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텍스트의 포도밭』 수업후기

작성자
김봉선
작성일
2016-08-23 23:08
조회
964

2016.08.15./깜짝 세미나 수업 후기


『텍스트의 포도밭』


작년 세미나를 하면서 나에게 쉽게 읽히는 책과 읽기가 어려운 책은 무엇 때문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쉽게 읽히지 않는 책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 즉 내가 옳다고 믿는 내용은 기억에 남는다. 텍스트가 나의 믿음과 멀어질수록 기억에서도 멀어진다.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과 유사한 내용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읽기는 기존에 믿음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이루어 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면 읽는 행위는 습관적으로 하는 다른 행위와 무엇이 다를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은 읽기에 대한 텍스트이다. 12세기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을 해석하면서 보여준 중세 수도원의 수사의 읽기는 우리가 아는 읽기와는 거리가 멀다.  띄어쓰기가 없어서 소리 내서 읽지 않으면 읽기 자체가 안 되는 양피지 위에 글자들,  읽기 위해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속했던 공동체를 벗어나야 하는 것,  읽는 사람이 양피지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 등.  수도원의 수사들이 읽기는 생활이고 목표이다. 신(지혜)을 안다는 것은 읽는다는 의미이다. 신을 아는 데는 누구도 차별이 없다. 권위는 말씀에 있는 것이지 읽는 사람에게 있지 않았다. 듣는 것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들었다.

‘질서를 잡는 다는 것은 신이 창조 행위 때 확립한 그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조화를 내면화 하는 것이다. ‘ 질서를 잡는다’라는 것은 미리 생각한 주제에 따라 지식을 조직하거나 체계화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읽는 사람의 질서가 이야기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읽는 사람을 질서 안에 집어넣는다. 지혜의 탐색이란 우리가 페이지에서 만나는 질서의 상징을 탐색하는 것이다.’

‘후고가 주장하듯 성직자든 평신도든, 어떤 것도 의미 없는 것이 없는 똑같은 세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하느님을 이야기하며,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을 가르치며, 자연의 모든 것이 그 본질적 형상을 재생산 한다-우주 만물 가운데 불임의 것은 없다”’

현재 읽기는 학자나 책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행위 중 하나이다. 12세기 수도원의 수사들처럼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된다.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단어들 사이에 여백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눈으로 붙잡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서술의 흐름은 이제 문단으로 조각조각 나뉘고, 그 총합이 새로운 책을 구성했다’. 시편 전체가 한번의 여백도 없이 연결된 알파벳에서 이제는 알파벳에 따른 색인과 목차, 단어 사이에 여백, 한눈에 보기 좋은 레이아웃까지 주어짐으로 읽는다는 행위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졌다. 이반 일리치는 인쇄술의 혁명보다는 오히려 이런 물질적 상태의 변화 즉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근본적인 변화로 보았다. 이런 변화는 신의 만든 질서에 자기를 편입시키는 읽기에서 우리의 정신구조 안으로 텍스트를 편입시키는 읽기를 만들었다.

‘이제 저자가 오르디나티오(ordinatio, 배치의 질서)를 제공하는 일을 떠맡는다. 저자 자신이 주제를 고르고, 부분들을 다루는 연속체 안에 자신의 질서를 집어넣는다. 눈에 보이는 페이지는 이제 말의 기록이 아니라 생각을 거친 주장의 시각적 표현이다’

텍스트는 상대방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 변했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나 해석도 읽는 사람 마음대로이다. 아는 만큼 보고 그 이상 진적 시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주장일 뿐이니까.  읽기가 개인보다 더 큰 질서로 편입이라는 관념을 무시하고 나서 얻은 것은 알고 있는 사람하고, 알고 있는 내용만 반복해서 이야기 한다고 할까(--;;).  나의 읽기 문제가 책을 성실하게 읽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기본 전제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읽기는 읽기가 없는게 아닐까

‘페이지가 눈에 보이는 텍스트를 낳은 뒤에야, ‘충실한 신자’가 도덕적 자아와 법적 인격을 낳은 뒤에야, 그 사람이 말하는 방언이 ‘하나의’ 언로로 시각화될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한 개인으로 이해되는 자아와 페이지에서 텍스트의 출현 사이의 특별한 일치’가 나타나는 것은 12세기 중세 수도원의 수사의 읽기에서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말한다.
『텍스트와 포도밭』이란 놀라운 텍스트에서 특히나 놀라운 부분이 ‘읽기’에서 ‘도덕적 자아와 법적 인격’을 이끌어낸 것이다. 자아라는 것, 내면이라는 것이 이토록 역사적인 것이라니 이토록 작은 일에서 출발 했다니 그저 놀라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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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6 15:12
    다음 번에도 또 깜딱~ 세미나 띄우면 오실 거죠? ^^ 우리, 이번 학기 절탁에서는 모쪼록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또 읽는 것으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