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니체 5주차 후기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17-08-27 14:15
조회
141
1. 철학은 질문의 방식 :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저는 철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철학’이 참 골치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일단 쓰는 용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인데요. 철학의 기본은 개념 정의이므로,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렇게 본질을 묻는 질문은 본질이 아닌 것들을 열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공간인 현실도 본질 이외의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죠.

니체는 기존 형이상학의 질문을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로 비틉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는 ‘그것은 누구의 선인가? 누구의 악인가?’로 바뀝니다. 이렇게 질문했을 때, 고독은 어떤 사람에게는 병든 자의 도피이고,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병든 자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약자에게 고독은 병든 자의 도피고, 강자에게는 약자(병든 자)로부터의 도피인 거죠. 니체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보편타당한 진리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철학은 질문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나의 철학 공부 : 나를 매개로 해서, 인간을 보라

공부를 시작하고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자기만의 질문을 가져라’, ‘질문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아무리 유념해도 ‘질문’은 잘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잡다한 궁금증만 생겼다 사라질 뿐이었습니다. 에세이를 써도 매번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고, 내 자리에서 계속 코끼리 코를 붙잡고 맴돌기만 하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간에 선생님이 그 실마리를 풀어 주셨네요.

자기로부터 인간을 보려하지 않고 자기를 보려하기 때문에 자기비하로 빠진다는 말씀. 저는 니체가 미덕에 대해 비판하면, 그것을 내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느끼고 열심히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니체는 그런 미덕을 숭앙하는 개인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웃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포인트, 연민의 대상을 약자로 만들어 버리는, 즉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하면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깃들어 있는 것,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봐야 합니다. 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자기를 매개로 해서 인간적인 것을 봐야 합니다. 넘어가는 건 ‘나’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가치들, 즉 인간의 가치이며, 시대의 가치이기도 한 것들입니다. 개인의 무의식은 사회의 무의식이기도 합니다. 생명, 동물, 인간, 21세기를 살아가는 나.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라는 인간을 구성합니다. 나와 세계가 확장성을 갖지 않으면, 내 안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3. 영원회귀의 존재론적 차원 : 차이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존재라는 고정불변의 것이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우리는 ‘존재’를 어떤 것이 끊임없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라는 것이 유지되려면, 생성, 소멸,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동일성을 이야기할 때는 안정과 질서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불안정과 무질서를 안정과 질서의 결여 상태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일성이라고 믿고 있는 건 사실은 안정적인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준안정성’이 아닐까요? 사실, 모든 안정적인 건 바다 위의 섬과 같은 것입니다. 본질은 준안정적인 흐름들입니다. 그 흐름들 속에서 일시적으로 멈춘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흐름의 다발들입니다. 흐름의 다발들이 모여 있는 준안정적인 상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동일하지 않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인 질서야말로 무질서가 만들어내는 특정한 상태입니다. 존재가 있어서 이러한 생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의 결과가 존재입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 생성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동일성을 유지합니다. 생성을 멈추면 물질세계는 끝이 납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성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생성이 계속된다면, 즉 생멸이 거듭된다면, 생로병사, 애별리고의 반복만이 삶이라면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뭔가 다른 것이, 살다 보면 뭔가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어야 사는 의미가 있을 텐데 그런 것 없이 산다는 건 그저 삶을 견뎌야 한다는 것일까요? 삶은 특별한 의미도, 목적도 없고, 태어난 이상 어차피 죽을 것이고, 게다가 이 생멸은 계속 반복될 텐데.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 끝없는 반복이 두렵고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사람들에게 허무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생은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될 거라는 허무주의 말입니다.

4. 영원회귀의 윤리적 차원 : 생에 대한 긍정

삶과 죽음이 끝없이 반복되는 게 영원회귀입니다. 생로병사가 자연의 이치라면, 내게만 그것이 비껴가길 바라는 건 세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욕심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고통 없는 삶, 최소의 고통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윤리적 태도란 고통 없는 삶을 원하는 게 아니라, 내게 고통이 왔을 때 그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냥 지나가는 건 감당이 아닙니다. 생을, 고통을 감당한다는 건 그것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배우는 것, 고통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반복,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이 생을 나는 지금 여기에서 결단하며 살겠다. 열심히 해도 더 나쁜 결과가 올 수도 있다. 삶이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더라도,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웃음으로 돌파하겠다는 긍정적, 능동적 힘의지까지 가야 영원회귀를 이해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존의 결단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열심히 살아서 더 나쁜 결과가 오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동적, 부정적 힘의지는 내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고 안주하려고 합니다. 긍정적 힘의지는 무언가를 의지처로 삼아 거기에 복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힘의지로 결단하고 행동하려 합니다. 그것이 ‘그랬었다’가 ‘내가 그렇게 원했었다’로 힘의지가 다르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긍정하는 힘이 과거에 ‘그랬었다’를 다른 가치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랬었다’에는 ‘나’가 빠져있습니다. 그냥 상황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욕망하지 않고, 결단하지 않음으로써, 책임도지지 않습니다. 비로소 삶의 모든 순간을 ‘내가 원했었다’로 바꿀 수 있을 때, 과거의 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과거를 해석하는 나의 미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긍정은 홀로 오지 않고, 또 다른 yes와 함께 온다고 합니다. 두 번째의 긍정은 또 다른 긍정을 촉발할 수 있는 긍정이자, 이전의 힘을 비틀 수 있는 긍정이라고 하는군요.

음~~. 제가 정리했지만, 정말 엄청난 이야기들이군요. 제가 이걸 얼마나 이해했나 싶네요. 이번 강의 듣기 전까지의 저라면, ‘그건 니체 이야기고, 난 잘 모르겠어. 실존적 결단이 말처럼 쉽겠어?’하고 선을 그어버렸을 텐데,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이 듭니다. 내 사유로 내게서 인간적인 가치들을 넘어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그것이 가치의 전환이고 존재의 전환이겠지요. 그런데 또 그건 어찌해야 하는건지? 에효. 일단 욕심을 공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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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29 10:40
    '철학은 질문의 방식이다' 멋지네요 o_o 대상화하지도 않고 자기비하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제 안에 깃들어 있는 시대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이끌어내기. 어렵지만 니체 읽으며 시도해봐야할 문제인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