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5월 19일 깜짝세미나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5-24 22:16
조회
172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는 한국작가들이 쓴 세 편의 단편소설(『코끼리』, 『갈색 눈물방울』, 『바다와 나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국 소설(사실은 소설 자체)에 대해 무지한데다가 현대소설을 읽고 세미나를 할 기회는 더더욱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그 자체로 흥미로웠습니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에 비하면 조금은 단순하고, 촌스럽기도 하고, 윤리적인 고민도 부족한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또 그렇게 때문에 이번에 읽은 세 작품에 대해서는 좀 더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은 발제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스컴샘은 이번 세미나 발제를 맡으신 수경 샘의 글을 읽고 다음에 예정된 강의가 필요 없다고, 본인이 하려던 비판이 발제문에 다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죠.) 발제문의 주장은 우리가 읽은, 이주문제를 다룬 세 편의 소설이 모두 ‘환상소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세 소설이 ‘환상소설’의 정의(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에 들어맞는다는 주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세 작품이 모두 ‘환상성’을 끌어들여 작품의 소재가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이 핵심적이었습니다.

『바다와 나비』의 경우 결말부에 나오는 ‘나비’와 관련된 환상은 한국으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는 조선족 여성 ‘채금’과 채금의 아버지가 들려준 공개처형에 관한 기억, 심지어는 ‘중국’이라는 독특한 공간조차도 다 지워버리고 온통 남편과의 문제에 메여 있는 ‘나’의 자의식만을 남겨놓습니다.

『갈색 눈물방울』의 경우에는 결말부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공은 실어증으로부터 빠져나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스리랑카에서 온 이웃집여자는 치질이 완치되어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또 번개에 맞아 휠체어 신세를 지던 할머니는 갑자기 자기 발로 일어섭니다. ‘나’는 이것을 ‘빌라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때 ‘기적’은 이웃집의 이주민들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즉 엉덩이의 치질처럼 말끔하게 치워지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코끼리』에는 가구공단 근처에 모여 사는 이주노동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한국어에다 러시아어와 영어, 네팔어”까지 다양한 언어들이 뒤섞여 있는 이들의 대화는 한국어로 바뀌어 열세 살 소년인 ‘나’의 고막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이러한 초언어적 소통에 의해 유창하게 번역된 이들이 대화는 이주민들의 타자성을 지워버리고, 동시에 한국인인 작가와 네팔인과 조선족 사이의 혼혈아인 주인공 ‘나’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감추어버리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많은 분들은 제발트의 작품과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 읽은 작품들은 제발트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소설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발트는 홀로코스트라는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재현하거나 대변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사건을 기억한다고 하는, 거의 고행에 가까운 작업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는데(저는 『이민자들』의 화자들이 누군가의 기억을 추적하는 방식, 그리고 막스 페르버의 회화 기법인 ‘덧칠’이 제발트가 소설을 통해 하려고 하는 작업과 겹쳐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세 편의 소설에서 작가들은 ‘사건’에, ‘문제’에 너무나 간단히 접근하고 때로는 경솔하게 재현하고 있었습니다(특히 『코끼리』에 대해서 수경샘이 지적하신 ‘고통의 요약’).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재현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어의 빈곤함이 오히려 클리셰적인 과장과 유창함으로 드러난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러한 세 작품들의 매끄러움도 이주민 문제를 포착해낼 언어의 빈곤함을 증명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많은 분들의 ‘치질론’이었습니다. 『갈색 눈물방울』에서 ‘나’와 이웃집여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스리랑카에서 온 이웃집 여자가 앓고 있던 치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치질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놓고 많은 말들이 오고갔습니다. 알 수 없는 웃음과 함께 치질의 고통에 공감하신 분이 계신가하면, 치질은 어떤 소통의 차단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또 소설 속에서 ‘나’는 몇 번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의 고통’의 순위를 새롭게 매기는데, 처음에 그것은 ‘치통’이었고, 실연을 겪고 난 후에는 ‘실연의 아픔’이 되었으며, 이웃집여자의 치질을 목도한 뒤에는 ‘치질의 통증’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치통’은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고통이고, 실연의 아픔은 나만이 아는 고통이며, 치질의 통증은 수치심을 동반한 숨기고 싶은 고통이라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점점 더 타인과 나누기 어려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웃집 여자가 느끼는 치질의 통증을 ‘나’가 공감한다는 것은 어떤 소통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다고 설명해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세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난쏘공』과 같은 70~80년대 노동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70~80년대 노동소설의 문법을 그대로 가지고와서 원래 핍박받는 노동자들이 있던 자리를 이주 노동자들, 불법체류자들로 대체했을 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들에 ‘이주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었지요. 또 이주와 관련해서, 소설들을 읽으며 ‘이주민’이란 자신이 살던 땅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마음과 그러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양가적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주라는 문제와 지금 우리의 일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이주노동이라는 소재는 포착하고 형상화하기 어려운 소재인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다와 나비』의 구도가 흥미로웠는데, 소설 속에서 아들을 ‘세계인’으로 키우겠다며 자발적으로 중국으로 향한 한국의 중산층 ‘나’와 ‘한국인’이라는 범주에 편입되고자 알지도 못하는 중년 남자와의 결혼도 마다하지 않는 ‘채금’이, 채금의 어머니가 ‘나’에게 맡긴 돈에 의해 연결 됩니다. 재밌는 건, 이들이 만난 장소가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부침을 겪는 쪽은 ‘나’가 아니라 ‘채금’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인 상점에서 우연히 만난 채금과 ‘나’는 함께 쇼핑을 하게 되는데, 이때 채금은 ‘나’가 집어든 물건을 가리키면서 “이런 건 한국에서 뭐라고 해요?”하고 묻습니다. ‘나’는 채금의 서툰 한국어를 굳이 지적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죠.

저는 이 작은 장면이 채금과 ‘나’가 각각 놓인 자리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나’가 말하는 것처럼, 채금은 이제 한국으로 가서 언어의 문제만은 아닌 많은 일들을 겪게 되겠죠. 거기서 채금은 언어의 부침으로 상징되는 온갖 어려움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는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박탈감을 느끼고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직면하게 될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에 비해 ‘나’는 어딜 가도 자기 자신만을 마주합니다. ‘나’는 자신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기로 되어있던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중국어 한 마디 하지 않고도 모든 필요한 일들을 처리합니다. 중국에서 맥도날드를 ‘마이당로’라고 부르고 햄버거를 ‘한바우’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다른 것은 그것을 호칭하는 방식뿐” ‘나’는 어디서든 동질성만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자의식에 허우적대며 멜랑콜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한국으로 들어가려는 채금과 한국으로부터 빠져나온 ‘나’. 그들의 욕망과 운명은 다른듯 닮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희망은 없다’(by 한스컴)는 것입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행을 기다리는 조선족 이민자 채금에게도, 온갖 지리멸렬한 문제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중국으로 도피해온 ‘나’에게도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희망은 없었지만 대신 한스컴샘이 계셨습니다^^; 한스컴선생님 뿐만 아니라 문학을 전공하신, 또 전공하지 않으신(?) 많은 뉴페이스분들과 함께하는 세미나는 어쩔 수 없이 동반된 약간의 긴장감까지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열린 세미나를 자주 열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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