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2.24 <명암> 란다조 후기

작성자
gini
작성일
2016-12-26 20:19
조회
325
<명암>은 끝맺지 못한 소세키의 마지막 작품이다. 십 수편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필시 그와 함께 살았는데 백 년 전 그 시대를 이해한 것 같지도, 시대와 분리될 수 없는 소세키라는 인간을 이해한 것 같지도 않다. 작품은 작품대로 소세키는 소세키대로 그렇게 섞이지 않은 채로 끝이 나고 말았다. 작품을 소세키의 현실로 손쉽게 치환하고 그 현실이란 소세키의 관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의 끝은 소세키의 독특성만을 강조하게 될 뿐이다. 독특함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을 그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보편성을 찾아내지 못하고만 읽기는 한 작품 한 작품을 단지 파편화된 이야기로만 취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지막 작품의 후기를 쓰고 있자니 몇 번을 다시 써도 이런 넋두리가 저절로 나오는 걸 피할 수가 없다.

어쨌든 지금은 <명암>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명암明暗이라는 제목에 대한 해석으로 시작한 나는 일단 이 작품이 밝음과 어두움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 첫 느낌이 무색하게, 쓴 공통과제를 다시 읽어보니 내 안의 이분법이 작품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밝음과 어두움은 서로를 전제하고서야 각자의 실존을 보장받는다. 밝음만을 얘기할 때도 어둠은 없는 것이 아니라 밝음이라고 얘기하는 순간 이미 어둠이 함께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건화의 글 속 ‘방랑’과 감자의 ‘거짓말’의 위상과도 일치한다. 어둠을 상징하는 듯 보이는 방랑과 거짓말은 밝음을 대변하는 정착과 진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방랑을 말하는 순간 정착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거짓말 역시 진실과 함께 작동한다. 명암이 그런 것처럼.

방랑을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쓰다가 방랑의 원인을 찾고 정착이라는 진실 찾기를 하고자 할 때, 거기에 필요한 것은 쿄코라는 과거의 연인이었다. 건화는 이것은 ‘타인을 경유해야만 하는 진실 찾기’라고 했다. 감자는 <명암>에 ‘악인’ 아닌 등장인물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너나할 것 없이 모든 등장인물들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쓰다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노부는 자신이 믿고 있는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등장인물들의 거짓말은 결국 어떤 자기여야한다는 자아상으로 모아진다. 그 자아상이 각자가 찾고자 하는 ‘진실’이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등장인물들은 모두 밝은 세계인 진실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밝음은 어둠을, 진실은 거짓을 전제하고서야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명암>의 인물들은 진실을 찾는 자들이라기보다는 진실을 신앙하는 자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현대인들이 아닐까. 진부한 표현밖에 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자기 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있다고 믿는 진실 때문이다.

건화에 의하면 쿄코를 만난 쓰다는 쿄코로부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는다. “몰라도 상관없어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심리작용 따위의 어려운 말은 나도 알 수 없어요. 단지 어제 저녁은 그랬고 오늘 아침은 이래요. 그것뿐이죠.” 진실을 갖고 있을 거라 믿었던 쿄코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진실 같은 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부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자기가 도달하고자했던 사랑, “자신이 이 사람이라고 확신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함으로서 그 사람에게 끝까지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여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적인 자기와 동일하게 사랑에의 추구 역시 목적지가 없다. 분명한 것은 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와 이상 사이에 생겨나는 깊은 함정이다. 현재 쓰다와 노부의 사랑은 왜 사랑이면 안 되는가. 지금의 자기를 왜 부정해야만 하는가.

소세키 평생의 고민이었다고 소심하게 결론 지은 것은 이런 것이다. 서구자본주의의 수혈이 가져온 일본사회와 일본인의 변화. 거기에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밝음이 있었고, 역시 헤어나기 어려울 듯 엄습해 오는 어둠이 또 다른 한쪽에 있었다. 그 어둠을 미워하면서도 밝음을 욕망하는, 부정하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왜 자기 욕망을 부정함으로서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했을까. <명암>이 보여주는 것은 소세키의 마지막 깨달음 같은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세상은 명과 암으로 분리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명암으로 존재한다는 것. 모든 사건의 발생은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를 뿐이다. 자연 법칙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만이 모든 일을 우연으로 받으며, 자신이 겪는 사건에 한에서 자기의 이해관계에 맞춰 선이나 악이라고 판단할 뿐이다.
전체 3

  • 2016-12-27 11:29
    프로포절을 준비하면서 그간 '읽어치운' 책들을 다시 보다보면 조금 더 잡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 주제 두 개 잡아오시는 거 잊지 마셔요 쌤.

  • 2016-12-27 13:20
    명과 암은 함께 존재하고, 끝나는 것은 없고, 진실은 알고나면 몰랐을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런 소세키의 깨달음들이 어떻게 자기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통찰이 될 수 있었을지... 새삼 궁금해지네요...

  • 2016-12-27 22:20
    책은 책대로, 소세키는 소세키대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그대로. 접속하지 않고 꿰지 않고~ 그냥 어떻게 읽었는지 확인하려고 쓰는게 아닌데 매주 느끼는 것은 제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보여주기만 할 뿐인 것 같네요. 소세키와 그 시대를 보고 지금의 시대와 나를 보는 것. 말해놓고도 이제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