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8월 1일 절차탁마M 후기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08-03 20:21
조회
216
1. 보바리 부인

이번 시간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보바리 부인의 주제를 글로 쓰고 나눈 시간이었습니다.

『보바리 부인』에서의 각 캐릭터들은 ‘읽습니다’. 엠마는 자신의 감정의 타오르는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각종 로맨스 소설을, 샤를은 의사로 활동하기 위한 의학서적을, 오메는 자신의 명예를 드높여주기 위해 소위 자기계발을 위한 서적들을 읽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엠마가 책 속에 자기를 던질 때 오메는 어떤 책을 읽어도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맞춰서 책을 자신 속으로 다 먹어치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플로베르는 각자 다른 방식의 읽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지할 것은 이 읽는 세 인간 모두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혜원샘과 윤순샘이 지적하신 것처럼 엠마는 현실을 환상과 공상으로 채우려다 파멸당합니다. 책이 그리는 행복과 정열 그리고 황홀함을 돈으로 이루려다 현실에서는 빚만 늘어나게 되죠. 자신의 사치스러운 행위가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을 망가뜨릴지 생각지 못했고, 그 무지는 엄청난 빚으로 돌아와 결국 강제로 현실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엠마는 현실을 살 능력이 없으니 결국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릅니다.

샤를의 읽기는 주로 의학서적들을 읽고 의사로서의 자격을 획득/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학교에 진학하고 아무 불평없이 어머니가 정해준 의사의 길을 걸으며 그저 아무 비평없이 책을 소화시키는데, 그렇게 샤를은 무난히 의사시험을 통과하고 결혼하여 ‘평온한’ 결혼생활을 이어갑니다. 비판 또는 의심할 줄 모르는 그가 엠마의 괴로움을 알아차리는건 애초부터 불가능이었고, 엠마가 비소를 먹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내리는지 단서조차 찾지 못합니다. 엠마의 죽음 이후 샤를은 엠마과 같아집니다. 빚이 산더미인데도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고 각종 사치품을 사들이는데, 이렇듯 엠마처럼 되어버린 그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무지는 결국 맹목적으로 자신이 사랑한 엠마, 그리고 엠마의 욕망을 쫓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메의 읽기는 엠마나 샤를의 그것과 또 다릅니다. 그는 그의 명예 그리고 물질적 보상을 위한 읽기인데, 엠마가 책의 환상 속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면 오메는 자신이 읽는 모든 책을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맞추워 ‘먹어치워버립니다’. 오직 자신을 향한 읽기는 엠마가 비소를 먹고 죽어갈 때에 그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할 급박한 상황에 오메는 여러 시험관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녀 목구멍에 […] 손가락을 넣어주는 편”이 사람을 살리는데에 더 효과적이었을텐데 말이죠 (467,『보바리 부인)).

이렇듯 플로베르는 캐릭터들의 각기 다른 읽기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무지를 보여주면서, 읽는다는 행위 즉 ‘지식’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말하려는 듯 합니다. 세 캐릭터 모두 현실과 유리된 채 책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것이죠.

이번 시간은 제 자신을 많이 투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가을동화’나 ‘겨울연가’를 통해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꿈꿨었는데 (ㅎㅎㅎㅎ)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도 했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 그저 점수를 얻기 위해 샤를처럼 온갖 교과서와 책들을 무비판적으로 먹치우기에 바빴습니다. 현재 많은 드라마들이 수많은 ‘엠마’들을 환상 속에 살게하고,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앞두고 비판적 사고의 힘은 기르지 못하고 시험을 잘보기 위한 읽기를 하고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메의 읽기 또한 마찬가지이겠죠. ‘자신의 성장’을 위한다는 소위 자기계발식 읽기는 인문학 조차 자신의 일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19세기와 비교해서 현재의 물리적 풍경은 많이 바뀐 듯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의 풍경’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요, 우리는 이전보다 얼마나 더 나아진 것일까요?

2. 거대한 전환

풍요와 빈곤의 역설

『보바리 부인』의 풍경은 ‘토지’에서 벗어난 각 개인들이 ‘뿌리’를 내리기 위한 몸부림을 보여주는데요,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살았던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하는 일을 하며 이웃과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면, 근대에는 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도래로 이동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는 개개인이 자신의 뿌리였던 지역을 떠난 만큼 자신을 설명할 기반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대한 전환』이 설명하는 이 때의 사회는 농촌에 살던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도시에서 한창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실패한 사람들은 다시 농촌으로 귀화하는 이동현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때였습니다.

채운샘은 이 시기를 “풍요와 빈곤의 역설”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때의 ‘풍요’라는 단어는 축적을 전제로 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풍요가 늘어날 수록 빈곤도 상대적으로 심해집니다. 이 역설은 사실 19세기 뿐만이 아닌 아주 오래전 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현상이라고 합니다.『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떠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얻는 시대를 지나 농경시대로 넘어오면서 먹을 것의 축적을 이루는데, 이 때 굶어죽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났다고 합니다. 수렵채집 사회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되지만 농경사회는 그 해 농사가 자연재해 등으로 망쳐질 경우 축적되는 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예시는 고층 아파트가 늘어날 수록 그에 비례해서 판자촌도 늘어난다는 것인데요, 판자촌이 있던 지역의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도시 외부로 자꾸만 밀려나면서 새로운 판자촌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피넘랜드법 그리고 빈민

농촌의 지주가 농촌 노동력 이탈을 막기 위해 제정된 스피넘랜드법은 노동자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든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주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이 법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빈민’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았는데요,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됨으로써 노동자들은 일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노동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져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을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어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금지하는 단결금지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임금 하락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강구할 수 없었는데요, 결국 대부분의 노동자가 극빈자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다시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임금의 차이가 없으면, 즉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하면 행복한 사회가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노동자들의 자긍심과 사기는 떨어집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패착 요인을 알 수 있죠.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던 상관없이 똑같은 임금을 주는 제도는 채운샘이 말씀하시길 “차이의 매커니즘”을 무시한 처사라고 합니다. 차라리 내가 누구보다 ‘못살아서’ 저 사람처럼 잘 살고 싶다는 오기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죠. 또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복지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시간당 최소임금이 올랐고, 실업급여의 필요성 또한 꾸준히 대두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지 이후입니다. 부족한 돈을 채워주고 나서 어떻게 사람의 욕망을 추동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나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내맡기는 것과 같기 때문에 존재를 한없이 연약하게 만듭니다. 빈민구제법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을 도와주는 선한의도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은 인간을 ‘빈민’이라는 계급으로 낙인찍으면서 마치 사회가 구제해주지 않으면 회생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게 됩니다. 한 개인의 존재능력을 무참히 박탈해버리는 것이죠. 빈민구제 활동은 사실 기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의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그리고 교회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 것입니다.

영혼의 자립

진정한 복지는 ‘영혼의 자립’을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일까요? 채운샘은 노숙자 분들이 길거리에서 파는 빅이슈 잡지를 예로 드시며,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준 연예인 이야기 뿐인 잡지가 아닌 노숙자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들이 직접 만든 잡지가 그들을 진정 바로서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설명해주셨습니다.

진정한 자립을 위해 우리는 정부에 무엇을 요구하고 또 우리 자신은 무엇을 해야할까요?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해결방안은 당연히 일자리를 늘리는 것입니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크게 늘리겠다고 문재인 정부에서 나서고 있는데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소위 ‘4차 산업혁명’의 물결로 우리의 일자리는 더욱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자리를 늘리려는 고민 보다는 어쩌면 더 이상 일자리를 늘릴 수 없다고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운샘은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사회적 가치(화폐)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 생산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영역을 어떻게 늘릴까? 예술가 지원제도를 보면 정해진 기간(보통 1년) 동안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데 그 이후에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독립다큐계를 보자면 작품의 제작을 지원해주는 제작지원금 제도가 있지만, 작품을 다 만들고 나면 배급을 해야하는데, 이것은 또다른 문제입니다. 독립영화극장이 존재하지만 이런 전통적 배급방식은 상업영화에 항상 밀릴 뿐이고 공동체 상영은 홍보할 루트가 제한적입니다. 전통적 배급방식을 떠난 다양한 형태의 상영방식을 독립영화인들은 많이 고민하고 있지만, 역시 정부의 도움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탈영토화, 탈코드화

어쨌든 스피넘랜드 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시장경제 기반의 자본주의를 본격화하게 되면서, 사회는 ‘탈영토화’ 그리고 ‘탈코드화’ 됩니다. 탈영토화란 특정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던 사람들이 일을 찾아 자신의 고향 영토를 떠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즉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 지역만의 고유 문화라던지 도덕 및 관습을 떠나는 ‘탈코드화’를 불러오게 되죠. 지역공동체라는 개념이 흐려지게 되고, 인간의 의식구조가 바뀌게 되는 대전환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저도 역시 근대의 산물인 것이, 아버지의 일로 여러번 이사를 다니며 끊임없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중국 상해에서 5년간 머무른 일인데요, 그 때 저는 처음으로 한국인은 무엇인지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교육과정을 밟은 저는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괴리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제가 미국인은 아니며 중국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라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느낌이 탈영토화라고 불리는 자본주의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탈영토화를 넘어 지역간의 경계 마저 사라지고 있는 현재의 소위 '글로벌 시대'에는 페미니즘, LGBT, 그리고 동물권보호 등은 어떤 지역에서도 보편적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할까요? 이것은 또 하나의 '코드화'는 아닐까요?  현재 아직 '문명'의 손이 덜 닿은 어느 곳에서는 저런 개념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완전히 맞지 않다면, 그들은 존중받아야 할까요? 이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걸까요? 어느 곳에서나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이념이 또다른 폭력을 낳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책감이 드는것을 보면 이미 저는 코드화가 되어버린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다음주에 아쉽게도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에 뵙지 못하지만, 다음주에도 많은 흥미로운 주제들이 기대가 돼요! 후기 꼭 읽을게요 다다음주에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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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04 07:51
    절탁 시간에 언제나 진지하게 골몰하는 지은! 마음 속에는 불꽃이 튀고 있었군요. 조아요!
    아~ 지은 없는 다음주는 좀 서운할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