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학기 8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17-09-15 13:29
조회
110
1주차 수업 후기를 쓴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후기라니요. 니체와 함께 보낸 치열했던 우리의 3학기가 이렇게 끝나가네요. 이제 남은 건 액티브한 에세이뿐 ㅎㅎ

약자의 사랑 방식, 연민

독일어로는 Mitleid, 영어로는 compassion, sympathy, 풀어보면 ‘고통을 함께 나눈다, 정념을 나눈다, 파토스를 동일하게 맞춘다’의 뜻이죠. 연민은 사랑과 겹쳐지지만 자기가 공유하고 싶은 부분만 사랑하는 기만적 사랑입니다.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반응하고 그것으로부터 선함을 느끼는 연민은 그래서 반응적 힘입니다. 니체가 연민을 증오한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다 내어주어 상대의 고통을 해결해줄 것도 아니면서 고작 감정 한자락 허락하고는 내가 선하다고 느끼는 기만적 감정이자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자기 위안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은 연민처럼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을 나누는 정서의 교류가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차이를 보입니다. 생의 무상함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번뇌에 시달리는 인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는 자비는 무명에 빠져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아픔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더불어 반응적 사랑이 아니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강자의 사랑 방식입니다. 고통에 허덕이며 구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못했던 차라도 결국 연민을 떨쳐내며 그들을 떠납니다. 연민을 인류애로 전환시킨 것이죠. 강자의 사랑 방식으로 말입니다. 진정 자기를 극복하고 가치전환을 이룬 것이죠. 저에게는 이 질기고도 무거운 감정의 정체를 계속 들여다보고 돌파하기 위한 여전히 긴 과정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연민의 허위와 기만을 알아챘으나 여전히 익숙한 이 감정의 코드를 차단하고 전환하는 일, 제 과제이기도 합니다.

긍정적 힘의지의 상징—웃음, 춤, 가면

니체는 인간의 실존을 고통스럽고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게 나쁘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미하고 부조리하기 때문에 ‘삶은 양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 실존 삶은 ‘지나가고 있는 것’ ‘생성 중’이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는 양가적인 것입니다. 생성 중인 모든 것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지요. 인간만이 표정을 가지고 있고 그 표정을 의미화한다는 것도 재미있지요. 가장 우울하고 불행한 동물이 인간이고, 그 인간만이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웃음과 명랑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요. 그러니 통찰을 한 자,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웃음은 세계의 양가성에 대한 변형력입니다. 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표현할 길이 없어 이 세계는 ‘가면’을 쓴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가면은 세상의 양가성, 생성의 세계, 그 가상적인 세계의 표현방식입니다. 인간만이 생의 무의미를 깊이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 무의미성을 변형시킬 수 있는 조형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웃음, 춤, 가면은 그런 조형력을 상징합니다.

관점주의

세계는 ‘해석’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관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힘의지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죠. 주체가 관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의지가 관점을 만들어냅니다. ‘해석의지’, 모든 게 해석입니다. 해석과 더불어서 나와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죠. 해석 이전에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다양한 개체들의 세계 해석만큼 존재합니다. ‘나는 어떤 힘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는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중인 이 세계를 어떤 힘의지로 포착해내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세계는 힘의지를 통해 출현하는 것입니다.

우린 어떻게 고귀해질 수 있는가?

니체는 선악이 아니라 고결함과 비천함으로 가치평가 기준을 나눕니다. 지와 무지의 차이도 섬세함의 정도로 나타냅니다. 섬세하다는 건 세상을 좀 더 생성에 가깝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즉 존재를 생성과 밀착시킬 수 있는 능력이죠. 섬세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게 지배적이게 되면, 힘의지가 다르게 발생하려고 하는 발생적 성분이 잘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반응적 힘을 사용하도록 하는 부정적 힘의지만 발생되겠죠. 니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반응적 힘으로 구성하는 모든 것들, 우리의 감정, 진리, 학문, 과학 등은 항상 선험적으로 무언가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주어진 것으로 대상을 파악하면, 인간이 뭔가를 한다고 하는 것은 늘 반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성적인 것을 긍정하는 자만이 반응적인 힘에 휩쓸려가지 않고 그 생성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긍정적 힘의지를 가지고 능동적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반응적인 것으로부터 능동적인 것으로 갈 것인가? <비극의 탄생>부터 니체가 중요하게 제시했던 ‘조형력’, ‘삶을 어떻게 작품으로 조형해나갈 것인가?’ 윤리가 요청되는 지점이겠죠. ‘나는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active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이렇듯 질문을 다르게 던질 때 우린 active한 힘을 쓰고 있는 것이며 누군가의 삶도 전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니체를 읽을 시간이네요. 깔깔깔 웃으면서 가볍게 춤추면서 말입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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