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텍스트의 포도밭> 세미나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8-17 15:12
조회
780
“그런데 나는 술에 있어서 취하면 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 나의 주벽이 그러한 것이다. 하니, 내가 『시여취』를 읽고 글을 지은 것 또한 내가 취하여 토한 것이다.”(『낭송 이옥』, 21쪽)

뜬금없는 인용이지만, 이옥에 따르면 읽기는 책에 취하는 것이고 쓰기는 취하여 토하는 것입니다. 그는 “글이 사람의 내장을 적시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흥겹게 하는 것이 마치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하면 저절로 토하게 되듯, 책에 만취하면 글을 뱉어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제가 무엇 때문에 글을 잘 쓰지 못하는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저 스스로가 어떻게 읽고 있는지는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옥의 말대로 책에 취해 저절로 토하는 것이 글쓰기라면 ‘쓰기’를 고민하기에 앞서 ‘읽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술에 취하지도 않고 왜 토가 나오지 않는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겠습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읽기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도 제가 이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았으니 스스로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일리치는 12세기로 돌아가 테크놀로지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읽기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읽기 습관이 12세기에 새로 발명된 몇 가지 테크놀로지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때 읽기 새로운 습관의 형성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행위가 어떻게 새롭게 규정되었는지를 조명합니다.

일리치는 주로 후고를 언급하면서 12세기 이전의 읽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가장 크게 드러나는 차이는 당시의 읽기가 굉장히 신체적인 활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읽기는 기본적으로 중얼거리는 행위였습니다. 지금처럼 텍스트를 눈으로 읽고 거기서 정보나 의미를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텍스트를 씹고 맛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텍스트가 지닌 빛으로 자신을 비추고 자신을 치료하는 것. 이러한 읽기가 후고가 『디다스칼리콘』에서 입문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읽는 행위이며, 일리치가 ‘수사식 읽기’라는 이름 붙인 방식입니다.

수사식 읽기와 ‘학자식 읽기’, 그리고 수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로의 이행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테크놀로지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이 부분에 대한 감이 좀 덜 왔는데, 세미나 때 채운쌤이 그림을 가지고 설명해 주셔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채운쌤은 몇 가지의 기술이 발명되기 전과 후의 필사본을 보여주시며 설명하셨습니다. 이전의 필사본은 우선 띄어쓰기가 없고 무슨 내용인지를 쉽게 알게 해주는 문양도 없으며, 인용한 구절에 대한 구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필사본은 소리 내어 읽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때에는 소리 내어 읽기 이전에 텍스트에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읽는 과정을 통해서 의미를 현실화 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과정이 곧 ‘자아’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는 점입니다. 일리치가 말하는 알파벳 색인, 레이아웃, 그리고 채운쌤이 보여주신 그림에 나타나는 띄어쓰기 등의 기술들은 텍스트에 정보나 의미를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중얼거리며 읽는 행위에 의해서 텍스트의 의미가 현실화되고 그것이 읽는 이에게 신체적으로 작용했다면, 이제 우리가 읽지 않아도 텍스트 안에는 의미나 정보가 언제나 그대로 담겨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지요. 이에 따라 인간은 안정되고 일관된 자아를 갖게 됩니다. 이제 말하는 행위와 별개로 생각은 글로 고정되고 기록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과거에 거래를 어떤 맹세나 의식을 통해 확정지었다면 이제 거래는 기록을 통해서, 계약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읽기는 점점 더 후고가 말하는 “책과 나누는 대가 없는, 축제적인 교류, 자유 시간의 한가로운 교류”가 되기 어려워졌습니다. 학자식 읽기는 책에 담겨있는 의미를 추출하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이제 읽기를 경건함과 곧바로 관련시키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후고가 말했던 렉티오 디비나(경건한 읽기)는 이제 보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종교적인 의미에만 한정된 것(기도, 렉티오 스피리퇄리스)으로 축소됩니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읽기와 관련된 테크놀로지는 또 한 번 완전히 새롭게 변했고, 이로 인해 읽기 역시 전혀 새로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리치가 『텍스트의 포도밭』을 쓴 것도 그러한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 때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지만, 컴퓨터나 인터넷의 영향은 우리의 읽기를 또다시 바꾸어 놓았습니다. 채운쌤은 정보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짐에 의해서 쌤의 쓰기 습관이 달라지는 것을 많이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뭔가를 쓰기 위해 책을 찾고 그것을 하나하나 읽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인터넷에 널려있는 수많은 정보들로 그러한 시간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변화는 유용함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시간을 견디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운쌤이 자주 말씀하시지만 어떤 텍스트 하나에 접근하기 위해서 그 주변 맥락을 이루고 있는 다른 텍스트들을 거쳐 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저는 그런 식의 접근을 시도해 본 적도 없거니와 제가 그런 더딘 과정을 견딜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경쌤이 던지신 질문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에 맞는 새로운 공부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리치가 보여준 것처럼 기술의 발명이 동일한 읽기 행위의 진보는 아닙니다. 수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로의 변화는 인간의 읽는 행위 자체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의 변화와 별개로 수사식 읽기를 고집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리치가 후고를 주목한 이유는 그가 수사식 읽기와 학자식 읽기의 분수령에 있었으며,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고는 수사식 읽기의 정점에 있으며, 동시에 학자식 읽기, 즉 소리나지 않는 읽기 방법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이고 명시적인 진술”을 남긴 사람입니다.

채운쌤은 “이반 일리치가 주목하는 것을 바로 그 균형감각”이라고 말씀하셨죠. 일리치는 “텍스트 중심의 책이 출현하고 학자적 읽기가 지배적으로 되어가는 분수령에서, 그 경향에 무작정 휩쓸려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줄 알았던”(채운쌤 글) 후고의 균형감각을 주목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몹시 필요한 능력인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서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모든 사람을 분수령에 위치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컴퓨터나 인터넷의 존재가 당연한 세대지만,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만지며 자란 세대는 저와는 또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겠죠. 지금에 와서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도는 인간들이 거기에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기술에 쉽게 이끌려가고, 더 쉽게 젖어들게 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떤 분수령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후고가 가졌던, 일리치가 주목했던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혜원누나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미나 때 혜원누나의 증언은 모두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누나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읽는 것과 종이책으로 읽는 것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읽는 게 더 편하다’도 아니고, 차이를 못 느끼겠다니... 이것은 신인류? 외계인?

아무튼 이번 깜짝 세미나는 저 자신의 읽기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읽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벌어지는 일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무지한 것 같습니다. 일리치가 12세기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채운쌤은 세미나 말미에 중세 사람들이 책에 접근하는 방식이 종교적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때의 종교적이라는 말을 어떤 절박함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일리치의 책에서도 드러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책에 대한 경건한 태도는 저의 읽기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는 그저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 기대를 다 배제하고도 읽기를 지속할 수 있는 책에 대한 저 나름의 경건한 태도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저 나름의 절박함, 경건함이 없이는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쩐지 쓸데없는 책 정리와 제 얘기만 늘어놓고 세미나 분위기를 전달하지 못한 것 같네요. 다른 분들도 후기를 올려주실 예정이라고 하니까 제가 놓친 부분을 써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쓰겠습니다.
전체 2

  • 2016-08-17 15:28
    혜원이는 이렇게 외계인으로 증명된 거?ㅋㅋㅋ

  • 2016-08-17 15:40
    나랑 같은 종이라기엔 살이 너무 하얗고 포동포동하다 싶더니만 그 아래 에일리언이 있었군~ 평소 반쯤 장난으로, 잘 안 읽히는 책에 대해 번역을 탓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책 읽기란 곧 신심을 갖지 않고선 안 될 일. 암호문처럼 보이는 류의 어떤 책들(들뢰즈 같은? ^^;)이야말로 미지의 포도밭을 거니는 기분으로, 직접/맘껏/경건하게 내 감각과 기술을 총동원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았네요. 어서 다른 분들 후기도 올려주셔요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