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 Q 니체 6주차 후기

작성자
키키이림
작성일
2017-09-01 12:03
조회
159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위한 두 가지 질문

만물이 나의 존재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긍정하는가?

누가 뭐래도 떳떳하게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가?

니체의 망치

니체는 영원회귀와 힘의지 등 주요 개념을 은유와 상징으로 보여줄 뿐 명확하게 언어로 정의하지 않았다. 니체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힘의지 덩어리다. 읽는 사람이 어떤 힘의지를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들고 우리를 시험한다. 그 망치를 두려워하고 우상화하는 마음만 컸던 것일까? 망치로 나를 깨지 못하고 존재만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다. 니체라는 낯선 짐을 지고 가는 게 아니라 니체를 소화하고 싶은데 낙타의 위장을 가진 나는 그냥 일단 싣고 본다. 일단 후기를 쓰고 본다. 이~아~! 채운쌤은 니체를 안다는 것보다 니체적 사유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자기 반성하듯이 니체의 구절에 얽매여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의지로 해석해내라고 하셨다. 망치로 나를 깨면서 자기경멸의 시간을 지나가야 한다. 당당하게! (자부심 파는 가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지난시간에 니체는 긍정에 대한 위 두가지 질문을 내 시험지에 던져주었다.

긍정이라 착각한 거짓 긍정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Ja)와 낙타의 긍정(I-A)은 다르다. 온갖 것을 다 씹어 소화하며 언제나 고분고분 이~아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다.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반항적이면 까다로운 긍정이 진짜 긍정이다. 우리가 대부분 긍정적이라 말하는 “이 정도면 됐지”, “난 후회하지 않아”하는 긍정도 거짓 긍정이다. 그렇다면 과거 나쁜 일을 한 나까지 긍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단순한 위로나 자기연민이 아닌 자기 긍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지난시간에 영원회귀와 힘의지 이해를 통해 긍정을 어렴풋이 연습해보았다.

 
1. 영원회귀의 이해를 통한 긍정

만물이 되돌아온다. 그와 더불어 우리 자신도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와 더불어 만물이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존재해왔다는 것이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365)

시간 전체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

현대철학의 중요한 문제가 시간을 사유하는 문제와 시간과 공간을 연결시키는 문제다. 니체의 유고를 분석한 클로소프스키의 영원회귀를 통해 시간에 대한 다른 사유를 보았다. 특권화 된 A, B, C의 순간이 있다. A라고 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사건은 무수히 많은 계열들이 관계를 맺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중 어떤 특별한 하나가 현실화된 것이다. 그 속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잠재적 계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즉, A라는 순간으로 현실화된 사건은 무수히 많은 타자성들이 선재해야 된다.(타자들의 선재성)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 순간 나로 현실화 된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 차이들이 선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개체란 그 자체로 타자들이라고 했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이미 타자들이다. 그래서 관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가 이미 관계임을 사유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말고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나의 현실화된 사건은 무수히 많은 의식적, 무의식적 인과가 한꺼번에 선재한 채로 작동하고 있다. 현실적 인과와 현실적이지 않은 선재적인 잠재적인 계열들(타자, 우주, 관계, 스피노자의 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어떤 순간을 긍정한다는 것은 사건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내 선택과 행위, 존재 속에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과 잠재적 계열들이 나를 통해 그렇게 현실화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내 선택과 상관없이 백번을 돌아가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해야 그 과거를 긍정할 수 있다.

매번의 순간은 차이로 돌아온다

영원회귀는 시간 전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A 다음에 B가 오고 C가 온다는 선형적인 시간은 우리 관념이 만들어 낸 것이다. B라는 순간은 A의 인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B라는 순간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매번 계열 전체가 반복되는 것이다. C가 도래한다는 것은 A라는 순간이 포함한 계열전체로 인해 생성된 B전체 계열의 반복이다. 매 순간은 시간 전체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번의 순간은 차이로 돌아온다. 스피노자적 관점에서도 그렇다. 하나의 개체는 많은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체가 타자를 배제한 채 자유의지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를 알면 자기를 긍정하는 방식이 내가 겪은 일을 토닥토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은 일이 내 선택만이 아닌 무수한 것들이 공존해 나를 통해 그렇게 펼쳐질 수밖에 없었구나를 이해하게 된다.

긍정과 위로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나귀의 긍정은 개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전체의 계열, 타자들, 시간들과 더불어 자기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겪은 자기의 인과를 긍정하는 방식이다. 자기 경험에 대한 자기연민에 불과하다. 자기가 만든 인과 속에서 자기를 긍정하는 것은 자기 삶 자체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삶 자체의 우연과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생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이 거짓 긍정을 넘어설 수 없다. 순간순간의 임기응변은 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삶을 치고 나가지는 못한다. 일상의 수행 속에서 하나로 꿰뚫는 돈오(頓悟)와 같은 통찰이 있어야 한다. 삶은 뭔가? 시간은 뭔가? 나를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붙들고 돌파해가야 한다. 결국 완전 다른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그때 자기 삶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달라진다.

자기를 무수히 많은 타자들과 함께 보는 것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는 시간, 공간만을 사유한다는 것은 모든 집착의 원인이 된다. 영원회귀는 자기 존재를 전 시간으로써 체험하는 것이다. 즉 연기조건 속에서 본다는 것이다. 시공간적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다른 공간적 차원에서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집착할 게 없다.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중령의 악령에 대하여 320)” 또한 그것이 있기 위해 무수히 많은 선재한 타자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조건 속에서 연기하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시간 속에서 보는 것. 무수히 많은 타자들의 선 존재를 함께 보는 것이다. 이것과 함께 저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토성에서 보면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에 불과하다. 덧없는 사건을 바라보는 다른 시공간의 관점이 필요하다. 하나의 순간을 영원의 관점에서 사유해야한다. 짧은 찰라적 순간도 그 이전의 영겁의 시간동안 작동해왔던 무수히 많은 계열들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생성되지 않는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체험의 차원이다. 신비한 체험이 아니다. 니체의 뇌가 극도로 예민해있는 때 시간에 대한 사유가 니체에게 확 들어왔을 것이다. 지상에 대한 경멸, 시간에 대한 집착, 허무주의가 힘의지로 격동할 때 질스마리아의 바위를 지나가면서 문득 영원회귀라는 생각이 찾아온 것이다. 화두가 깨지고 타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드물기는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매순간 만물은 다음 시간으로 회귀 중

가장 위대한 것도 존재하려면 만물과 함께 와야 한다. 태양, 독수리, 뱀 모든 것과 함께 오는 것이다. 왜소한 것도 돌아온다. 영원회귀란 결코 좋은 것의 도래가 아니다. 만물과 함께 돌아오지 않으면 우린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매순간 만물 전체가 다음 시간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다시(!) 돌아온다. 직선적 인과가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오는 인과다. 어떤 개체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 개체만 돌아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현실화된 시간과 현실화되지 않은 시간까지 전체가 돌아와야 우리 자신이 더불어 돌아올 수 있다. 나는 이미 타자들이다. 내 속에는 이미 무수한 연관관계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은 만물이 매번 차이를 만들면서 나와 함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도 다시 돌아온다.(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366) 원인의 매듭은 내가 생각하는 자의적 원인이 아니라 내가 의식할 수 없는 그 모든 무의식적 인과까지 말한다. 내가 의식할 수 있는 원인이 있다 해도 그 원인의 원인은 또 다른 것이고 그렇게 소급에 소급을 거듭하면 무수히 많은 인과들의 체계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우주 전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나도 다른 누군가의 돌아옴에 그렇게 얽혀 있을 것이다. 개체는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체는 자신의 선택과 자유의지를 통해서 다음 순간을 선택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사위를 던질 뿐이다. 주사위 신을 어떻게 받아 어떻게 줄지는 모른다. 불만족스러운 눈이라도 거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긍정은 던져진 주사위 눈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던져질 것인 이 모든 우주에 대한 긍정이다.

 
2. 강자와 약자의 힘의지 이해를 통한 긍정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른다. 창조하는 자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가하면 이 대지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자다. 창조하는 자가 비로소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인 악인지를 결정한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25)

자기 느낌으로 선하고 좋음을 행위하는 강자

도덕의 계보를 통해 강자와 약자의 도덕과 긍정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니체는 선악의 문제를 힘의지를 통해 강자와 노예,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를 통해 보고 있다. 능동적인 힘을 쓰는 강자와 반동적 힘을 쓰는 약자는 이 힘을 쓰는 방식이 다르고 삶을 긍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도 다르다. 힘은 감각과 느낌이다. 채운쌤은 힘이 달라지면 다르게 느껴지고 코끝의 공기가 달라진다고 하셨다. 이성적 판단보다 먼저 감각적 판단이 존재한다. 느낌의 문제는 내 머리 속으로 진단한다는 것이 아니다. 본능, 충동, 느낌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무의식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핵심이다. 선하다와 좋다는 자기가 자기 힘에게 느끼는 자부심과 자기신뢰다. 그런 행위를 통해 선악이 결정되는 것이다. 선악은 선험적이지 않다. 행위를 통해 드러날 뿐이다. 결과가 비난이든 칭찬이든 불행이든 상관없이 떳떳하기 때문에 의지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일도 누구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도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살순 없다.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하는데 떳떳하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내가 떳떳하다는 것은 다시 그 상황에 놓여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선과 악과 다르다. 그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를 인정하는 것이다. 남들이 악이라고 하는 것을 행해도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빴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선이든 악이든 자기로부터 선언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 그렇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성격이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의 문제다.

약자의 도덕은 가치의 전도

니체에게 보편적 도덕은 없다. 누구의 도덕인지를 물어야 한다. 반동적인 힘이 능동적인 힘을 이기는 노예의 반란은 원한이 창조적인 힘으로 둔갑할 때 생긴다. 실제적인 반응과 행위에 의한 반응이 아니라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다. 강자의 모든 도덕은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반면, 노예 도덕은 다른 것은 부정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전도된 상상 매커니즘을 통해 노예는 자기를 강자로 만들어 버린다. 현실적으로 능동적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가치를 설정하는 시선을 전도시킨다. “너는 나쁘다 그러므로 나는 선한다”가 약자의 도덕이라면 “나는 선한다 그러므로 너는 나쁘다.”가 강자의 도덕이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낸다. 강자의 도덕은 내 당당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강자에게 고귀한 좋음이 먼저이기 때문에 나쁨은 나중에 만들어졌다, 강자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없애지도 않는다(병렬적으로 나타남) 나쁨이 좋음을 더 돋보이게 한다.(보색) 노예의 나쁨은 원형이다. 약자에게는 너의 나쁨이 기원이고 본래적인 행위이다. 상대에 대한 규정이 훨씬 중요하다. 대부분의 노예 도덕은 이분법이다. 뭉개고 개기는 것은 비천한 자의 가장 수동적 자세이다. 강자는 세상의 가치 평가를 스스로 해석한다.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동정은 “안됐다”정도이다. 약자를 병자로 보는 것이지 악한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약자는 마음속에 천개의 시선을 가지고 산다. 누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나를 본다고 생각한다. 비난하든 말든 그게 너의 힘 의지로 해석한 것이고 자부심을 준다면 하라고 하는 것이다. 능동적인 사람은 행복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다. 행복은 능동적 행위가 주는 떳떳한 힘의 느낌이다. 니체에게 행복은 너무나 분명하다. 자기 힘의지로 해석하면서 행복하다고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해도 떳떳한 것이다. 강자는 자기신뢰와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노예의 원한과 강자의 원한

약자는 주로 원한을 갖는다. 원한을 지닌 자는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지도 솔직하지도 않다. 곁눈질과 변명이 많다. 약자는 은폐하며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안정으로, 자신을 생기 있게 만드는 것으로 여긴다. 자기 상처에 기식하는 자들이다.고귀한 자도 원한을 가진다. 그러나 강자는 원한을 품고 있지 않고 그 원한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강자의 원한은 자신의 적, 자신의 재산, 자신의 비행까지도 그렇게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는 힘을 넘치게 지닌 강하고 충실한 인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노예는 자기가 위대해 보일때조차도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와 질투하지만 고귀한자는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적을 필요로 한다. 노예들은 나쁜 사람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우월을 찾지, 좋음을 통해 촉발되지 않는다.

다만 행위가 있을 뿐

원래부터 하나의 좋음은 없다. 좋음은 아주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맹금류는 맹금류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 본성인 양을 채가는 것으로 존재한다. 양이 그것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존재가 다르기 때문에 선악은 비대칭이다. 맹금류의 사랑의 방식은 연한 양을 맛있다며 잡아먹는 것이다.(와우) 그러나 약자는 강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한다. 강자는 각기 다른 기원이 있다고 생각하고 약자는 자기의 전도된 선악을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 때문에 행위 이전에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행위가 있을 뿐이다. 사자는 잡아먹는 행위가 사자의 본질이다. 활동이 모든 것이다. 활동,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통해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다. 뻘짓을 하고 있는 데 뻘짓을 하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약자는 약한 의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약한 것이 아니다. 양은 안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못 잡아먹는 것이다. 약자는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거니와 이것은 좋은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를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강한 힘의지에 의한 강한 행위, 부정적 힘의지와 반동적 힘에 의해 추동되는 약함이 있는 것이다. 행위를 하는 주체는 결과에 불과하다. 의도와도 상관없고 자유의지와도 상관없다.

우리는 삶을 긍정하는 줄 알았는데 나귀의 네에~ 정도 하고 산 것이다. 채운쌤은 모든 공부가 돈오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위로 받기 위해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쌤의 말처럼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뚫지 못하면 번뇌를 똑같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위로하며 살게 된다. 공부도 비약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질문이 확 바뀌거나 글이 바뀌는 도약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화두를 붙들고 꾸준히 하는 방법 밖에 별 도리가 없다. 영원회귀의 시공간은 아마 이번 생에는 깨닫지 못할 거 같다. 음 그럼 동일한 것이 다시 돌아올 테니,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다시 약간(!)의 긍정적 힘의지를 내어보자! 으랏차차!
전체 2

  • 2017-09-01 16:52
    정리하느라 고생했겠네요. 선생님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느듯. 토닥토닥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할지, 벗어나야 하는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네요.

  • 2017-09-01 19:16
    "나를 얽어매고 있는 우주 전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밑줄 그었습니다. 쌀 한 톨, 물 한 방울에도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긴 했는데,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냥 "나도 우주다!"하고 자랑하듯이 던지는 말밖에는 ㅋㅋ;; 근데 지금 보니 나를 이루는 수많은 타자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나'가 있다면, 엄청 겸손할 수밖에 없겠네요. 지금은 겉만 훑고 지나가지만 나중에는 좀 더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