 더 잘해줘야 하는데 상대방이 자기 생각만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노부는 남편을 더욱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고 그런데 또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그렇지 못하니 결국 뾰로퉁해지는 것입니다. 이걸 듣고 저는 사랑이 생각보다 달달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정말 순진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관계들과 얽혀서 더욱 복잡하고 지지부진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에게 못마땅한 이들은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분석하여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상대방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오해하게 되는데, 이런 모습은 <한눈팔기>에서도 나옵니다. <한눈팔기>의 부부도 서로에 대해 못마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암>과 마찬가지로 불평만을 꺼낼 뿐 왜 이렇게 해주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물들의 내면은 마치 내뱉을 수 없는 금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두 작품 모두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명암>에서는 아내의 내면이 보이는 까닭에 또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내의 불만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아내의 불만은 남편의 불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편이 병원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집으로 와서 다급히 아내를 부르는 장면과 요시카와 부인과 만난 이후에 집으로 와서 다급히 하녀를 부르는 장면은 매우 비슷합니다. 서로 잠긴 문 앞에서 다급하게 상대방을 부르는 것은 마치 자신을 달래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상대방이 나오면 그제야 안심하는데, 어쩌면 이 둘 모두 가정, 집이라는 공간은 세상에서 느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곳,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의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인 부부관계에 더욱 목을 매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부부관계에 국한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연애에서부터 성공한 사례라는 것입니다. 연애 자체가 근대로 들어서면서 생겨난 단어인데, 어떻게 보면 새로운 만남의 방식이고 새로운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애 이후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가정이 남아있습니다.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사회에서 해야 할 행동도 정해져 있는 배경에서 연애 때 느끼고 행동했던 것을 고스란히 되풀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연애 때 느꼈던 것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뭔가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작품에서 부부, 연인, 사랑이 등장하니까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글을 쓸 재원누나와 혜원누나 파이팅.

수경쌤이 소개해주신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느낌이 풍겨오는데, 마치 자신과 똑같은 사람, 말 그대로 분신이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도 <명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상대방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파악하려 합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결국 인물이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떻게든 변합니다. 하지만 소세키의 작품은 변화랄 것이 없습니다. 변화를 일으킬 것처럼 갈등이 일어나고 큰 사건이 나타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잠시 한 쪽으로 미뤄둔 채 여전히 인물들은 살아갑니다. 그렇게 거의 모든 작품에서 해결, 변화 없이 일종의 불안함은 항상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들이 변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 했다면 오히려 소세키가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세키의 작품은 대부분이 관계가 난잡하고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명암> 역시 쓰다-오노부처럼 연애에서 결혼에 다다른 세대도 있고, 중매를 통해 결혼한 세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바야시처럼 쓰다의 죄책감을 계속 들춰내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화자가 어떤 인물의 시선을 빌린다고 해서, 그의 내면이 들어난다고 해서 누가 주인공이라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량이 많다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물들이 의미심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난잡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저는 셰익스피어를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소세키를 끝까지 읽고 나니까 왜 그토록 소세키를 많이 얘기하는지 살짝 알 것 같습니다.
전체 1

  • 2016-12-27 11:35
    관계가 난잡하다고? ㅋㅋㅋ 부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부와 쓰다가 연애결혼에 성공한 것이랄 수 있지만, 그게 사랑인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할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 소유욕이고 동시에 과시욕일 수는 있겠지만(시누이 앞에서 자신들의 소통을 자랑하고 싶었으나 좌절하고 만 노부처럼). 암튼 저는 이번 작품에서 유독 등장인물 서로간의 힘 겨루기와 일상의 자잘한 전투를 많이 본 것 같아 아주 흥미로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