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9월 18일 수업 후기

작성자
潤枝
작성일
2017-09-22 07:38
조회
2638
안녕하세요. 9월 18일 불교와 글쓰기, 맛지마니까야 2강 늦은 후기입니다. ^^;

저희는 첫 시간에 보았던 영상물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씩 나누며 수업을 시작했는데요, 과학과 영성, 고대와 현대, 서양과 동양을 넘나들며 inner worlds 와 outer worlds를 보여준 영상을 대부분의 샘들이 흥미롭고 인상적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의 위기가 ‘의식의 위기’라는 점에 채운 샘은 깊이 공감한다고 하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들,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이러한 부조리를 둘러싼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장, 내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또 다른 부조리를 생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샘의 말씀에 저도 깊이 동감했습니다. ^^

파동의 세계
Inner worlds, outer worlds 에서도 다루어졌듯이 세계의 본질은 파동이라고 합니다. 이 본질적인 차원이 어떻게 붙들리느냐에 따라 입자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입자는 유(有)의 세계이고 파동은 무(無)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 두 세계를 모두 아우르며 넘나드는데, 공(空)은 세상을 파동적으로 보는 것이고 화엄의 사상에서는 아주 섬세하게 유적 세계를 묘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소위 ‘원자론’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 사이에 우리의 관계가 있고. 이렇게 너와 나라는 고정된 주체를 지우고 관계 자체를 사유하지 못하면 뭘 공부해도 돌파할 수 없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ㅠㅜ 그럼 대체 존재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번뇌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 번뇌(苦)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불교 공부의 핵심입니다.

()란 무엇인가
붓다는 인생이 고(苦)라고 해서 허무주의자라고 오해를 받았다고 합니다만, 사실 붓다의 위대한 깨달음 중 하나는 이 세계가 둑카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의사가 병의 징후를 파악하고 병과 병의 원인을 병자에게 이해시키듯,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즐거운 일이 있으면 삶이 괜찮다고 생각하다가 나를 즐겁게 해주던 그것이 사라지면 고통스럽다고 느낍니다. 행복하다가 고통스럽다가를 반복하면서 고통을 어떻게든 해결해서 없애려고 합니다. 고통의 원인이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붓다가 말하는 고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행과 불행이 끊임없이 나뉘는 상태 그 자체를 말합니다. 다름 아닌 내 안에서 조건 지워져 일어난 마음이 행과 불행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행과 불행의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오온(五蘊)에 대한 이해
고가 무엇이고 왜 생겨나는지 불교에서는 오온을 가지고 이해합니다. 온(蘊)은 집적되어 있고 뭉쳐진 것, 입자화 된 것입니다. 파동은 뭉쳐져 있지 않고 흐릅니다. 육체를 가진 붓다도 느낌이 있지만 붓다에게는 느낌이 쌓이지 않고 바로 사라집니다. 그냥 흘려보냅니다. 우리는 느낌이든 무엇이든 무더기로 쌓아놓고 쥐고 있습니다. 이렇게 덩어리진 것을 유(有)라고 하지 않고 온(蘊)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원래 실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들을 실체라 보고 여기에 집착하는데 바로 이 오온에 대한 집착이 붓다가 설명하는 괴로움입니다.

물질과 정신의 다섯 가지로 나뉘는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각각 물질의 무더기,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상카라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를 의미합니다. 지난 학기에도 공부한 내용인데 어찌된 일인지 또 새롭게 느껴져서 ^^; 다시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색온(色蘊)은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지닌 상반된 기운 (지의 단단함과 확장성, 수의 응집과 유동성, 화의 뜨거움과 차가움, 풍의 운동성과 안정성)이 결합된 것으로 이 요소들이 흩어지면 물질은 사라집니다. 수온(受蘊)은 우리의 감각기관(예: 눈)과 감각대상 그리고 본다는 것을 떠올리는 식(識)의 세 요소들이 뭉쳐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없어도 우리는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내 눈이 있어서 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본다는 것 자체가 조건적으로 발생하는 연기입니다. 내가 본 느낌이 어떠한 이미지나 인식을 형성하는가는 상온(想蘊)입니다. 이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한 앎’으로 정의되는 서양의 인식과는 다릅니다. 불교에서 볼 때 대상을 어떤 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인식은 불안정하고 연기적입니다. 인식은 전도되고 왜곡되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이로부터 세상을 설명하고자 만듭니다. 따라서 이 인식이 생겨나게 된 조건이 무너지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행온(行蘊)은 욕망, 충동, 경향성... 등 행위에 따르는 업을 말합니다. 드러나는 행위 자체가 아닌 요만큼이라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했느냐가 업의 관건이 됩니다. 마지막 식온(識薀)은 개념과 사고, 즉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아무리 감각을 하고 접촉을 해도 어떤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그에 대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이러한 오온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 어떤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고 싫다고 느끼는 것도 그 출발점이 감각기관과 대상과 식이 결합된 연기적 사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내가 불쾌한 것을 ‘너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고는 우리의 왜곡된 인식 때문에 생겨납니다. 불교는 고의 원인을 대상에서 찾지 않고 바로 이 오온의 현상에 집착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봅니다.

채운 샘께서 오온과 고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니 이제야 좀 감이 잡히는 듯합니다. 제게는 불교 공부가 경전을 읽고 공부해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듯 항상 새로운데, 채운 샘께서 해주신 강의 덕분에 흩어지는 개념들을 조금이나마 온(蘊)으로 붙잡을 수 있는것 같습니다. ^^;  맛지마니까야 열심히 읽으시고요, 담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2

  • 2017-09-22 15:58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저의 키워드 중 하나는 '견해'입니다. 꺄웅. 일시적인 지각과 인식에 의해 포착한 좁다란 세계를 전부라 믿고 거기에 나를 걸고 아등바둥... 이걸 쳐부수기 위해 이번 학기를 성실히 임하고 싶네요. 이제나 저제나 후기 올라오기만 기다린 1인, 즐겁게 읽고 갑니다^_^

    • 2017-09-22 20:16
      수경샘의 한 줄 코멘트가 저의 주저리 주저리 후기보다 낫네요! ㅋㅋ
      후기 늦어져서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_ _)
      이번 주에 일이 몰려서 사이사이 앉을 틈만 나면 후기로 끙끙 댔는데 그것이 며칠이나 걸렸다는 부끄러운 고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