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7월 18일 3학기 두 번째 수업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07-19 15:12
조회
279
 

1교시 2교시 <가난한 사람들>

 

질문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간 다음, 더 큰 질문 거리를 안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절차탁마M 수업이 있는 화요일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살펴보며 <가난한 사람들의 주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부분에 주목하는가 하면, 비슷한 부분에 주목하더라도 그로부터 서로 다른 키워드를 찾아내는 우리를 보며 ‘읽기’와 ‘쓰기’는 개성이 듬뿍 담기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서로 다른 삶을 꾸려갑니다. 그런데 제부쉬낀이 사는 방식을 보면, 과연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고결함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부쉬낀은 거리에서 연주하는 오르간 연주가를 ‘존경할만한 거지’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내일 어떤 구두를 신을지가 최고 고민거리인 귀족에게는 거침없이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이라 말하는데요. 그렇다면 제부쉬낀은 어떤 사람을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걸까요? 그에게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떤 형태이고, 사람으로 살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 여기는 걸까요? 제부쉬낀이 말하듯 운 좋게 집안을 잘 타고나 호위 호식하는 사람과, 궁핍한 환경에서도 자기 스스로 돈을 벌어 삶을 꾸려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둘은 전혀 다른 부류인걸까요? 백 루블을 주며 악수를 청하는 각하를 제부쉬낀이 존경하고 있는 걸 보면 부자라고 다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이며, 궁핍하게 산다고 해서 다 존경받아 마땅한 건 아닐 텐데요. 그렇다면 존경받을만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인걸까요? 혹은 제부쉬낀처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마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인가요? 공감능력은 타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키워나가는 것인가요? 만약 공감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왜 서로 다른 공감능력을 가지게 될까요?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또 다시 끊임없는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제부쉬낀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제부쉬낀은 돈이 많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궁핍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에게 얼마 없는 돈을 기꺼이 나누어주려는 사람이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비난하기보다는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고, 바르바라에게 빵이 아닌 꽃을 선물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부쉬낀에게 가난함이란 어떤 상황을 의미할까요? 통상적으로 가난하다 하면 물질적으로 궁핍한 상태를 떠올리지만, 제부쉬낀에게 가난함은 오히려 마음과 더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가난 그 자체보다는, 가난해서 겪은 모욕이 그를 공포로 몰아갑니다. 그는 사람들이 비웃고 수군거리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니까요. 돈 쓰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 제부쉬낀이라 해도, 물질적 궁핍함은 분명 제부쉬낀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상황을 겪게 합니다. 제부쉬낀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고, 자존심이라든가 성스러움이라든가 수치심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고, 타인을 배려하고 뭔가 베풀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겉옷 단추하나 제대로 수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치심과 자존심을 지키고,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을 맘대로 펼치기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 드러내야 하고, 보이고 싶은 모습은 보여줄 수 없는 물질적 궁핍함. 그 조건 속에서 제부쉬낀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가난한 와중에 책을 읽는 제부쉬낀은 오히려 그의 가난함 때문에 무언가를 볼 수 있었던 걸까요? 이 작품은 그렇다면 가난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보게 하는걸까요? 

제부쉬낀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먹고 사는 일’보다는 끊임없이 세상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데도 편지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연극을 보러가고 편지를 쓰고 문학을 읽습니다. 관계가 중요한 제부쉬낀은 각하께 백 루블을 받은 것보다 악수 한 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편지쓰기를 계속하고, 돈을 빌리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기에 모욕감을 느낍니다. 제부쉬낀이 맺는 가족관계도 특이합니다. 혈연이 아닌 셋이 모여 오랜 시간 함께 지냅니다. 제부쉬낀은 끊임없이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는 바르바라와 관계를 맺고, 이웃집 고르쉬꼬프와 관계를 맺고, 문학 속 세상과 관계를 맺고, 마침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어 그들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부쉬낀은 그들의 일을 길 건너 멀리 앉아 바라보는 남의 이야기로 관망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기 일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안쓰러워하고, 그들의 일을 자기 일보다 더 마음 아파합니다. 반면 바르바라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제부쉬낀과 다르게 그녀의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흩어지는데요, 어린 시절 바르바라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올라오지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서로에게 차가워집니다. 소설 말미에 바르바라는 결국 풍족한 삶을 선택하고는 부자와 결혼을 하는데 그 결과 고립됩니다. 소통과 사람들의 관계는 이 둘에게 각각 어떤 의미였을까요? 물질적 풍족함이 파괴하는 관계도 있는 걸까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제부쉬낀이 끊임없이 쓰다가 마침내 ‘문체’를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정서를 하는 공무원이었다가, 편지를 쓰는 한 사람이었다가, 이제 그 이상을 쓰려 하는 제부쉬낀. 그런가하면 제부쉬낀의 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길어집니다. 제부쉬낀은 지속적으로 편지를 읽고 책을 읽고 악사며 이웃이며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난에 대한 세계관을 (어떤 세계관?) 가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의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해석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자신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게 되자 그는 글을 쓰게 됩니다. (프루스트는 문체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 깊이를 갖추어야 생긴다고 했다네요!)  그는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말을 글에 담으려고 하는데, 그가 쓰려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인간과 인간이 관계 맺는 일, 존엄을 나누는 일, 혹은 가난에 대해 쓸까요? 읽고, 읽은 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며 때로는 자기를 덜어내고 자기가 덜어진 부분에 세상 사람들을 초대(?)해 자기 일처럼 헤아리려 한 제부쉬낀. 그러다보니 그는 계속 넓어지고 그런 그의 글은 세상 여러 군데를 더듬게 되고 가난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게 됩니다. 자기 일기만 보고, 자기 문제로 고립되는 바르바라와 대조적이죠.

그런가하면 편지를 읽는 데에서 시작한 제부쉬낀은 문학을 읽고, 점차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까지 읽는 사람으로 진화합니다. 자기의 의견을 만들어가고, 그 의견을 쓰는 행위로 혹은 이웃의 이야기를 듣는 행동으로 이어가고, 이웃에게 공감하게 되는데 그에게 읽기란 무엇이었을까요? 제부쉬낀은 고골의 <외투>를 읽고 상당히 불쾌해합니다. 수업시간에 외투 앞부분을 잠깐 함께 살펴보았는데 고골의 <외투>는 마치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전부 다 파악한 듯 한 문체로 쓰였거든요. 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므로 어느 관청인지 굳이 밝힐 필요도 없고, 언제 어느 때 임명된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식으로 <외투>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거기에다가 주인공은 겨우 산 외투 한 벌을 빼앗기고 죽은 뒤 유령이 되어 떠돈다고 합니다. 초월적인 위치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해 일반화를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외투> 문체에 제부쉬낀이 모욕감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설 첫 부분에서 제부쉬낀은 자신의 가난한 하숙집을 가감 없이 묘사합니다. 화려한 계획도시 뻬쩨르부르그, 그 안에 존재하는 궁핍하고 빈곤한 삶. 그러나 그런 하숙집 안에는 도박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문학을 읽는 사람도 있고, 차를 마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귀족들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죠. 그런데도 사람을 생활수준으로 구분하고 일반화하는게 타당할까요? 

이 소설은 정말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공통적인 키워드는 ‘가난'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가난은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요? 가난이라는 조건은 인간다움에 영향을 미칠까요? 읽기와 쓰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하필 그의 첫 소설을 왜 가난한 사람에 대해, 가난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말하고 있을까요? 그는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구나― 멀찍이서 관망하는 게 아니라, 제부쉬낀이 그러하듯 직접 자신의 일처럼 느끼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처음에는 제부쉬낀이 낭만을 간직한 빈곤한 중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점점 그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 마음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이야기를 자기의 문체로 담아내려는 사람 제부쉬낀! 우리도 열심히 절차탁마하면 언젠가 우리만의 문체를 찾게 될까요? 각자의 문체가 어떤 형태일지, 그 문체로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지 궁금해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보바리부인을 읽고 5가지 질문을 만들어 대답을 찾아오기로 했어요. 그리고 오늘 제출한 에세이를 수정해 제출하기로 했어요! ( 다들 화이팅입니다 문체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

 

3교시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소설과 이어지는 역사 공부 시간! 3교시에는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논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거대한 전환>에 담긴 폴라니의 핵심 주장은 바로 자기 조절 시장에 대한 환상을 깨라! 입니다. 

폴라니가 분석하기에 19세기 유럽 (1815년~1914년) 은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렸는데, 이를 그는 ‘백년 평화'기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때의 평화는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가까스로 유지된 안정입니다. 당시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영국은 자기 조정 시장이 이로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시장 자유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를 자유로운 시장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각종 장벽을 제거하고 자유 무역이 가능한 장을 열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거래를 손쉽게 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퍼뜨렸고, 세계 무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했으므로 국제 사회는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즉,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금본위제에 기반한 국제 무역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유례없이 전면 전쟁이 발생하지 않은 100년 평화 기간이 생겨났던 거지요. 

그러나 이 100년 평화 기간은 사실 이후에 나타날 각종 비극이 싹트는 시간이었다는 것이 폴라니의 주장입니다. 19세기가 지나 식민지 확장 경쟁이 극에 달한 이후 1914년 세계 대전이 발생하며 국제 평화는 깨지고, 이어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며 경제가 붕괴됩니다. 나아가 1930년대 파시즘이 유럽 대륙을 휩씁니다. 이 일련의 현상을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에 대한 믿음과 그에 기반한 시스템이 초래한 자연스런 결과라고 봅니다. 애초에 자기 조정 시장은 환상일 뿐이므로 지금까지 실현된 적 없고, 실현될 수도 없다고 그는 확신합니다. 

폴라니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조정 시장에서는 인간 존재와 자연환경이 순수한 상품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폴라니는 인간 노동, 토지, 화폐가 애초에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고 전제하고 있기에, 인간과 자연을 시장으로 내모는 자기 조정 시장은 우리 삶을 피폐하게 내모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시장입니다. (상품으로 살면서 만족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일까요?) 또한 시장은 외따로, 자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시장을 둘러싼 정치, 종교, 사회 관계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맞물려 돌아갑니다. 이를 폴라니는 묻어들어있는 상태(embededness)라고 칭하는데요, 시장은 사회에 묻어들어있으므로 자기 조정 시장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국가가 이미 여러 규제를 가하며 작동하는 게 시장인데 자기조정이라는 게 모순이지요! 게다가 시장 자유주의는 특성상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데, 이 때 불안한 상황에 내몰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시장 자유주의에 반동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다시 말해서 시장이 사회에서 벗어나려 하면, 즉 자기 조정 시장의 영향력이 강해지면 이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시장을 다시 사회에 묻어놓고자, 사회를 시장에서 보호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바로 폴라니가 주장하는 바 입니다. 이를테면 금본위제는 애초에 몇몇 나라밖에 살아남을 수 없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각 국가들은 금본위 체제하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보호주의 정책을 펼쳤고, 국제 무역과 보호주의가 합쳐진 결과 식민지 팽창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식민지 전쟁 선두에 섰던 영국과 독일은 마침내 세계대전을 벌이며 국제 평화가 깨졌고 이어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시장마저 붕괴됩니다. 그 사이에 발생한 뉴딜정책, 파시즘, 소련 스탈린 체제, 이후 다시 발생한 2차 세계대전 등 역시 금본위제라는 취약한 제도에 근간을 둔 시장 자유주의가 원인이었다고  폴라니는 분석합니다. 

수많은 비극이 시장 자유주의의 결함을 폭로하고 있지만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이 자기조정 시장에 대한 환상을 품고있고 마치 종교처럼 시장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이어갑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믿음이 있어서 모든 걸 상품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지요. 예를 들어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몰고 있으며, 우리의 감정까지 대화까지 상품으로 팔고 있습니다. 대화방, 귀청소방, 감정 노동… 이런 단어들을 보면 우리가 어디까지 우리를 상품으로 변환시키는지 알 수 있지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연 역시 상품으로밖에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맘대로 주무르는(?) 애완용이거나, 먹기 위한 재료일 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동식물과 관계맺는 법을 모릅니다. 그 무엇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 시장,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요? 

다음 시간에는 제 2부를 읽어옵니다. 2부는 <거대한 전환>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자기 조정 시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에 있는 산업혁명을 살펴보아야하는데 바로 2부에서 이 내용을 다루고있기 때문이에요. 2부 3장은 혜원샘, 4장은 윤순샘, 5장은 보영, 6장은 지은샘이 각각 발제를 준비하고 같이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발제를 할 때에는 각자가 해석한 뒤 핵심 논점을 위주로 정리하는 방식으로! 

집에 오는 길,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았던 것이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익숙하게 걷던 거리가, 그 거리를 가득 메운 가게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왜 이 책들을 읽고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카프카가 말했던 것처럼 뭔가 '갈망'하고 있는데, 그 갈망은 '절망감'에서 나온 것일까요 ? 어떤 절망감이었을까요, 사실 잘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너희는 어찌되었든 기업에 자기를 어필해야하는 상품이고, 학교는 정글이라고 말하는 대학교에 제가 실망을 느꼈고, 제가 가진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고 돈으로 보상받는 직업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안들었다는 것인데... 이런 저를 보고 엄마는 세상 물정 모른다고 팔자 좋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계속 읽어보면 알게될까요? 그럼 열심히 읽고 다음주에 뵈어요! 
전체 4

  • 2017-07-22 11:33
    신속하면서도 수업 시간이 생생하게 담긴 후기로군요. 보영샘의 문체찾기 첫걸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알고 싶다. 생각해보고 싶다. 그리고 쓰고 싶다. 이 뜨거운 욕망에 충실하다보면, 그때 '출구'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 2017-07-26 10:22
      그렇겠죠??! 제부쉬낀처럼 가슴 속 뜨거운 소리가 길을 찾아 터져나올때까지(?) 열심히 헤매겠습니당!

  • 2017-07-23 20:31
    생생한 세미나 후기 ㅇ0ㅇ!! 폴라니 책을 읽으면서 뭔가를 사는 방식으로만 사고하는 게 너무 익숙해진 저를 발견합니다ㅠㅠ

    • 2017-07-26 10:27
      저도 제 스스로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상업 논리에 물든 사람이라는 걸 발견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삶을 다시 생각해보게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