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숙제방

두도시 이야기 서평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17-09-15 18:58
조회
46
절탁M 문학/두 도시 이야기 서평/2017.8.15./윤순

살고 죽고 되살아나고

되살아난다는 것?

제리는 텔슨 은행의 문지기이다. 그는 문지기 일만 해서는 가족의 생계유지가 어려워 밤에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체를 도굴해 파는 일이다. 제리는 실제로 매장된 시체를 파서 꺼내는 일을 한다. 죽어서 더 이상 세상에 나올 일이 없다고 누구나 알고 있는 그들을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하는 일을 하는 게 제리의 비밀스런 직업이다. 죽은 자가 세상으로 다시 나온다. 이는 죽은 자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일까? 그들은 되살아나는 것인가?

마네트 박사는 살아 있는 채로 감옥에 18년 동안 갇혀 있었다. 그가 감옥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사 자신조차 감옥에서 죽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감옥에서 나왔다. 살아서 매장되어 있던 마네트 박사는 시체와 같은 처지였다. 따라서 그가 밖으로 꺼내어 졌을 때 감옥 이외의 세상에 대한 그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감옥을 헤매고 있는 그는 과연 되살아난 것일까? 시드니 카턴은 세상에 살고 있었다. 친구 변호사를 돕는 일이지만 세상 속에서 속해 있는 사람이다. 카턴은 친구 스트라이버의 지시에 의해 일을 하고 그 외에 나머지 시간에는 술로 대부분을 보낸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은 거의 없는 카턴에게 세상은 무덤과 같았다. 누군가 그를 가두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가두고 있는 카턴이었다. 이런 카턴이 사랑하는 루시를 돕기 위해 위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도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죽은 것처럼 세상에서 살던 카턴이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일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죽는 것으로 되살아 날 수 있는 것인가?

되살아난다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의 숨이 끊어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누군가 죽었다가 되살아나게 되면 그것은 기적처럼 보일 것이다. 이 기준으로는 제리가 파낸 죽은 자들을 제외하고 마네트 박사나 시드니 카턴은 죽은 것이 아니다. 일단 마네트 박사나 카턴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서 되살아날 수 있는 자격이 안 된다. 그런데 디킨즈는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되살아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디킨즈에게 죽었다는 것의 의미는 육체에서의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디킨즈는 무엇이 죽은 상태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죽은 상태를 벗어나 되살아난다는 것은 무엇이라 하는가?

마네트 박사의 되살아남

그 목소리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소리의 마지막 메아리 같았다. 생기와 울림이 완전히 사라진 인간의 목소리는 한 때 고왔던 색이 바래어 낡고 흐린 얼룩만 남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어찌나 가라앉고 감정을 억눌렀는지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홀로 황야를 떠돌던 여행자가 지치고 굶주려 쓰러져 죽기 직전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하는, 절망하고 상심한 생명체의 목소리였다.(p62)

마네트 박사가 감옥에서 나와 하인이었던 드파르주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텔슨 은행의 사원인 로리와 마네트 박사의 딸인 루시가 방문했다. 처음 보는 사이인 아버지와 딸이 다락방에서 처음 만난다. 마네트 박사의 몸은 감옥에 있지 않지만 그의 상태는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네트 박사는 감옥에 가기 전에 훌륭한 의사였고 사랑하는 아내도 있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행복했던 과거를 모두 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면 그는 괴로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갈 어떠한 희망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는 것은 감옥에서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야하는 박사에게는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감옥에서의 자신만 존재할 수 있었고 이런 상태로 감옥에서 살아가는 그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밖으로 나왔지만 그의 목소리는 감옥에서의 절망감과 감옥 가기전의 행복했던 시절이 소거되어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인다. 감옥에서 18년의 생활은 그에게 18년간 황야를 떠도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어디가 목적지인지 보이지 않는 황야 한 복판에 서서 헤매고 있을 때처럼 어떠한 희망도 꿈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마네트 박사의 현재 상태는 그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감옥에서 죽어 있었고, 감옥에서 나왔지만 지금도 여전히 죽음에 놓여있다. ‘절망하고 상심한 생명체’는 살아있지만, 디킨즈에게는 죽어 있는 생명체였다.

의사의 새로운 삶은 틀림없이 긴장과 근심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지혜로운 로리 씨는 그런 삶에서 마네트 씨의 자부심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만한 일도 없었다. 자연스럽고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리 씨는 그런 점을 묘하게 생각했다. 마네트 박사는 그 전까지 딸이나 친구가 자신의 수감 경험을 개인적인 불행이요, 상실이며, 약점으로 여겼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서, 박사 스스로 예전의 시련을 통해 힘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친구나 딸이나, 박사가 그런 힘으로 다네이를 끝내 무사히 데려올 것으로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다.(p389)

마네트 박사의 사위인 찰스가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난다. 남편의 수감에 슬퍼하는 사랑하는 딸을 보면서 박사에게 이 불행한 사태를 꼭 극복해야한다는 의지가 생겨난다. 그래서 이 불행을 몰고 온 사건은 박사에게 긴장과 근심을 안겨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박사에게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하고 또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박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경험인 감옥에서의 18년이라는 과거는 이제 잊고 싶은 자신의 삶의 부분에서 지금의 사위의 구제를 위한 도구가 되었고 그것은 박사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주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타인에게 숨기고 싶은 박사의 과거가 타인이 박사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과거로 변모된다. 박사의 수감 경험은 혁명 세력에게는 자신들의 편이라는 믿음으로 작용했고, 이를 알게 된 딸과 박사의 친구들은 박사가 루시의 남편인 찰스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다. 이는 박사에게 과거 잊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감옥 경험이 이제 그에게 자부심을 느낄 만큼의 이로운 경험이 된 것이다. 파리의 감옥은 그대로인데 감옥을 출입하는 박사의 과거와 현재 처지는 땅과 하늘만큼 큰 차이가 난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감옥에서 되살아남을 경험하고 있는 마네트 박사이다. 디킨즈는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육체가 살아있더라도 절망과 상심으로 매일 매일을 보내는 생명체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 생명체가 같은 자리에서 절망과 상심을 벗어나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게 되는 과정을 되살아났다고 그리고 있다.

마네트 박사의 온갖 노력에도 결국 사위의 찰스에게 단두대행이라는 판결이 난다. 이제 찰스는 죽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찰스가 살아서 감옥을 나오게 된다. 무슨일이 벌어졌는가?

시드니 카턴의 되살아남

슬프고 슬프게도 태양은 떠올랐다. 햇빛이 비친 광경에서 무엇이 그 남자의 일생보다 더 슬프겠는가.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p133)

카턴은 자신의 직업도 있고 직업에서 나름 능력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하루는 슬픈 태양이 떠오르며 시작된다. 그 이유는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떠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턴은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자신을 파먹는 해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해충이 계속해서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매일 매일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고 혐오하는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슬픈 하루다. 그는 살면서 스스로 어떠한 희망도 저항도 가질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깊이 절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늘 하루도 그렇게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절망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카턴과 같은 사람은 디킨즈에게 죽은 자였다. 그런 매일을 살고 있던 카턴에게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사랑하는 루시를 불행해서 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방황하고 싸우다 패배해서 기진맥진한, 그러나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고 목적지를 발견한 사람의 목소리였다.(p448)

카턴은 마네트 박사와 마찬가지로 혁명세력에 잡혀 감옥에 구금되어있는 루시의 남편인 찰스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라 기절하는 약을 구하러 갔다. 조금이라도 계획이 어긋나면 찰스를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에서 약을 사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찾은 사람의 것이었다. 어제까지의 절망으로 가득 차 자신을 아무렇게나 살게 두었던 카턴은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p449)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질수록 카턴은 죽음을 통과하여 맞이하는 새로운 삶을 꿈꾼다. 성서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구절은 카턴에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암호와 같아서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여러 번 이 구절을 혼잣말로 되 뇌이곤 한다.

그러다 얼마 후 그는 깨어나서 일어난 뒤 조금 더 서성이면서 정처 없이 소용돌이치다 겨우 물살에 몸을 싣고 바다로 나아가는 물을 구경했다. ‘내 처지와 비슷하군.’(p451)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참을성 많고 불평을 모르던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고 입술이 약간 벌어지며 파르르 떨렸다. “저나 선생님이 신의 자비로 살게 될 그 좋은 곳에서 동생을 기다리는 시간이 참으로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그곳에는 시간이 없어요. 고통도 없어요.”(p537)

죽음을 맞이하기 바로 전에 카턴은 강물을 내려다보며 런던에서의 자신의 삶과 이제 맞이할 삶의 의미를 찾는다. 자신의 그 전까지의 삶은 정처 없이 소용돌이 치기만한 삶이었고 자신이 찰스를 구하고 대신 죽게 되는 것이야 말로 몸을 싣고 바다로 나가는 강물과 같이 진실한 삶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단두대에 올라가기 직전 떨고 있는 소녀의 손을 잡고서 카턴은 죽은 후의 그 좋은 곳에서도 지상에서 겪었던 고통들이 있을 것이라 불안해하는 소녀에게 지상에서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시간도 고통도 없는 삶을 말해준다. 그러자 소녀는 안심하고 떠는 것을 멈추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단두대에서 죽는다. 그리고 죽음 바로 직전에 그는 예언한다. 바다로 나아가는 강물처럼 그가 가는 곳은 가 보지는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곳 보다 편안한 곳일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그의 죽음이야 말로 삶에서 그가 한 어떠한 일 보다 가장 자신이 원하고 꿈꿔왔던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카턴 역시 단두대에서 죄수 중 가장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죽음을 맞이한다.

마네트 박사의 떨치고 싶었던 과거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경험으로 바뀌어 박사가 새로운 존재로 지상에서의 스스로 되살아난다. 그는 타인을 치료하며 자신도 치료된다. 하지만 누구도 구제하지는 못한다. 반면 지상에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어떠한 희망도 없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살며 자신 스스로도 구제할 수 없었던 카턴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구하려 목숨을 담보로 뛰어든 혁명의 장에서 죽음으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되살리게 된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제하고 있는 카턴의 죽음 지적의 의연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되살아났구나’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디킨즈의 되살아남은 인간의 육체가 죽고 되살아난다는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 디킨즈는 아이러니하게도 카턴의 육체적 죽음을 가장 최고의 되살아남의 자리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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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6 20:33
    자신의 되살아남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타인의 미래를 향한 기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디킨스가 혁명이 아니라 '재생'을 이야기할 때, 그는 런던의 비정한 시장경제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타인의 가난과 자신의 부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걸까요? 찰스 디킨스를 정말 좋아하셨던 윤순선생님의 표정도 갑자가 확! 떠오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