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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과제 고침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9-15 21:22
조회
29
170915 절차탁마 M 공통과제 고침 / <두 도시 이야기> / 혜원

 

두 가지 되살아남

 
  1. 되살아남, 정체성의 회복


 

<두 도시 이야기>의 키워드, ‘되살아남’은 마네트 박사와 찰스 다네이의 경우를 보건대 ‘과거의 회복’ 혹은 ‘과거와의 화해’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죄수였던 시절, 혹은 귀족이었던 시절을 모두 잊은 것처럼 영국 골목 어귀에서 ‘가정 내 아버지(남편)’으로서 루시 옆에 있었는데, 그들이 과거 자신의 신분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영국에서 갖게 된 위치는 자신들의 과거를 대체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마네트 박사의 경우 ‘죄수’에서 ‘의사’이자 루시의 ‘아버지’가 된 것 같지만 사실 이것들은 서로 같은 범주 안에 있지 않다. 마네트 박사는 의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죄수였던 자신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네이 역시 자유를 찾아, 압제를 벗어나 ‘귀족’에서 ‘교사’이자 루시의 ‘남편’이 되었지만 후자의 두 개는 전자를 대체할만한 범주의 개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죄수’라든가 ‘귀족’은 그들이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따라붙는 사회적 신분이지만 ‘교사’라든가 ‘아버지’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바로 무용해지는 포지션이다. 즉 ‘직업’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이들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서라도 프랑스에 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취해야 했다.

이들은 사실 프랑스에 있을 때 너무 괴로웠기에 영국으로 왔다. 마네트 박사는 억울한 죄목으로 18년간 산채로 묻혀 있다시피 했었고 다네이는 자신의 가문이 백성들과 마네트 박사에게 자행한 압제와 학정이 끔찍했고 버거웠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랑스에서 영국까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결국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 모험을 해야 했다. 왜? 그것은 당시 영국이 자유로운 나라인 동시에 이들에게 자유 외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나라였던 점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다네이와 마네트 박사는 영국으로 온 순간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개인’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된 이상 과거는 물론 불변하는 신분이나 그전까지의 사회적 지위 역시 사라진다. 직업이 아니면 자신에 대해 말할 수단이 없고 얼마나 버느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전부가 되는 사회에 진입한 것.

이런 사회에서 마네트 박사와 다네이가 정체성을 찾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그런데 가정은 너무나 폐쇄적이라 그곳에 들어갈 때는 바깥의 모든 것이 세탁된 채로 있어야 했다. 소호의 골목 어귀에 있는 밀실은 ‘아버지’ ‘남편’ ‘아내’ ‘자식’ 외 다른 포지션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네트 박사와 다네이는 ‘밖’에서는 비록 원수지간이었는데 그것을 전부 없었던 일인 것처럼 덮어야 하는, 억압적인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네트 박사는 가정 안에서 평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득 ‘죄수’로 돌아가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다네이는 루시에게 자신의 본명이나 과거를 뚜렷이 밝히지 못한 채로 살아가야 했다.

 
  1. 시드니 카턴의 부활


 

마네트 박사와 다네이가 이런 분열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하다가 프랑스로 다시 건너가 과거의 자기 정체성을 선취하고 그때의 문제를 매듭지으면서 진정 ‘되살아남’을 겪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남’을 겪은 사람이 있다. 바로 시드니 카턴이다. 변호사인 그는 술꾼이고, 자포자기한 사람인데, 애초에 자신에게 확실한 ‘역할’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던 사람이다. (119) 작품 내에서 카턴의 과거는 조망되지 않는다. 그가 전자의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현재의 방종함이 과거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이 주로 이야기된다. 시드니도 한때 루시에게 희망을 걸었다. 루시를 성소처럼 떠받들었고 그녀를 통해 타락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새롭게 노력하자, 다시 시작하자, 게으름과 방탕을 털고 포기했던 싸움을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을 해보지만 결국 자신의 타락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했다고 루시에게 고백한다.

시드니는 과거에 비해 타락한 자신의 상태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그는 다른 시도를 한다. 바로 프랑스에서 다네이가 되어 죽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 시드니 카턴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의 완성을 꾀하는 이전의 ‘되살아남’과는 다른 모습이다. 마네트 박사의 ‘Recalled to life(소생)’이나 다네이의 ‘revive(회복)’은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정상태로 만든다는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예전 맥락을 복원했고, 그 상태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다시 ‘개인’으로서 영국을 살아갈지 아니면 원수지간의 갈등관계를 심화시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카턴의 되살아남에는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이 인용된다. 이것은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프랑스 혁명, 그 원한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방인인 그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은 ‘나’에 주목하고 ‘나’의 원한을 해소하고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지대에서 다른 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나’를 버리고 ‘너’가 되고 나중에는 카턴도 다네이도 아닌 존재가 되어 처음 보는 여자를 위로하고 다른 세계가 올 것을 예언한다. 그가 제시한 비전에는 프랑스 혁명기의 격렬한 원한의 소용돌이도, 런던의 숨 막히는 밀실도 없다. 혁명 정부는 몰락하며 런던의 루시 가족들은 소호의 골목 어귀가 아닌 병원과 광장에서 이야기하며 카턴을 그릴 것이다.

디킨스는 혁명 이후란 적폐 청산만으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드니의 죽음을 통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드니의 예언과 같이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는” 단절의 순간, 우리는 과거가 주는 무게감에서 벗어나 새롭게 되는 혁명은 완수된다.

 
  1. 부르주아 가족의 확장


세 남자의 되살아남의 중심에는 과거를 모조리 세탁하고 들어와야 하는 성소(聖所) 가정이 있다. 그렇다면 디킨스는 부르주아 가족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마지막 시드니의 죽음을 계기로 외부의 터치를 허락하지 않는 가정은 변화의 지점을 맞는다. 시드니는 처음 보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또 광장에서 죽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소생하는 찰스 다네이에게 주었다. 또 자신의 이름이 루시의 자식에게 이어지는 예언을 한다. 즉 그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의 이후를 계시하기도 하지만 부르주아 가정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늘 만나던 일정한 수의 사람들과 맺는 폐쇄적인 관계에서 일번. 골목에서 광장으로의 공간 이동, 죽은 사람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 이것들은 가정이 단지 살아있는 구성원만으로 이루어진,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동체일 수 없게 한다.

19세기의 런던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던 시대였다. 영주는 고용주로, 소작농은 임금노동자로, 시골 농부는 도시의 떠돌이로, 모두가 뿌리 뽑힌 채 변하던 시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빈곤이 극심해지던 시대에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기(1775)를 쓰며 자신의 현재(1859)를 예언하게끔 한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 정의를 뒤바꾸는 런던의 ‘혁명’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 의의는 ‘집안의 천사’를 주축으로 하는 폐쇄적인 가족 공동체였다. 부르주아의 유난한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사회적 공동체성은 해체되어 그들이 이제 가족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공동체는 모두 해체되면서 사람들은 밖에서는 떠도는 임노동자로, 안에서는 가족에 집착하는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하지만 디킨스는 그런 것은 가장 수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런 ‘혁명’ 이후 국면이야말로 부르주아 계급의 변화가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1. 되살아남: 밀실에서 광장으로


 

마네트 박사, 다네이, 시드니는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고 나서 비로소 ‘되살아남’을 겪는다. 소호의 골목어귀, 아니 런던 자체는 그들이 되살아날 수 없는 장소다. 런던도 시체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긴 한다. 바로 도굴꾼 제리에 의해서다. 죽을 때 재산과 위신을 갖고 무덤에 잠들어 있다가 파헤쳐져서 착취당하는 도시가 바로 런던이다. 텔슨 은행에는 마치 그럴 수 있다는 듯 죽은 자의 머리가 전시되어 있고 강도를 당해도 하소연할 경찰이 없는 곳. 이런 스케치는 런던 사람들의 처지가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는 극심한 공동체의 해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런던 토박이든 외국 망명자든 모두 골목 어귀에 숨어 살며 빗장을 지르는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숨어사는 사람들의 거리, 도망자들의 도시, 런던.

반면 파리는 그들이 방기한 임무가 있는 곳이자 은신처가 없는 곳이다. 더구나 언제 어떻게 법이 바뀔지 모르는 혁명정국. 정말 이때는 모든 것이 있었고 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파리. 그들은 이 광장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공동체원에 배타적이었던 런던과 달리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치료하거나 자신이 방기하던 책임을 다시 마주하는 일,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과 관계 맺거나 누군가를 대신해서 죽는 일을 겪으면서 말이다.

이렇듯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수세적인 입장에서는, 그리고 책임에서 도망친 망명자의 입장에서는 절대 될 수 없다. 반면 다른 존재가 되면 그건 그 자체로도 혁명이 된다. ‘-되기’는 항상 상호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시드니 카턴의 죽음은 단지 카턴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이다. 혁명정부에 의한, 루시의 가족을 위한 그의 죽음은 혁명의 끝나지 않는 원한의 고리를 끊었음은 물론 새로운 공동체원은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의 빗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다른 존재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되살아남은 루시 가족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어 오랫동안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tyûY
전체 1

  • 2017-09-19 17:58
    '되살아남'이란 단지 구태의연한 나의 정체성을 다시 붙들겠다는 뜻은 아니군요.
    디킨스의 인물들이 결연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변신하던 과정도 떠오릅니다. 4학기에도 박진감있게 열정적으로 글 쓰시압!