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 Q 9월 13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9-07 13:14
조회
149
이번 시간에는 에세이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왔습니다. 나름 날짜를 세면서 대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에세이가 코앞에 닥쳐오니 이거 또 깜깜해지네요. 그래도 여차저차 한 주 에세이 준비기간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게 나왔을 것 같아요. ㅎㅎ;;

4부 전반부의 주된 내용은 ‘니힐리즘’이었습니다. 채운쌤은 두 유형의 니힐리즘을 설명해주셨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니힐리즘입니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변덕, 필멸을 부정하고 대신 불멸, 불변하는 영원세계를 긍정합니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세계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미를 만들고,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을 바에야 현실에 없는 것, 무(無)를 추구합니다. 다른 하나는 수동적인 니힐리즘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니힐리즘과 달리 영원세계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세상이 공허해~”하면서 방콕할 것 같지만 채운쌤은 이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니힐리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찾아오는 게 니힐리즘이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인 니힐리즘은 막막한 현실에 부딪혔을 때 더 이상 무엇에도 의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조승희 총기난사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테러리즘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도 수동적인 니힐리즘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대는 끝에 가서 편협한 신앙, 엄하며 융통성 없는 미망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이제부터는 온갖 편협하며 완고한 것들이 그대를 유혹하고 시험할 터이니.
그대는 목표를 잃고 말았다. 슬픈 일이로다. 그대는 어떻게 그 손실을 웃어넘기려는가, 견뎌내려는가? 갈 길마저 잃고 말았거늘!” - 그림자, 449

해는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지고, 구름은 이렇게도 흘러가고 저렇게도 흘러가고, 생명은 태어나도 어차피 죽고........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애별리고(愛別離苦)의 반복을 겪다보면 그게 다 그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이때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허무주의에는 영원세계라는 목적이라도 있었지, 수동적인 니힐리즘에는 그것조차 없습니다. 수동적인 니힐리즘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것, 미망에 사로잡혀서 다 같이 죽자고 덤비는 것, 탁! 하고 가치를 전환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마지막이겠죠. ^_^ 모든 것이 동일하게 돌아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함으로써 생을 긍정하는 태도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 말은 쉽지만 매 국면마다 생을 긍정하는 차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죽지 못해 산다는 식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쳤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니힐했던지 고통스럽지만 빡시게 밟아야할 것 같습니다. ㅠㅜ

4부 전반에 나왔던 ‘보다 지체 높은 자들’은 수동적인 니힐리즘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현실세계의 우상을 버렸지만 결국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우상으로 만들려고 했죠.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그럴 때마다 손을 확 뿌리치거나 꺼지라고 얘기하죠. (터프해) 전 그 중 두 명의 왕과 인식자, 거렁뱅이 얘기가 가장 재밌었습니다.

먼저 두 명의 왕이 현실세계를 버린 이유는 아무리 좋은 세상을 만들려 해도 세상은 ‘천민의 사회’에서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아무리 세상을 바꿔도 결국 다시 천박해지고 맙니다. 왕들은 이런 세상과 인간들을 혐오한 나머지 그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래 이런 것 같습니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건 우리가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유토피아 같은 시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맹자의 말마따나 치세와 난세는 번갈아 나타납니다.(一治一亂) 다르게 말하면,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군중은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힘든 시대를 겪고 극복해서 좋은 시대를 만들어내면, 좋은 시대를 끊임없이 되새기느라 우상을 섬기죠. 근데 이건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내장된 시스템 같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는 계속 이런 시대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필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사유겠죠. 맥락과 상관없이 갑자기 이 말이 엄청 매력적으로 들리네요. ㅋㅋㅋㅋ

거머리를 연구하는 인식자들은 오직 자신이 믿고 있는 앎에서만 살아갑니다. 하지만 앎이란 살아가는 와중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거머리를 연구하는 인식자들은 앎을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사유하며 그 앎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생이란 무수한 균열이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마치 사진처럼 매끈한 하나의 컷입니다. 여기서 채운쌤은 동양에서 무(無)나 허(虛)와 같은 개념들을 덧붙여 설명해주셨습니다. 동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직 있지 않음’이란 영역이 있습니다. 만물은 이 영역에 흩어져있는 기(氣)가 우연히 뭉치면서 생성됩니다. 채운쌤이 강의 초반에 얘기해주셨던 세계는 계속 운동 중이란 얘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명상을 오래 한 사람이 명상을 한 뒤에 보이는 시야는 반 고흐의 그림처럼 일렁일렁(?)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상과 반 고흐의 그림 둘 다 잘 모르니 그냥 그런갑다 하고 일단은 넘어가려합니다. ㅋㅋㅋ;;

이런 느낌일까요? 일렁일렁~


이런 비가시적인 영역이 있기 때문에 자연의 운행은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예측을 항상 넘어갑니다. 그러나 인식자는 이런 비가시적인 차원을 무시하고, 오직 가시적인 차원에서만 살아가며 비록 한 뼘이라도 자신이 설 수 있는 바닥, 토대를 원합니다. 언뜻 보기에 매우 명료해 보이지만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어떻게 보면 가장 편협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하나를 위해 나 다른 것 모두를 버렸으며 다른 것 모두에 무심해졌다. 그리하여 나의 앎 아주 가까이에 나의 캄캄한 무지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나의 정신의 양심은 내가 하나만을 알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반 푼어치 정신 모두와 모호하고 뜬구름 같으며, 몽상적인 것 모두가 내게는 역겹기만 하다.
나의 정직성이 끝나는 곳, 그곳에서 나 장님과 다를 바 없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앎을 소망함에 있어 나 정직하기를, 말하자면 가혹하고, 엄격하며, 엄밀하고, 잔인하며, 가차없기를 바란다.” - 거머리, 409~410

조별토론에서는 인식자의 하나만을 파고드는 전문가적인 앎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지 얘기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인식자의 집요한 태도는 물리를 탐구하여 지극한 앎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인식자는 신체와 정신을 나누고 정신의 영역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늪지대에 팔을 담가 자신의 팔을 미끼로 거머리를 잡는 것은 신체적 감각을 배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니체에게 배움이란 신체적인 감각을 동반합니다. 앎은 신체가 감각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죠. 여기서 또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르네요. (앞으로도 쭉쭉 우려먹을 생각입니다. ㅎ) “인자는 인에 편안하고, 지자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仁者安仁,知者利仁) 3개월 동안 인(仁)에 머물렀다고 하는 안회는 누추한 처지에 머물렀어도 자신의 즐거움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부한다는 건 결국 현재 자신의 처지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까지 이르는 것 같습니다. 외적 상황이 어떻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게 그 사람의 내공이겠죠. 하지만 인식자의 배움은 단지 자신의 지적 욕망을 채우는 것 다름 아니었죠. 그런 공부는 어느 순간에 이르면 공허하기만 할 것 같습니다.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에서 “제 발로”의 원어는 “자유의지(free will)”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부귀를 다 버렸다는 것이죠. 거렁뱅이는 약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귀를 다 버렸지만 그들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저는 그 다음이 재밌었는데, 이때 거렁뱅이가 선택한 건 암소로부터 되새김질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암소의 되새김질은 기존의 것만을 가지고 계속 재생산합니다. 거렁뱅이가 이런 되새김질을 배운다는 건 자신이 받은 상처만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 좋은 상황에 처하면 계속 그 상황에 머물며 빠져나가지 못하던 제가 떠오르는 군요. 하하. 하지만 암소가 되새김질을 하더라도 새로운 풀을 뜯어야 가능하듯,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새로운 사건을 만납니다. 공부를 하면서 익혀야 하는 건 익숙한 걸 아까워하지 않고 내보내고 새로운 것을 거침없이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마치 밥 먹고 소화해서 내보내는 것처럼 말이죠. ㅋ 그런 점에서 공부도 밥 먹듯이 하는 거겠죠....?

다음 시간은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저와 건화형~
전체 2

  • 2017-09-08 10:12
    이렇게나 빠른 후기라니! 제가 오독한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았네요. ㅎㅎ. 채운쌤의 말처럼, 오늘 아침 걸으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보니, 뭔가 실마리가 잡히는 것도 같고. 너무 정색하고 덤벼들지 말고, 좀 가볍게 해봐야겠어요. 쉬운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한데.

  • 2017-09-09 09:13
    '공부를 하면서 익혀야 하는 건 익숙한 걸 아까워하지 않고 내보내고 새로운 것을 거침없이 받아들이는 태도!' 맞습니다, 맞고요~~~ !! 달려드는 졸음과 싸우느라 몽롱한 상태로 들었던 수업 내용이 또렷하게 정리되네요. 규창 학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