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3학기 에세이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9-16 21:35
조회
131
드디어 《차라투스트라》가 끝났습니다. 아, ‘드디어’가 아니라 ‘벌써’인 것 같기도 하네요. 다른 모든 책들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니체의 텍스트는 매번 해석하며 돌파하지 않으면 별로 남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번 잉여없이 에너지를 투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네요. 어쨌든 이제 에세이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액티브한 힘을 발휘할 시간이네요(분량만이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지난 시간의 키워드 중 하나는 ‘연민’이었죠. 연민에 대해 제가 듣고 느낀 것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도덕의 계보》의 서문에서 니체는 ‘동정의 도덕’(동정과 연민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을 경계하며 플라톤, 스피노자, 라 로슈푸코, 칸트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이들 네 사람은 서로 무척 다르지만 동정을 무시한다는 한 가지 점에서는 의견이” 같았다는 것이죠. 니체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동정이 무가치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고 말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스피노자는 연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스피노자는 연민을 “타인의 불행에서 생겨나는 슬픔”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이 우리와 유사한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고 덧붙이죠.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연민은 ‘슬픔과 관련된 정서모방’입니다. 이는 그 원인이 외부에 있는 수동정서이며, 그 중에서도 슬픔에 속하는, 다시 말해 우리의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정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랑인 셈입니다.

채운샘은 (아마도 스피노자와 비슷한 맥락에서?) 연민을 ‘약자적 방식의 사랑’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연민은 기본적으로 ‘정념을 나누는 일’입니다. 분명 니체나 붓다, 예수 등의 ‘깨달은 자’들도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때의 사랑은 정서적 겹쳐짐과는 무관한 것이죠. 붓다는 하나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들을 동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번뇌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는 중생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했으며, 그렇기에 붓다는 중생들을 다독여주는 대신 인류가 어떤 무지 속에서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깨우쳐주었다고 합니다.

정서적 공감으로서의 연민은 기만적입니다. 연민을 느끼고 동정을 베푸는 자는 상대의 고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의 고통이 그치기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Ⅰ》에서 니체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에 대해서 “그들은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 할 일이 없어지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며,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우월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불만을” 표시한다고 말합니다. 연민을 품는 자는 결코 자신을 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태양과 같은 전폭적 사랑이 아니라, 부분적이며 적당한 사랑. 상대를 괴롭게 하는 자들을 죽여버려서라도 그를 고통으로부터 구해주겠다는 각오도 없으면서, 값싼 동정을 베풀고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깁니다. (저는 채운샘께서 이 부분을 설명하시는 동안 영화 《렛미인》을 떠올렸습니다;)

연민은 반응적입니다. 자신의 능동적인 쾌감과 힘의 느낌을 통해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불행에 연민을 느낌으로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방식. 저는 스스로가 허영심이 있으면 있었지, 연민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능동적인 힘을 구성해내지 못하는 한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겠죠. 휘청 하는 순간 연민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세이입니다! 분량은 액티브하게! 내용도! 에세이 발표는 26일 화요일! 단편 몇 개를 골라서 도덕, 영원회귀, 힘의지, 연민·사랑 등의 주제를 풀어 써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다다음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간식은 각자 조금씩 준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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